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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 죽변항에 고기잡이배가 들어오는 새벽 다섯 시, 그는 패스 전략 대신 ‘입찰 전략’을 짠다.

축구공 대신 홍게와 우럭을 가득 들고 죽변수산물시장으로 들어온다. 2003년 미국 여자월드컵 사진을 배경으로 “인생 2막 수산물과 함께” 문구가 씌어 있는 현수막이 걸린 작은 횟집. 전 여자축구 국가대표인 이명화씨(49)의 ‘인생 2막’이 있는 곳이다.

‘여자축구 1세대’ 이명화 전 선수가 28일 울진 죽변면 죽변수산시장에서 홍게를 잡고 있다. 이 전 선수의 뒤로 “인생 2막 수산물과 함께”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두리 기자

‘여자축구 1세대’ 이명화 전 선수가 28일 울진 죽변면 죽변수산시장에서 홍게를 잡고 있다. 이 전 선수의 뒤로 “인생 2막 수산물과 함께”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두리 기자

최초의 한국 여자축구 국가대표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실업팀, 생활축구 지도자를 두루 거쳐 온 이씨는 한국 여자축구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죽변에서 태어나 죽변초등학교 육상부로 운동을 시작했지만, 일생의 대부분을 고향을 떠나 지냈다. “어릴 땐 떠나고 싶었어요. 아버지가 뱃사람이셨는데, 술도 자주 드시고 어머니랑 싸우시고 하니까. 경북체육중학교 펜싱부로 들어가서 기숙사 생활을 했죠.”

어릴 때부터 논두렁에서 동네 남자 아이들과 공을 차며 놀았던 이씨는 경북체중·고 재학 시절 펜싱 선수로 활동하면서도 축구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운동장에 물병을 세워 놓고 드리블 연습을 했다. 펜싱에 필수적인 스피드 훈련도 축구 감각을 벼리는 데에 도움이 됐다.

“핸드볼, 배구 같은 구기종목에 다 여자 국가대표팀이 있는데, 축구만 없었거든요. 언젠가 생길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1990년, 강릉 강일여자고등학교에서 한국 최초로 여자축구부를 만든다는 신문 광고를 보고 이씨는 무작정 강릉으로 향했다. 그리고 입단 일주일 만에 베이징 아시안게임 출전을 위해 급조된 여자축구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A매치 81경기 출전, 10골’ 역사의 시작이었다.

육상, 핸드볼 등 타 종목 선수들을 차출해 꾸린 여자축구 대표팀은 초반 고전했으나, 빠르게 성장했다. 1993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아시아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서 이씨는 A매치 데뷔골을 멀티골로 화려하게 터트렸다. 2001년 베이징유니버시아드 축구대회에서 한국은 여자축구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은 여전했다. “대표팀에서 경기를 가도 항상 동네 여관에 묵었어요. 한 방에 네 명 다섯 명씩. 유니폼은 각자 손빨래를 하고요.”

경희대 재학 시절 이명화씨의 인터뷰가 실린 경향신문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경희대 재학 시절 이명화씨의 인터뷰가 실린 경향신문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이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숙명여대 축구부에 입단했지만, 1년 만에 팀이 해체되면서 경희대로 편입했다. 그해 이씨는 봄철대학축구연맹전에서 3경기 7골을 터트리며 경희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씨는 “앞으로 10년은 더 뛰고 싶은데 마음껏 뛸 여자실업팀이 없다”고 말했다. 그때 국내 여자축구 실업팀은 낫소여자축구단과 인천제철여자축구단 두 팀이 전부였다. 1995년, 인천제철에 입단한 이씨는 첫 달 월급으로 80만원을 받았다.

2009년이 돼서야 여자축구리그인 WK리그가 시작됐지만, 팀은 8개에 불과하다. 그마저 해체와 창단을 거듭하고 있어 여자축구 유망주들이 안정적으로 몸을 담을 구단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씨는 여자축구를 ‘단기 이벤트’가 아닌 ‘장기 프로젝트’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골 때리는 그녀들’이 인기잖아요. 물론 재밌죠. 그런데 그게 여자축구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오락으로 그치는 게 아쉬워요. 매체에서는 여자 선수들의 외모만 강조하고, 아무리 공을 잘 차도 ‘예쁜 선수’가 되는 거죠. 여자축구의 현실을 꾸준히 비춰주고, 투자를 해야 ‘지소연 이후’가 있는 거거든요.” 2015년 이씨는 대한축구협회(KFA)가 설립한 ‘여자축구 활성화 전략 수립 TF’의 위원으로 임명됐지만, 팀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해체됐다. 이씨가 여자축구에 대한 관심이 ‘보여주기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명화씨는 이씨는 2004년 은퇴 이후 ‘엘리트 축구’의 세계를 떠나 생활축구 지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이두리 기자

이명화씨는 이씨는 2004년 은퇴 이후 ‘엘리트 축구’의 세계를 떠나 생활축구 지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이두리 기자

이씨는 2004년 은퇴 이후 ‘엘리트 축구’의 세계를 떠나 생활축구 지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경기와 수업이 줄줄이 취소되자 30년 만에 ‘귀향’했지만, 지금도 울진 유소년축구교실에서 ‘축구 꿈나무’들을 가르치고 있다. 새벽에는 수산물과, 오후에는 축구공과 함께하는 삶이다.

“여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제 꿈은, 유소년 여자축구 인재를 발굴해 보는 거예요. 방과후 축구교실에도 여자 아이들은 별로 없거든요. 조금 있는 유소녀 축구단도 인원이 없어서 해체하기 일쑤고. 그래도 나처럼 축구를 좋아해서 잘하고 싶어하는 여자 아이가 한 명은 있지 않을까요.”


이두리 기자 redo@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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