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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2019년 4월11일,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신체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형법의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 12월31일까지 관련 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다. 낙태죄는 2021년 1월1일부터 효력을 상실했지만 대체입법은 답보 상태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낙태 전후로 적절한 의료서비스와 돌봄이 제공돼야 한다”고 했지만 입법 공백 속에 ‘안전한 임신중단’은 아직도 요원하다.

임신중단을 희망하는 여성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임신중단을 경험한 여성들의 후기를 알음알음 듣거나 해서 병원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 공공 상담기관은 제 역할을 못한다. 임신중단이 범죄였던 3년 전이나 임신중단이 죄가 아닌 지금이나 현실은 별반 다르지 않다.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37),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47) 김영민 기자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37),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47) 김영민 기자

2020년 12월, 시민단체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가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해 발간한 국내 첫 임신중단 가이드북 <곁에, 함께>의 서문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이제 우리는 출발선에 섰습니다…임신중지가 단절되거나 숨겨야 할 경험으로 남지 않길 바랍니다.” 책은 낙태죄가 효력을 상실하는 이듬해 1월부터 임신중단을 희망하는 여성을 마주할 의료진이 피해야 할 표현부터 임신중단을 위한 약물 치료, 수술 방법 등을 담았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3년, 낙태죄 효력 상실 이후 1년4개월이 지났다. 답보 상태인 대체입법과 입법 공백 속에 “임신중단이 단절되거나 숨겨야 할 경험으로 남지 않길 바란다”는 <곁에, 함께> 필자들의 바람은 현실에서 요원하다.

2020년 12월, 시민단체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가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해 발간한 국내 첫 임신중단 가이드북 <곁에, 함께>

2020년 12월, 시민단체 성적 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가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해 발간한 국내 첫 임신중단 가이드북 <곁에, 함께>

<곁에, 함께> 집필에 참여했던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47)와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37)를 지난 5일 만났다. 서울 소재 산부인과에서 근무하는 최 전문의는 약물요법을 활용한 임신중단 의료를, 윤 전문의는 서울의 공공병원에서 약물요법과 수술을 병행해 임신중단 의료를 하고 있다. 이들은 “임신중단이 ‘완전한 비범죄화’가 된 지금은 임신중단을 ‘공적 의료’의 범주에 놓고 보다 전향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안전성 높은 임신중단 의약품, 보급 서둘러야”



“낙태죄가 있건 없건, 의료 방법 상의 차이는 크지 않아요. 기존의 의약품을 임신중단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졌다는 정도일까요?” 최 전문의가 임신중단을 위해 사용하는 약품은 ‘미소프로스톨’이다. 위장치료용 약품인데, 자궁 수축 작용이 있어 임산부에게는 사용이 제한돼왔다.

한국의 임신중단 약물요법은 반쪽짜리다. 국제적으로는 미페프리스톤(미프진)과 미소프로스톨을 병행하는 방식이 권고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미페프리스톤 도입 허가가 미뤄지고 있다. 사용법을 둘러싼 학계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아서다. 정부는 낙태죄 효력 상실을 앞둔 2020년 12월 “임신중단 의약품의 허가·심사를 신속하게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임신중단을 희망하는 여성들은 여전히 안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할 수 없이 온라인 암시장에서 임신중단 의약품을 찾다 보니 약의 품질도, 안전성도 보장받지 못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의약품 온라인 판매 광고 적발 현황’에 따르면 임신중단 의약품 관련 적발 건수는 2015년 12건에서 2019년 2365건으로 200배 가까이 급증했다.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 김영민 기자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 김영민 기자

최 전문의는 미페프리스톤을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 약의 안전성은 이미 입증됐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2005년부터 미페프리스톤을 필수의약품으로 분류해왔고, 올해 1월 기준 전 세계 87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 임신중단만이 아니라 유산유도 등 여성의 안전을 위해 다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서 “의료적 가치를 고려해서라도 국내에 빠르게 도입돼야 한다”고 했다.

또 “임신중단 의약품을 산부인과 처방에만 한정할 경우, 비수도권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접근성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며 “비수도권일수록 인근에 산부인과가 없는 곳이 많다. 최종적으로는 일반 의료기관까지 처방을 확대함으로써 여성들이 임신 초기부터 빠른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장기적으로는 산부인과뿐 아니라 일반 의료기관도 임신중단 의약품을 처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페)이 발표한 ‘임신중지 경험 설문·실태조사 및 심층인터뷰 결과’에 따르면,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사는 사람의 60% 이상은 평균 1주 이내에 임신중단 여부를 결정했지만 비수도권에 사는 사람의 70% 이상은 임신중단을 결정하는 데 평균 1주 이상이 걸렸다.

‘임신중단 상담’만 지원되는 건강보험?
“의료 전체로 확대 적용해야”



충분한 정보와 상담이 제공돼야 ‘안전한 임신중단’이 가능하다. 1988년 대법원 판결로 낙태죄가 폐지된 캐나다는 주 정부가 운영하는 성적건강 홈페이지에서 피임과 성병, 임신중단 등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제공한다. 2020년 낙태죄를 폐지한 뉴질랜드도 마찬가지다. 국내 사정은 다르다. 모낙페는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에서 “임신중단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아 임신중단 시기가 늦어지거나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사용하는 등의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며 “헌법불합치 결정 이전과 달라진 것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 김영민 기자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 김영민 기자

윤 전문의는 “정보와 상담은 연결된 영역”이라며 “임신중단 의약품을 자가 복용 후 임신중단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초음파 검사를 받고자 병원을 찾는 여성들이 있다. 만일 의료진들이 (부족한 상담 정보로) 약물의 임상경과나 관련 초음파소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불필요한 추가 수술을 더 권유하게 될 수 있다”고 했다.

정부는 지난해 8월부터 임신중단 수술을 상담한 경우에 한해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약물처방·수술을 비롯한 임신중단 의료행위 일체로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병원이 처방하는 약물 구입 비용은 보통 30만~40만원, 수술은 임신주수에 따라 통상 50만~80만원이 든다. 응답자의 64.4%는 약물 비용에, 81.6%는 수술 비용에 부담을 느낀다고 했다.

윤 전문의는 “임신중단이 급여화되면 임신중단 또한 일반적인 의료서비스 중 하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며 “임신중단에 대한 의료인의 교육이 더 확대될 수 있고 임신중단 의료에 참여하는 의료인도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강연주 기자 play@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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