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
플랫

플랫팀

여성 서사 아카이브

울산에서 나고 자란 김모씨(30)는 학창 시절 줄곧 서울살이를 꿈꿨다고 한다. 처음 입학한 지방 사립대에 이틀 만에 자퇴서를 내고 이듬해 들어간 인천의 한 대학도 한 달 만에 관둘 정도로 간절했다.

“서울에 있으면 경쟁에서 앞서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1등은 못 되더라도 그 언저리, 그러니까 2-1등, 2-2등은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3수 끝에 ‘서울 입성’에 성공한 그는 지금 서울의 한 광고대행사에서 일한다. 김씨는 “울산은 애초에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기회 자체가 서울에 많잖아요. 일자리 종류도 훨씬 다양하고요. 고등학생 때 영어 말하기 대회에 참석하려고 처음 서울 땅을 밟았던 날이 기억나요.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를 보면서 ‘여기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8일 김모씨(30)가 서울역 앞에 서 있다. 고등학생 시절 영어 말하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서울 땅을 밟았다는 그는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모습을 보며 ‘여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권도현 기자

지난 8일 김모씨(30)가 서울역 앞에 서 있다. 고등학생 시절 영어 말하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서울 땅을 밟았다는 그는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모습을 보며 ‘여기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권도현 기자

전북 정읍 출신인 최모씨(26)는 전주에 있는 국립대를 졸업했다. 최씨는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고향에 남아 있길 원했으나 일자리 때문에 서울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 원래는 수도권에 살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이커머스’ 회사로 정했는데, 관련 기업은 다 서울에 몰려 있더라고요. 지방의 공기업보다는 좀 더 창의적이고 젊은 느낌의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 서울행을 결심했고요.”

수도권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돈과 사람을 빨아들이고 있다. 주민등록 인구통계를 보면, 2020년 수도권 인구는 2596만명으로 대한민국 총인구의 50.1%를 차지한다. 나라 전체 면적의 10분의 1에 불과한 수도권에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살고 있다. 지역내총생산(GRDP)의 수도권 비중도 2020년 기준 52.1%에 달한다.

모든 물적·인적 자원이 한쪽으로 쏠린 상황에서 수도권도 살기 힘든 공간이 되고 있다. 수도권에 사는 이들은 과도한 경쟁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교통난 등 각종 도시 문제에 시달린다. 특히 집값이 치솟으면서 개인의 선택이나 가치관과 별개로 결혼도 주저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지나친 경쟁으로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인구절벽도 가속화 되는 중이다. 전문가들은 ‘지방 소멸은 공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수도권 팽창이 불러온 ‘공멸’의 위기



서울의 한 브랜딩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박모씨(32)는 서울에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로 ‘혼잡한 도시 환경’을 꼽았다. 서울 전역에는 지하철역과 버스정류장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들어서 있다. 원하면 어디로든 이동하는 게 어렵지 않은 편리한 환경이지만, 출퇴근 시간대에는 만성적인 교통혼잡을 감내해야 한다. “하루는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지하철역을 보면서 ‘숨 막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포화 상태가 된 수도권은 주거비가 비싸고 생활비도 많이 든다. 박씨는 대학생 때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5만원 정도 하는 7평 원룸을 구했다. 넉넉하지 않은 공간에서 동생과 함께 살았다. 직장인이 된 지금은 주거비로 월 100만원을 지출한다. 월세와 관리비, 각종 생활비 등을 합하면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150만원을 넘는다.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 이상 저금은 힘들다”고 했다.

지난 4일 박모씨(32)가 서울 당산역 인근에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대구 출신으로 12년 전 서울로 올라온 박씨는 “한강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쓸쓸하다. 나의 서울살이도 비슷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강은 기자

지난 4일 박모씨(32)가 서울 당산역 인근에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대구 출신으로 12년 전 서울로 올라온 박씨는 “한강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쓸쓸하다. 나의 서울살이도 비슷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강은 기자

이상호 한국고용정보원 부연구위원은 수도권에서 나고 자란 이들과 비수도권 출신 사이의 ‘불공정’도 지적했다.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원래 수도권에 살던 사람과 출발선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비용적인 측면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 리가 없죠. 노동시장 하위계층에 속할 가능성도 자연스레 커집니다.”

청년들은 집값이 비싸고 생활비가 높은 대도시권에서 자리를 잡느라 결혼을 주저한다. 김씨는 “가정을 꾸리려면 ‘내 집 마련’을 목표로 큰돈을 모아야 하는데, 그러면 지금의 삶을 너무 희생하게 되지 않을까 고민된다”고 말했다. “막연하게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울에서 아이를 낳게 되면 제가 받았던 것만큼 좋은 교육을 제공하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요.”

실제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019년 기준 0.9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62명에 한참 못 미친다. 특히 경쟁이 치열한 수도권은 0.85명, 서울은 0.72명에 불과하다. 감사원은 이 같은 출산율이 계속 유지된다면 2047년 부산 등 13개 시도에서 최대 23%의 인구가 감소하고 전체 인구도 7.1% 감소한 4771만여명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인구학자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수도권 집중은 한국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한 세대 만에 출생아 수가 60%나 감소한 상황은 역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라고 우려하고 있다.

조 교수는 “인구 감소가 너무 빠르면 기존 제도가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질이 떨어지게 된다”고도 말했다. 조 교수는 “당장 대학만 봐도 학생 수가 급감함에 따라 위기에 처했는데 타격은 수도권 대학이 아니라 지방 대학이 받고 있다”면서 “(구조조정 위기에 처한) 지방 대학은 학생뿐 아니라 교직원, 상권도 힘들어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저서 <인구 미래 공존>에서 수도권의 삶이 결혼과 출산의 감소를 부른다는 점도 강조했다. 인간이 경쟁에 내몰리게 되면 자녀를 낳아 기르기보다 생존 욕구를 우선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수도권 과밀→저출산→지방 소멸’의 악순환이 만들어진다는 논리다.

인구밀도와 출산율이 음의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분석 결과도 있다. 서울대 인지과학연구소가 연구용역을 수행한 지난해 감사원 자료를 보면, 서울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의 자녀 수(1.36명)보다 세종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의 자녀 수(1.89명)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 팽창이 불러온 ‘공멸’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는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역대 정부는 저마다 ‘지역균형발전’을 내세웠다. 혁신도시, 기업도시, 행정중심복합도시 등의 대안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19일에 협약식이 열린 부·울·경(부산·울산·경남) 메가시티도 지역균형발전의 대안 중 하나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회를 두고 나름 대책을 찾고 있다.

정치권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그러나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우선 가속화 되고 있는 기업 등의 수도권 집중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 인구 유출의 결정적 이유로 손꼽히는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근본적·종합적 접근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지방 탈출…“고향선 성장 못해”



청년층 수도권 유입의 최근 추이를 보면, 유독 여성의 수도권 유입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상호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젊은 남성의 수도권 유입 비율이 여성보다 높았으나 2010년대 들어서는 여성의 비율이 역전했다”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이 통계청 인구이동통계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00년대(2001~2010)까지는 20대 여성 약 40만명, 남성 약 45만명이 수도권으로 이동(순유입)했다. 2010년대(2011~2020)에는 여성 29만명, 남성 26만명이 이동했다. 특히 2018년부터는 20대 여성의 수도권 이동이 남성보다 매년 4000여명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터랙티브] 지방 소녀들은 어디로
📌[플랫]90년대생 여성 노동자 “우리는 일에 진심이다”

이 연구위원은 산업구조와 노동시장의 변화 때문이라고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따라) 성장하는 서비스업 부문 일자리에는 여성 종사자의 비중이 높은데, 이 일자리들 대부분이 수도권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여성의 경제참여율이 커지고, 정보기술(IT) 진보 등으로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제조업·남성 중심으로 쏠린 지방의 산업구조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조업과 중화학 공업 중심의 산업도시 울산에 살다 서울에 입성한 김씨도 “울산은 애초에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고 얘기했다. “고향에 현대자동차나 현대중공업 같은 대기업들이 있지만 그 일자리는 남성들 위주로만 돌아가요. 고향에 남아 있는 또래 여성들은 교사가 되거나 공기업에 다녀요. 여성들이 도전하며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닌 거죠.”

📌[플랫]일자리 넘쳐난다는 제조업, 그곳에도 ‘젠더 페널티’가 있다

전통적인 제조업 산업이 많은 경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34세 남성 청년 인구는 2000년 43만6000명에서 2020년 32만5000명으로 25.5% 감소했다. 반면 여성 청년들은 같은 기간 41만1000명에서 27만명으로 34.4%나 감소했다. 이에 대해 김유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발간한 ‘경남 청년인구 유출 확대 원인과 일자리 문제 분석’ 보고서에서 “직업을 이유로 지역을 떠난 청년들 중 모든 연령대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큰 순유출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과 ‘가부장제’에 맞춰진 지방 떠나는 20대 여성들[플랫]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2019년 출간한 저서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에서 산업도시 경남 거제시가 저물어가는 과정을 가족 이야기로 풀어냈다. 거제에는 여성들을 위한 괜찮은 정규직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해서 ‘거제의 딸들’은 대학에 진학할 즈음 고향을 떠나 잘 돌아오지 않는다고 분석한다.

양 교수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수도권을 제외하면 여성이 커리어를 쌓을 기회가 없다. 이전에는 남성만 돈을 벌어 가정이 유지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여성이 아이를 키우기만 하는 사회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20세기에 중심이 됐던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수도권일수록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인 문화가 짙다는 점 또한 여성들이 고향을 떠나게 하는 요인이다.

황신희씨(28)는 전남 구례 출신이다. 구례군은 북쪽으로 전북 남원시, 남쪽으로 광양·순천시와 접하는 농촌이다. 오이와 매실, 산수유 등이 유명하다. 그는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고 지역 은행에 취업했다. 신입 직원 연수 기간 도중 사직서를 냈다. “업무에 필요한 지식보다는 화장을 더 강조하고, 연수 내내 7cm 이상 하이힐을 신어야 했어요. 여기서는 내가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황씨는 “지방은 일자리가 적고 접할 수 있는 문화가 다양하지 않다 보니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자는 “농촌이 갈수록 고령화 되면서 인권의식 향상 속도도 더디다”며 “농촌에서 여성이 버티기 어려운 환경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플랫]‘묵음처리’ 되었던 농촌 여성에게 소설은 해방구였다

“공멸 막을 ‘골든타임’ 길어야 10년”



최모씨(25)는 지난 2020년, 5년 가까이 머물던 수도권을 떠났다. 경기지역에 있는 교대에 입학할 때만 해도 “수도권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험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다. 클라리넷을 배우고 싶었으나 비싼 학원비 때문에 엄두도 못 냈다. 외국어 공부도 학교에서 제공하는 단기 무료 강의나 동아리 활동에 의존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임용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 연희동에서 10개월을 살았다. “살던 곳이 홍대입구역 근처라서 사람이 정말 많았는데 나만 빼고 다 행복하고, 여유롭고, 자기 꿈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이 도시에서 내가 뒤처진 건 아닐까…. 서울에 있으면 ‘상대적 박탈감’이 컸어요.”

최씨는 체념한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한때 수도권에 선택지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진짜 ‘선택지’가 아니었어요. 집이든, 취미생활이든 돈이 없으니까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거예요. 일종의 비활성화된 선택지라고나 할까요.” 그는 현재 고향인 강원 삼척에서 부모님과 농사를 지으며 지낸다.

수도권 쏠림 현상은 국민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사람·자본·네트워크가 갖춰진 수도권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 자체가 특혜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는 지방민들의 열패감이 또 다른 지방 혐오를 낳게 된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수도권에서 경쟁했다가 실패하고 고향에 내려온 사람들이 봤을 때 지방은 ‘경쟁의 장’ 안에도 들지 못했다는 생각에 ‘지역은 역시 안 돼’라며 오히려 지방을 비난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진행되는 지방 소멸은 ‘수도권’ 일극체제의 공간 구조와 깊게 연관돼 있어 개별 지역에 대한 파편적인 접근으로는 이 문제를 풀 수 없고, 결국 산업구조 변화와 함께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을 주문했다. 이상호 연구위원은 “지방 소멸은 청년 문제, 일자리 문제, 젠더 문제 등과 함께 하나의 큰 틀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지방 문제를 연구해 온 이관후 국무총리실 소통메시지비서관도 “청년들이 지방을 떠나는 것은 일자리 문제 이전에 기회 자체가 없기 때문”이라며 “현재 속도로 청년들이 지방을 떠나면 10년 후에는 여러 가지 심각한 사회문제가 야기될 수 있는 만큼 새 정부는 향후 10년을 마지막 ‘골든타임’으로 생각하고 균형발전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은 기자 eeun@khan.kr

TOP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