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노동 만연한데···주 52시간제 유연화는 “과로사회 회귀”

유선희 기자
노동시간 관리 단위를 ‘주’가 아닌 ‘월’로 바꾸면 일주일에 80시간 이상 일하는 사례가 나타날 수 있어 노동계는 “과로사회로의 회귀”라고 비판한다.김상민 기자

노동시간 관리 단위를 ‘주’가 아닌 ‘월’로 바꾸면 일주일에 80시간 이상 일하는 사례가 나타날 수 있어 노동계는 “과로사회로의 회귀”라고 비판한다.김상민 기자

“IT 업계에서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과로사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노동자들을 ‘갈아 넣는’게 아니라 주어진 시간동안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해주세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는 경쟁력은 충분한 휴식과 안정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건강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오세윤 민주노총 화섬노조 IT위원회 위원장이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열린 ‘윤석열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대응’ 토론회에 참석해 이같이 증언했다. 함께 참석한 이상민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남양연구소위원회 정책부장은 “사업 개발단계에 따라 특정시기에 업무가 편중돼 노동강도가 집중되는 때가 있다. 이 경우 주 52시간을 훌쩍 넘는데도 관리자 눈치를 보고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다”며 “노동시간 유연화는 노동강도 해소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주 52시간제 유연화, 노동계 “과로사회로 회귀”

윤석열 정부는 ‘주 52시간제’를 손보겠다고 밝혔다. 노동시간 관리 단위를 ‘주 단위’가 아닌 ‘월 단위’로 바꾸겠다는 것으로, 이 셈법대로 하면 일주일에 80시간 이상 일하는 사례가 나타날 수 있어 노동계는 “과로사회로의 회귀”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날 국회 토론회에서는 노동시간 유연화로 인한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다수 나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의 전다운 변호사가 제공한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의 공동연구 보고서(2021년 5월)에 따르면, 주 55시간 이상 근무로 2016년 한 해 동안 39만8000명이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34만7000명이 허혈성 심잘질환으로 숨졌다. 35~40시간 근로자와 비교해 17~35% 정도 많은 수치다. ILO는 장시간 노동이 정신·신체·사회적으로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고려해 각국 정부가 근로시간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자료를 보면 하루 8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 8시간 근무한 노동자보다 각종 사고 위험이 50% 정도 높고, 10시간 이상 노동이 주2회 계속되면 우울 또는 불안장애도 높아진다.

정부는 11시간 연속휴식시간 제도와 근로시간저축계좌제 등을 내세웠다. 과로사 예방을 위해 근무일 사이에 최소 11시간 휴게시간을 도입하고, 연장·야간·휴일노동 등은 노동시간을 ‘적립’해 두었다가 원칙적으로 휴일 또는 휴가 등으로 보상하자는 취지다.

‘11시간 연속휴식’ 등 과로사 예방 가능할까

지난해 8월10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참여연대, 알바노조,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민변 등 노동시민사회단체가 포괄임금제 규제 지침 발표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즉각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김기남기자

지난해 8월10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참여연대, 알바노조,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민변 등 노동시민사회단체가 포괄임금제 규제 지침 발표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즉각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김기남기자

노동계는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하루기준 노동시간 상한이 없는 현실에서 11시간 연속휴식시간 제도는 큰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연합(EU) 지침은 하루 24시간당 최저 11시간의 연속적 휴식시간제를 운영해 사실상 1일 노동시간 상한은 13시간으로 정해놓고 있다. 일주일 기준으로는 평균 노동시간이 48시간을 초과하지 않도록 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1일 노동시간 상한이 없어, 심야에 일을 마치고도 교통수단 등 문제로 퇴근하지 못하고 연속 근무를 하는 경우가 있다”며 “또 연속휴식시간제도는 그에 따르는 인력 증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노동시간 강도는 감소하지 않아 건강권 침해는 계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대다수 노동자들이 연차도 소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근로시간저축계좌제가 제대로 도입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5인 이상 사업체 5000곳 평균 연차소진율은 63.3%로 2019년(75.3%)보다 줄었다. 연차 미소진 이유에 대해 “업무량 과다 또는 대체인력 부족” 이라는 응답이 54.8%로 가장 높았고, “미활용 연차휴가에 대한 금전적 보상”(24.9%)이 그 뒤를 이었다. 정흥준 서울과기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이 악용할 우려가 높고 정작 노동자는 실소득이 감소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토론에 참석한 노동·시민단체자들은 정부의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 재고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포괄임금제가 폐지가 시급하다고 했다. 초과 노동시간을 따지지 않고 임금을 일괄로 계산해 지급하는 포괄임금제는 그대로 두면서 노동시간 유연화만 내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오세윤 위원장은 “포괄임금제는 장시간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로 우선 폐지돼야 한다”고 했다. 오찬호 직장갑질119 집행위원장은 “노동시간 산정이 어려운 경우도 아닌데도 포괄임금제가 일터에서 광범위하게 악용되고 있다”며 “사용자들은 오른손에 포괄임금제라는 칼을 들고 있는데, 이제는 왼손에 ‘주 92시간’이라는 도끼를 주려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불법과 편법인 포괄임금제를 규제하고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황용연 경총 노동정책본부장은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노동생산성이 낮다. 경영계는 근로시간 총량을 늘리자는게 아니다. 52시간제 내에서 유연하게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고 개인과 기업이 함께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제안이다”고 말했다. 박종필 노동부 근로감독정책단장은 “근로시간 단축 기조를 유지하는게 정부 정책방향”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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