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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2019년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신체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형법의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 12월31일까지 관련 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다. 낙태죄는 2021년 1월1일부터 효력을 상실했지만 대체입법은 답보 상태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낙태 전후로 적절한 의료서비스와 돌봄이 제공돼야 한다”고 했지만 입법 공백 속에 ‘안전한 임신중단’은 아직도 요원하다.


임신중단을 희망하는 여성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임신중단을 경험한 여성들의 후기를 알음알음 듣거나 해서 병원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 공공 상담기관은 제 역할을 못한다. 임신중단이 범죄였던 3년 전이나 임신중단이 죄가 아닌 지금이나 현실은 별반 다르지 않다.



낙태죄 폐지 1년 4.10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10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의 법적 실효가 상실된 1년을 맞아 “모두에게 안전한 임신중지가 보장될 때까지” 집회를 열고 있다. 김영민 기자

낙태죄 폐지 1년 4.10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10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낙태죄의 법적 실효가 상실된 1년을 맞아 “모두에게 안전한 임신중지가 보장될 때까지” 집회를 열고 있다. 김영민 기자

“임신중단을 생각 중”이라는 기자의 말에 한 비영리단체가 운영하는 임신·출산 관련 상담센터의 상담원은 출산을 권유했다. “혼자 키울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자 상담원은 “낙태할 때 ‘지운다’고 표현하지만 신체·정신적으로 지워지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죄책감이 남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입양을 생각해보시라”고 했다.

경향신문은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3년, 낙태죄 효력상실 1년4개월을 맞아 임신중단에 대한 상담과 정보 제공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실태를 알아보려고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서울시, 비영리단체 등이 운영·지원하는 임신중단 상담 시스템을 직접 이용해봤다. ‘임신중단을 고민하는 여성’을 가정해 접근했다.

그 결과 제공되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기관들은 입양을 권유하거나 ‘인터넷을 검색해보라’고 했다. 낙태죄가 폐지된 2021년 1월1일부터 임신중단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3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6일 여가부가 운영하는 가족상담센터에 “임신중단 수술을 받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는가” 물었다. “병원 소개는 어렵다. 임신 중 받을 수 있는 혜택, 임신중단이 법적으로 문제 있나 이런 부분 상담 도와드리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같은 날 보건복지부에서 위탁받아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운영하는 위기임신출산 종합상담 서비스 ‘러브플랜’ 메신저 상담을 받았다. 같은 질문에 상담원은 “접근이 쉬운 인근 병원 또는 포털사이트 검색 후 인공임신중절 수술 가능한 병원을 확인하셔서 내원하시면 된다”고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라’는 얘기였다. ‘임신중단 약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없느냐’고 물었다. 기계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식약처의 품목허가를 받은 인공임신중절 의약품이 없어 인공임신중절 의약품의 처방·판매·유통은 불법임.”

대부분은 다른 기관을 연결하거나 심리 상담을 해주는 정도였다. 여가부 관계자는 “임신중단에 대해서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공감하고 지지하는 상담을 진행하고, 깊은 상담이 필요하면 가족센터와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시술을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 의약품 어디서 구하는지 알려주는 서비스는 여가부에 없다”고 했다.

임신중지 문의하자 "인터넷 검색해보라"는 정부 상담센터[플랫]

복지부에 ‘임신중단 시술 가능한 병원을 알려줄 수 없다고 답변한 이유가 궁금하다’고 물었다. “시술 및 의약품 제공 의료기관이나 약국에 대한 정보제공 서비스는 현재 없으며,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교육·상담을 원하는 경우 의료기관에서 전문의를 통해 20분 이상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서면 답변을 받았다.

‘전화 돌리기’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운영하는 여성폭력 사이버상담 1366에서 상담원은 기자에게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인가”라고 물었다. “아니다”라고 답하자 “120 다산콜센터에 연락하라”고 안내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다산콜재단센터는 “저희는 서울시청 업무 보는 곳이다. 그런(임신중단 관련 의료기관 알려주는) 부서 따로 없다”며 상담을 마쳤다.

결국 ‘목 마른 사람이, 각자 알아서’ 정보를 수소문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는 공신력이 떨어진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사이트를 카피하고 사기치는 곳이 많아지고 있어 후불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미프진(임신중단 약물) 판매 광고가 앞다투어 올라왔다. 포털사이트 블로그에는 ‘특정 국가에서 제조된 임신중절 약은 모두 가짜다’는 근거 없는 글이 있었다. ‘낙태’를 검색하면 ‘슬프고 부끄러운 순간들’ ‘낙태 제공자에서 생명 수호자가 된 여인의 실제 이야기’ 등 임신중단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게시글이 나왔다. 인권단체가 국제적으로 임신중단과 관련한 정보·상담 및 임신중단 약물 배송 등을 제공하는 ‘위민온웹’ 사이트는 지난해 12월31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에 의해 차단됐다.

📌인권단체들, 방심위 ‘위민온웹’ 접속 차단 조치에 행정소송 제기


정보를 찾는 데 시간이 걸리다보니 임신중단 시기도 늦춰진다. 지난해 3월 실시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설문조사에서 ‘임신 사실 인지부터 임신중단까지 1주 이상 걸린 이유’로 가장 많이 나온 답변은 ‘임신중단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35.1%)였다. 이어 ‘임신중단 수술이 가능한 의료기관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없어서’(34.7%)였다. 보고서는 “‘임신중단 수술이 가능한 의료기관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없어서’와 ‘임신중단에 필요한 비용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임신중단 의료접근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어 앞으로 정책현장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박슬기 산부인과 전문의(언니들의병원놀이)는 임신중단에 대한 의료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임신중단을 ‘보편적 의료’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임신중단에 대한 의료접근성이 낮은 이유는 “성·재생산 영역에서 여성이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한을 보장하는 것을 (정부와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 전문의는 “실질적 지원 없는 의료 상담 정도로는 임신중단 접근권 문제를 메울 수 없다”며 그는 “건강보험 적용, 유산유도제 도입,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에 대한 포괄적 성교육 등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김제이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활동가는 “(임신중단을) 당연한 공공 의료 서비스로 접근해 국가, 사회가 어떤 지원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han.kr
강연주 기자 play@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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