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럽게 살지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 말자"…'시국사건 1호' 한승헌 변호사읽음

전현진 기자
한승헌 변호사의 묘비. 유족 제공

한승헌 변호사의 묘비. 유족 제공

■“지옥에서 만난 하나님 같았다”

스물여섯의 장영달은 ‘서울구치소’에 갇혔다. 서대문 형무소 자리다.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구속됐다. 면회도 금지됐다. 가족은커녕 외부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저 두들겨 맞으며 조사 받았다.

지옥 같은 날이 수개월 이어지던 어느 날, 면회실로 불려갔다. 추운 겨울이었다. 175㎝, 당시 기준 건장했던 청년 장영달 앞에 키가 한뼘은 작은 왜소한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눈빛이 빛났다.

“한승헌 변호사입니다.”

2014년 10월5일의 한승헌 변호사. 한 변호사는 당시 경향신문에 <재판으로 본 한국 현대사 70년>을 연재했다. 김정근기자

2014년 10월5일의 한승헌 변호사. 한 변호사는 당시 경향신문에 <재판으로 본 한국 현대사 70년>을 연재했다. 김정근기자

한 변호사는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 자격으로 구치소에 들어왔다. 민청학련 구속자들 변호를 위해서다. 서슬퍼런 교도소 안에서 그는 아무 눈치도 보지 않았다. 이것저것 질문하며 ‘하고 싶은 말 하라’고 용기를 복돋았다. 그는 실제보다 더 커보였다.

일흔넷의 장영달은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옥에서 하나님을 만난 기분이었지. 그 상황에서 변호사라니.”

그때 인연이 이후에도 48년 동안 이어졌다. 14살이 많은 한 변호사는 고교 선배(전주고)였다. 한 변호사는 이후 국회의원 장영달 후원회장도 맡아 주었다.

2022년 4월20일 수요일 밤 9시20분쯤, 한 변호사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88세. 장 전 의원은 지옥 같은 구치소로 자신을 만나러왔던 한 변호사 장례의 호상(護喪·유족을 도와 장례를 주관하는 역할) 3인 중 한 명으로 조문객을 맞았다.

2022년 4월24일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예식실에서 진행된 한승헌 변호사의 추도식. 전현진 기자

2022년 4월24일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예식실에서 진행된 한승헌 변호사의 추도식. 전현진 기자

한승헌 변호사의 장례식에는 조화가 너무 많이 와 둘 곳이 없어 이름표만 따로 떼어 벽에 붙여 두었다. 전현진 기자

한승헌 변호사의 장례식에는 조화가 너무 많이 와 둘 곳이 없어 이름표만 따로 떼어 벽에 붙여 두었다. 전현진 기자

한 변호사의 장례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민주사회장으로 닷새 동안 치러졌다. 발인 전날인 24일 일요일 오후. 추도식이 열렸다. 예식실은 일찌감치 앉을 자리가 없었다. 예식실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빈소 식당에서 화면으로 추도식을 지켜봤다. 둘 자리가 없던 조화에서 떼낸 이름표가 빈소 벽면에 빼곡했다.

한 변호사는 1957년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에 합격했다. 군법무관을 마치고 검사가 됐다. 5년만인 1965년 사표를 냈다. “나라에 이바지할 만한 검사로서의 자질이 모자란다고 판단했다”고 말해왔다. 그 시절 검사가 나라에 이바지할 자질을 그는 무엇이라 생각했을까.

변호사로 개업해 바로 맡은 게 ‘분지 필화 사건’이었다. 단편소설 <분지>를 쓴 소설가 남정현이 반공법 위반으로 처음 기소된 사건이다. 그때 한 변호사에겐 ‘시국사건 1호 변호사’란 별칭이 붙었다. 이후 ‘인혁당재건위 사건’ 등 시국사건을 계속 맡게 됐다. 한 변호사는 평소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시국사건 변호를 계속 하게 됐다고 했다.

옥고도 치렀다. 1972년 ‘유럽 간첩단 사건’(이후 재심에서 무죄)으로 사형된 김규남 의원을 애도하는 <어떤 조사 - 어느 사형인의 죽음 앞에>라는 글을 발표했다. 김 의원의 죽음 두고 사법제도와 정치권력에 의문을 제기한 이 글 때문에 1975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돼 변호사 자격을 잃었다. 이후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에 연루돼-그는 자신이 “조연급으로 스카웃”됐다고 농담하곤 했다-또 한 번 징역을 살았다. 이후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창립을 함께 했고(한글 현판을 그가 썼다) 원로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17대 감사원장(1998~1999년)을 지냈다.

추도식에는 한 변호사가 변호한 사건의 피고인, 민주화를 위해 함께 투쟁한 동지, 시인이면서 저작권 전문가이자 남다른 서예 실력을 뽐낸 예술인으로서 교류했던 예술계 인사들도 왔다. 한 변호사의 수행비서, 직원 등으로 함께 일하던 이들이 그의 호 산민(山民)에서 이름을 따 만든 팬클럽 ‘산민회’ 회원들도 모였다. 산민회 회원들과 민변 변호사들이 유족을 도와 한 변호사의 장례를 주관했다.

많은 이들은 한 변호사의 유머를 기억했다. 한 변호사가 생전 쓴 책이 47권. 2004년부터 3권의 유머책(유머산책·유머기행·유머수첩)을 냈다. 7권짜리 <변론사건 실록>이나 각종 법학 서적 등 13권의 책을 출판한 범우사 윤형두 회장도 유머를 향한 그의 열정을 말리지 못했다.

“한국에서 유머란 것이 천박하거나 가볍게 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형님 이거(유머책) 안 낼랍니다. 변호사라면 지적이고 전문적인 학술·철학 책을 써야지요’라고 했더니, ‘잘 팔릴 것’이라고 설득하시더라구요.”

1970년 초 한승헌 변호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을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던 어느 출판기념회 자리. 오른쪽 첫 번째가 한승헌 변호사이고 그 옆이 윤형두 범우사 회장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0년 초 한승헌 변호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을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던 어느 출판기념회 자리. 오른쪽 첫 번째가 한승헌 변호사이고 그 옆이 윤형두 범우사 회장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 변호사보다 한 살 어린 윤 회장은 1969년 ‘<다리>지 필화 사건’으로 그와 인연을 맺었다. 엄혹한 시절부터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윤 회장에게 한 변호사는 ‘선천적 유머인’이었다. 유머집은 잘 팔렸다. 일본어로도 번역됐다.

김선수 대법관은 추모식에서 한 변호사의 유머를 이야기했다. 김 대법관은 2004년 한 대학 이사회에서 함께 활동할 때 한 변호사가 자신이 회의실로 들어오면 “선수 입장!” 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김 대법관은 한 변호사가 선물한 ‘도비고원’(道非高遠·도는 높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이라고 쓰인 목제붓통을 사무실 책상에 두고 “매일 한 변호사님을 뵙는 마음으로 생활한다”고 말했다.

차남인 한규무 광주대 교수가 추모객들에게 인사했다. 1975년 ‘사법살인’이라고 불린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당한 여정남씨의 조카가 빈소를 찾은 일이 장례기간 가장 마음에 깊이 남은 순간이었다. 한 교수는 “유족들은 물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도 위로가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진심’이라는 말에 진심이 다 담기지 못할 것이 걱정된다”며 “모든 분께 진심을 담아 감사드린다”고 했다.

■당구 ‘150’ 치는 평범한 할아버지

장석주 목사가 한승헌 변호사의 장례예식에서 설교하고 있다. 장 목사는 한 변호사가 아내와 함께 오랫동안 출석해 온 양광교회의 담임목사다. 전현진 기자

장석주 목사가 한승헌 변호사의 장례예식에서 설교하고 있다. 장 목사는 한 변호사가 아내와 함께 오랫동안 출석해 온 양광교회의 담임목사다. 전현진 기자

추도식 다음날인 25일,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빈소는 분주했다. 장례예식을 마치면 바로 발인을 해 빈소를 비우고 화장장으로 향해야 한다. 유족들이 짐을 미리 챙기던 그 시간에도 장례예식을 함께 하려는 이들이 하나둘씩 빈소로 모여들었다.

장례예식이 시작되자 빈소엔 앉을 자리가 없었다. 오전 6시20분, 집례는 한 변호사와 아내 김송자씨가 오랫동안 다닌 양광교회 장석주 담임목사가 맡았다.

장 목사가 한 변호사를 처음 만난 건 15년 전쯤이다. 한 변호사가 대형 법무법인(광장)의 고문 변호사였고,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를 맡았을 무렵이다. 법조계의 원로로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지녔을 때다. 장 목사는 “교회에선 늘 소탈하고 따듯한 권사님이셨다”고 말했다. 장 목사는 한 변호사를 ‘권사님’(감리교 직분)이라고 불렀다.

한 변호사는 ‘당구선교회’에 종종 함께했다. 토요일 오후 교인 20~30명이 인근 당구장을 빌려 교제하는 모임이었다.

“한 권사님이 당구를 150(점) 정도 치셨어요. 제가 시구를 하면, 권사님이 ‘아유 목사님 당구는 못 치시네요~’라고 농담하셨죠. 다들 즐거워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교인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같이 차를 마시다가 그의 장기인 유머 던지기를 즐겼다. 언제나 ‘빵 터지는 것은 아니었다’고 장 목사는 그 시간들을 즐겁게 추억했다.

장 목사의 눈에 가장 인상적인 건 한 변호사 부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 “두 분은 말씀하실 때 항상 서로 얼굴을 보세요. 제가 볼 때는 서로를 사랑스럽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김송자 권사님은 항상 새벽기도를 하시고, 한 권사님도 자신이 여러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헌신과 수고 덕분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동갑내기인 한 변호사와 아내 김송자씨는 전북 전주 출신으로 같은 대학에 다니다 1958년 결혼했다. 한 변호사가 변호사 자격을 박탈 당했을 때 출판사인 삼민사를 차렸는데 아내의 이름으로 운영했다. 탄압을 우려해서다. 여러 번 시련을 겪으면서 “이제 그만 조용히 살자”거나 “그만 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짧은 장례예식을 마치고 빈소를 비우기 전, 아내는 먼저 떠나는 남편의 영전 앞에 인사했다.

“잘가요…”

■손주들이 내 신앙…“자상하고 근엄한 아버지”

[…에필로그] "자랑스럽게 살지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 말자"…'시국사건 1호' 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의 관이 운구차에 실렸다. 화장장으로 가기 전 유족들이 장석주 목사와 함께 기도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한승헌 변호사의 관이 운구차에 실렸다. 화장장으로 가기 전 유족들이 장석주 목사와 함께 기도하고 있다. 전현진 기자

발인은 오전 6시40분쯤 시작됐다. 산민회와 민변 관계자 여섯 명이 운구위원으로 나섰다. 관은 꽤나 무거워보였다. 한 변호사는 평소 55㎏쯤 하던 자신의 깡마른 얼굴과 몸매를 두고 “풍채와 위엄이 빈약하다”고 했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 마지막으로 탄 한 변호사가 과하중 부저가 울리자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나도 무게 있는 남자로구나…”하고 중얼거렸다는 유머가 생각났다. 그가 짊어진 현대사의 무게, 그가 현대사에서 차지한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의 무게 역시 만만치 않았다.

유족과 장례위원들이 두 대의 대형버스에 나눠 탔다. 새벽에 내린 비는 어느새 그쳤다. 버스로 30분쯤 걸려 서울추모공원에 도착했다. 접수를 하고 순서를 기다리며 바삐 오가던 형제들이 지나치다 서로 등을 두드려주었다. 20분쯤 기다린 뒤 한 변호사의 순서가 왔다.

운구위원들이 관을 꺼내 카트 위에 올렸다. “정중하게 모시겠습니다.” 앞장 선 화장터 관계자는 유족에 인사하고는 1번 화로로 향했다.

“마지막 인사하세요.” 화로 입구 앞에서 일행이 잠시 멈춰섰다. 5일 동안 장례를 치르면서 많이 울었지만, 유족들은 아직 흘릴 눈물이 더 남아 있었다. 울음 소리를 뒤로 하고 한 변호사가 화로 안으로 들어섰다. 출입구가 닫혔다. 유족들은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울었다. “아우….” 한 사람은 무릎을 붙잡고 가까스로 서있었다.

유족들은 가족대기실로 이동했다. 대기실 모니터 화면엔 ‘화장중’이라는 글이 쓰였다. 화장은 1시간20분쯤 걸린다. 화장예식을 마친 뒤 잠시 짬을 내 유족과 장례위원, 조문객들이 식당에서 뜨거운 국물로 아침을 먹었다. 얼마 뒤 ‘냉각중’으로 표시가 바뀌었다. 유족과 장례위원들이 수골실에 모였다. 유골은 이내 분골기 안에 넣어졌고, 십여초만에 하얀 가루가 됐다. 한지에 쌓여 유골함에 담기는 동안, 영정을 들고 있던 손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까스로 울음을 참아내는 중이었다. “아이고….” 한숨 소리가 울음과 섞여 수골실에 울렸다.

화장을 마친 유족과 장례위원들이 노제가 열리는 전북대로 가기 위해 버스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가고 있다. 영정과 위패, 유골함을 든 유족들이 먼저 도착해 일행들을 기다렸다. 전현진 기자

화장을 마친 유족과 장례위원들이 노제가 열리는 전북대로 가기 위해 버스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가고 있다. 영정과 위패, 유골함을 든 유족들이 먼저 도착해 일행들을 기다렸다. 전현진 기자

화장을 마치고 노제가 치러지는 전북 전주의 전북대로 향했다. 고속도로는 날이 흐려 해가 들지 않았다. 유족들이 탄 버스 안은 조용했다. 수일 동안 이어진 장례 일정으로 다들 피곤했는지 금새 잠들었다. 손자들은 영정과 위패를 나눠 안았다. 2~3시간쯤 가다 점심 식사를 하려 여산휴게소에 들렀다. “할아버지 혼자 버스에 두고 갈 수 없어요.” 손자들은 버스에 내리지 않고 다른 가족들이 식사를 하고 올 때까지 기다렸다. 한 변호사는 생전에 손주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손주들이 내 신앙이다”라고 할 만큼 사랑이 많은 할아버지였다.

한 변호사는 가족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고 한다.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1975년, 한 변호사는 함께 구치소에 갇힌 이의 가족을 통해 ‘일요일 오후 구치소 뒷산에 올라가 기다리면 운동하러 나와 먼발치에서나마 가족들과 서로 손이라도 흔들어 보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아내 김송자씨는 자녀들을 데리고 서울구치소 뒷편인 지금의 안산 자락 언덕으로 올라갔다. 멀리서 손 흔드는 한 변호사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자녀들과 함께 크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차남 한규무 교수도 어린시절 아버지가 포승줄에 묶여 재판을 받는 모습을 기억한다. 아버지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여러 사람들의 위로와 도움을 받으면서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분명히 알아갔다고 했다.

강직한 태도로 시국사건을 맡았던 한 변호사는 가족에게 자상한 아버지였다. 한 변호사의 자녀 중에는 법조인이 없다. “아버지가 내심 아쉬우셨을지 모르겠지만, 늘 저희들의 생각을 존중해주셨습니다.” 한 교수는 말했다.

“아버지를 ‘깐깐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집에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자녀들이 다른 사람에게 예절을 갖추지 않았을 때는 아주 엄하셨어요. 평소에는 함께 식사하고 편하게 이야기하고, 너무 뻔한 표현 같지만 자상하고 근엄한 아버지셨습니다.”

한 변호사는 4월15일 오전 전주의 우석대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뒤 며칠 동안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광주에 사는 한 교수가 먼저 병원에서 아버지를 봤다. 한 교수는 결혼하기 전처럼 아버지의 귀에 대고 ‘아빠’라고 부르며 응원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른 가족들을 모두 불렀다. 임종이 다가왔음 알았을 때 아내 김송자씨는 장석주 목사에게 전화로 임종기도를 부탁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가족들이 한 변호사 곁을 지켰다. 한 변호사는 아내와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었다.

■인생의 롤모델

화장을 마친 뒤 한승헌 변호사의 모교인 전북대에서 한승헌 변호사의 노제가 치러졌다. 전북 전주시 진안에서 태어난 한 변호사는 고향을 사랑했고 늘 환영 받았다. 전현진 기자.

화장을 마친 뒤 한승헌 변호사의 모교인 전북대에서 한승헌 변호사의 노제가 치러졌다. 전북 전주시 진안에서 태어난 한 변호사는 고향을 사랑했고 늘 환영 받았다. 전현진 기자.

오후 1시20분쯤 도착한 전북대 곳곳에는 현수막이 가득 걸렸다. 학교 선배이자 스승이었던 한 변호사를 추모하며 준비한 것이다. 유족과 장례위원들은 한 변호사가 애정을 쏟았던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를 잠시 둘러본 뒤 노제가 치러지는 광장으로 향했다.

노제에는 김승수 전주시장을 비롯해 지역 인사들이 여럿 참석했다. 한 변호사는 고향을 사랑했고, 늘 환영받았다. 후배들에겐 롤모델로 꼽혔다.

김희수 변호사(경기도 감사관)도 고교·대학 선배인 한 변호사를 깊이 따랐다.

김 변호사는 대학 4학년 때 한 변호사가 쓴 <법과 인간의 항변> <법창에 부는 바람> 등을 읽으며 ‘이런 법조인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진로를 고민하다 고시 공부를 결심한 계기였다.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법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큰 울림을 줬어요.”

한 변호사를 처음 만난 건 1989년 사법연수원생 시절이다. 김 변호사는 연수원 수료를 앞두고 검사를 지망했다. 그땐 그래도 검사는 적극적으로 사회악을 제거하는 데 앞장설 수 있다 생각했다. 한 변호사는 후배에게 검사 생활을 한 자신의 경험을 짧게 이야기해줬다고 한다.

한 변호사가 검사로 일하던 때는 5·16 군사정변 직후였다. 어느 날 출근했더니 선배 검사가 수사기록을 난로에 찢어서 태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뭐하는 거냐’고 물으니 ‘위의 지시’라는 답이 돌아왔다. 군인들 지시로 기록을 태우는 선배 검사를 보며 한 변호사는 ‘검사의 자질’을 생각했을까. 한 변호사가 검사를 그만둔 이유였을 것이라고 김 변호사는 생각했다. 김 변호사도 5년 일하다 검사를 그만뒀다.

자신의 길을 따르던 후배를 한 변호사는 유심히 지켜본 듯 하다.

“나도 살만큼 산 것 같고 하나님이 부를 날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한 변호사는 어느 날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사건이 재심이 될 수 있는지 봐달고 했다.

김 변호사는 자료를 찾아 검토한 뒤 재심을 해 무죄를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한 변호사는 “주변에 알리지 말고 혼자서 사건을 맡아달라”고 조용히 부탁했다. 재심은 2016년 9월 시작됐고, 2017년 6월 무죄가 선고됐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어요! 저 다시 안 보실 겁니까?”

재심을 마친 뒤, 김 변호사가 한 변호사에게 ‘성질’을 낸 적이 있다. 한 변호사가 김 변호사에게 수임료를 주겠다고 해서다. 한 변호사는 화를 내는 김 변호사를 보며 머쓱해 하고는 작전을 바꿨다.

한 달쯤 지났을 때다.

“야. 너랑나랑 둘이 같이 양복 좀 맞춰 입을까?” 같이 밥을 먹으며 한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그건 좋습니다.” 김 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세지고는 못 사는 한 변호사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서초구의 한 양복점에서 한 변호사와 김 변호사는 양복을 맞췄다. 김 변호사는 그때 맞춘 밤색 양복을 좋아했다. “선배님을 따르는 분들이 많지만, 그래도 양복을 같이 맞춰 입은 건 저 뿐일 걸요?” 다른 사람들이 알면 부러워 할까 내색하지 않던 자랑거리다.

김 변호사는 “인생의 롤모델”인 한 변호사의 장례 때문에 주말을 껴서 휴가를 냈다. 장례 첫 이틀은 한 변호사와 함께 맞춘 밤색 정장을 입었다. 그는 빈소를 내내 지키고, 운구위원을 맡았다. 장지인 광주까지 동행하고 돌아오는 버스에선 말이 없었다. “먼 길 떠나시는데 마지막까지 배웅해드리는 게 저로서는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장례 며칠 뒤 한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유쾌하게 웃다가 조금 울먹였다.

■조심스럽게 허토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노제를 마친 유족과 장례위원들이 전남 광주의 국립5·18민주묘지에 도착했다. 전현진 기자

노제를 마친 유족과 장례위원들이 전남 광주의 국립5·18민주묘지에 도착했다. 전현진 기자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50분쯤이었다. 날이 여전히 흐렸다. 언제라도 비가 다시 내릴 듯 먹구름이 오갔다. 유족들은 버스에서 내려 영정과 위패, 그리고 유골함을 들고 앞장섰다. 그 뒤로 안장을 지켜보러 온 이들이 줄지어 따랐다.

한 변호사의 자리는 2묘역 묘역번호 1-148. 현수막이 미리 준비돼 있었다. 그 아래 두세뼘 깊이의 구덩이가 파여있었고, 유골함을 봉안할 작은 석관이 만들어졌다.

짧은 예식을 마치고 석관 뚜껑 위에 흙을 떠 덮는 ‘허토’가 이어졌다. 아내 김송자씨가 부축을 받아 힘겹게 흙을 뿌렸다. 유족들이 뒤를 이었다. 유족들은 차례로 삽을 받아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흙을 뿌렸다.

유족들의 허토가 끝나자 인부는 능숙하게 남은 구덩이를 흙으로 채워넣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하얀 나무 틀로 묘비가 들어설 자리를 미리 잡았다. 흙으로 메운 구덩이를 단단히 발로 밟아 다졌다. 미리 떼어 온 잔디를 나무 망치로 툭툭 쳐 재빨리 작은 봉분을 만들었다. ‘고 한승헌 5·18 유공자의 묘’라고 적힌 나무 묘비가 임시로 세워졌다.

한승헌 변호사의 묘비에 아내 김송자씨가 마지막 헌화를 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한 변호사의 묘에는 정식으로 묘비가 제작되기 전까지 임시로 나무 묘비를 세워뒀다.

한승헌 변호사의 묘비에 아내 김송자씨가 마지막 헌화를 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한 변호사의 묘에는 정식으로 묘비가 제작되기 전까지 임시로 나무 묘비를 세워뒀다.

5일 동안 이어진 장례가 모두 끝났다. 온 종일 장례를 치른 이들이 아쉬운 듯 묘지를 떠나지 못했다. 광주까지 온 산민회 회원들은 한 변호사의 영정 앞에 모여 기념 촬영을 했다. 영정 사진을 쓰다듬고 묘비를 붙잡고 잠시 눈을 감았다. 잠시 웃다가도 이내 먹먹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을 보며 안부를 물었다.

“어. 예춘호 의원이네.”

아내 김송자씨가 예 전 의원의 묘를 발견했다. 한 변호사의 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김씨는 먼지가 얇게 덟힌 묘비를 손으로 쓸어 닦았다. 예 전 의원은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한 변호사와 함께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민주묘지 곳곳엔 한 변호사와 생전에 인연을 함께 한 이들이 묻혀 있다. 한 변호사는 생전에도 참배를 위해 이곳을 종종 찾았다.

한 변호사와 함께 매년 민주묘지를 방문했던 민주화 원로 이해동 목사는 거동이 불편해 안장식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이 목사와 한 변호사도 ‘…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함께 구속된 뒤 40년 넘게 절친으로 지냈다.

이 목사는 자택 벽 한 켠에 한 변호사가 연초마다 직접 써서 보내준 연하장들을 최근 것만 모아 붙여놓았다. 한 두 해 이어진 게 아니다. 한 변호사는 1984년 이 목사가 독일로 떠날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는 성경 말씀을 한문으로 직접 써 선물했다.

한승헌 변호사의 ‘절친’인 민주화 원로 이해동 목사(오른쪽)와 그의 아내 이종옥씨가 1984년 독일로 떠날 무렵 한승헌 변호사가 선물해 준 족자를 펼쳐보이고 있다. 이 목사 부부는 한 변호사와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즐거워 했고, “아직도 눈물이 난다”며 안타까워 했다. 전현진 기자

한승헌 변호사의 ‘절친’인 민주화 원로 이해동 목사(오른쪽)와 그의 아내 이종옥씨가 1984년 독일로 떠날 무렵 한승헌 변호사가 선물해 준 족자를 펼쳐보이고 있다. 이 목사 부부는 한 변호사와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즐거워 했고, “아직도 눈물이 난다”며 안타까워 했다. 전현진 기자

한 변호사와 이 목사는 1934년 태어난 동갑내기다. 한 변호사는 재판을 치르면서 이 목사와 생일이 일주일 밖에 차이가 안 난다는 걸 알았다. 그가 “내가 일주일 먼저 나온 형”이라고 했더니, 이 목사는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그렇지 실제 생일은 내가 먼저”라고 받아쳤다. .

“조상님께 과태료 물리지 마십시요.” 한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 뒤 한 마디를 더했다 “법정에서 공소장 적힌 사실 모두 끝까지 부인하시면서 생년월일만은 맞다고 ‘예’하지 않았습니까?”

이 목사는 한 변호사 이야기를 할 때 아주 신나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 시간 서로 존중하고 얼굴 한 번 붉히지 않았다. 이들은 1981년 5월11일 부처님오신날에 석방됐다. 그래서 매년 이날 부부가 모여 식사를 했다. 운전을 못 하는 한 변호사 부부가 이 목사 부부가 사는 일산 대화동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면, 이 목사가 운전해 맛 좋은 식당에 간다. “역시 (교도소에서 먹는) 관식보다 사식이 더 맛있네!” 매년 하는 한 변호사의 농담은 질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우정은 노년에 더 진해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전화하며 안부를 물었다. 주변에선 “연인같다”고 했다. “뭐 좋은 일 없어요?”라고 묻는게 전화의 이유다. 아무 일이 없어도 전화를 한다. 한 변호사는 이 목사에게 “그냥 목사님한테 은혜 받으려고 전화했죠”하고 농담했다. 한 변호사의 건강이 악화된 뒤에도 아내를 통해 전화하며 안부를 물었다.

한 변호사의 장례를 마친 다음 날 오후, 이 목사의 전화벨이 울렸다. 거동이 불편한 이 목사가 제 때 받지 못했다. 뒤늦게 확인한 부재중 기록에는 한 변호사의 번호가 남아있었다. 장례를 치른 절친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 전화를 걸었다. 한 변호사의 아내 김송자씨가 전화를 받았다. “왠지 이 전화로 걸어보고 싶어서요.” 휴대전화에 뜬 이름이 반갑고 서글펐다.

“그 유쾌한 재담을 다시 들을 수 없어 마음이 아프죠.” 이 목사의 아내 이종옥씨는 입관예배 때 한 변호사에게 ‘5.18묘역에서 만나요. 우리도 곧 갈게요’ 하고 인사했다. 이 목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변호사님과 친하게 지내 보람있는 인생이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생각이 날 거에요.”

한승헌 변호사의 장례를 마친 뒤 제작된 정식 묘비. 뒷면에 한 변호사가 신념처럼 삼던 말을 따르겠다는 후손들의 다짐을 새겼다. 유족 제공

한승헌 변호사의 장례를 마친 뒤 제작된 정식 묘비. 뒷면에 한 변호사가 신념처럼 삼던 말을 따르겠다는 후손들의 다짐을 새겼다. 유족 제공

장례는 마쳤지만, 한 변호사를 기억하는 이들은 여전히 아쉬워했다.

장례를 모두 마치고 제작된 한 변호사의 묘비에는 “고인의 신념을 따라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는 않겠습니다”라고 새겼다. 묘비명을 고민하던 유족들은 결국 한 변호사가 평소 가훈 삼아 좌우명처럼 이야기하던 말(“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을 택했다.

차남 한규무 교수는 “무겁고 무서운 말”이라고 했다. 명예롭게 산 아버지의 삶이 후손들에겐 멍에가 될 수도 있다. “아버님은 그렇게 사셨는데 저희 후손들은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묘비에 새긴 말은 유족들의 다짐이기도 하다. 한 변호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도 멍에이자, 다짐이 된다.


▶약력
한승헌 변호사는 1934년 9월29일 전북 진안군 안천면에서 태어나 전주고·전북대를 졸업하고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검사로 근무했다. 1965년 퇴직한 뒤 변호사로 개업해 ‘시국사건 1호’로 불린 단편소설 <분지> 필화 사건을 변호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시국사건을 변호했다. 그 자신도 필화 사건에 휘말려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돼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김대중 내란음모조작 사건’에 연루돼 또 한 번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 저작권법을 공부해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저작권법 강연을 하기도 했다. 중앙대, 전북대, 경원대 등에서 가르쳤고, 17대 감사원장, 법무법인 광장 고문변호사, 한국외대 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2005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세대 인권변호사로 꼽히는 그는 201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으로 서훈됐다.

[…에필로그] "자랑스럽게 살지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 말자"…'시국사건 1호' 한승헌 변호사

[…에필로그]는 평범하고 특별했던 삶을 마무리한 인물을 조명하는 내러티브 채널 ‘코끼리’의 부고(obituary) 시리즈입니다. 이번 편은 한승헌 변호사의 장례 일정을 동행 취재한 뒤 그를 기억하는 이들과 따로 인터뷰해 작성했습니다. 한 변호사가 쓴 책과 그가 생전에 한 다양한 인터뷰, 그에 대한 언론보도 등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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