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 224건

EP.01 재일동포 이동석, 그리고 사법부의 시간

전현진 기자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

EP.01 재일동포 이동석, 그리고 사법부의 시간

EP.02 47년 만에 무죄…달라진 건 많지 않다

EP.03 1972년의 고문 당한 진술 믿을 수 있다는 2022년의 법원

[국가폭력 224건] EP.01 재일동포 이동석, 그리고 사법부의 시간

이동석씨(70)는 긴장된 표정으로 법정에 들어섰다. 가방을 조심스럽게 방청석 바닥에 내려놓았다. 원전 반대와 세월호 추모를 상징하는 ‘핀 배지’가 달린 가방이다. 자리에 앉은 그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하얀 표지의 스프링노트는 꼭 챙겨 온다. 누가 방청을 왔고, 재판부는 어떻게 구성됐는지 꼼꼼히 적어뒀다.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게 조금 서툴지만 중요한 내용은 꼭 메모했다. 막히면 일본어로 적었다.

그가 지켜보는 건 고문과 조작으로 유죄가 선고됐던 사건의 재심 재판이다. 지난 6월23일 오후 서울고법 303호 법정에서도 그랬다.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지인 재일동포 조신치씨의 재심 선고 기일이다. 재심 사건이 많을 때는 한 달에 한 두번 법원에 온다. 한국에 머문지 5년이 넘었다. 그동안 모든 재판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에겐 중요한, 여생의 사명이다.

[국가폭력 224건] EP.01 재일동포 이동석, 그리고 사법부의 시간


이동석씨가 재심 재판에 항상 챙겨가는 노트를 살펴보고 있다. 전현진 기자

이동석씨가 재심 재판에 항상 챙겨가는 노트를 살펴보고 있다. 전현진 기자

“박정희 영도 아래”…사법권보다 국가관 강조한 사법부

2013년 10월25일, 이동석씨는 바로 옆에 있는 302호 법정 피고인석에 선 적이 있다. 그의 재심 재판이 시작된 날이었다.

1975년 ‘학원침투 북괴간첩단’이라는 이름으로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나 육군보안사령부(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붙잡혀갔다. 저마다 체포 이유가 조금씩 달랐지만 ‘일본에 있는 북한 공작원에 포섭돼 그 지령을 받은 뒤 유학생으로 가장해 국내로 들어와 간첩활동을 했다’는 큰 골격은 같았다. 간첩 행위를 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었지만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제출한 북한 공작원 신원 확인 영사증명서와 혹독한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이 법원에 제출됐다.

이동석씨를 잡아간 건 보안사였다. 1975년 11월22일 수사관들이 이동석씨가 사는 서울의 하숙집에 들이닥쳤다. 한 달 넘게 불법감금 된 채 구타, 물구나무세우기, 볼펜으로 손가락 비틀기 등의 고문을 받았다. 1976년 12월 대법원은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를 인정해 이씨에게 징역 5년형을 확정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꿈에도 몰랐다. 처음 한국에 유학 온 게 1971년이었다. 오사카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조선문화연구회를 만들기도 했다. 자신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일본 이름은 쓰지 않고 우리 이름을 사용하겠다고 결심했다.

정체성 혼란을 극복해가면서 한글 이름을 되찾은 이동석씨는 모국 유학생 제도를 통해 한국에 왔다. 1973년 한국외대 불어과에 입학했다. 연극회 활동에 푹 빠져 공부는 미뤄두고 놀기 바빴다. 늘 마음 속으로 그리던 모국 땅에서 우리말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나날들이 행복하기만 했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도 아래 유신헌법이 규정한 3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1973년 3월 취임한 민복기 대법원장의 취임사 중 한 구절이다. 당시 법원의 태도와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1973년 4월 법원장회의에서는 “박 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아무리 사법권의 사명이 중하다 하더라도 법관은 누구나 뚜렷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재판에 넘겨진 이들의 호소는 유죄 심증으로 가득한 법관에 닿지 않았다.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강조하는 검사들도 진실을 외면하고 공정한 판단을 해야하는 판사도 법률에 따른 절차와 논리를 형식적으로만 따랐다.

이동석씨는 이 속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보다 먼저 간첩이라며 체포돼 재판을 받은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있었지만, 자신에게도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다. 영장도 없이 체포됐고 구금 뒤 재판에 넘겨졌다. 검사도 판사도 그런 사실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법정에서 최후진술 기회를 얻었을 때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입을 열려는 순간 법대에 앉은 판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이동석씨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가만히 서류를 넘겨보고 있었다. 희망이 무너졌다.

이동석씨는 5년형을 거의 꽉 채워 198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를 했다.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엽서였다.

“잘 계십니까. 이곳에는 꽃이 피었습니다.”

몇 줄 안 되는 안부 글이 큰 힘이 되었다. 면회 때 본 홀쭉해진 그의 모습을 한쪽에 작게 그려넣은 엽서도 있었다. 이동석씨의 구속 소식을 들은 고교 선생님과 친구들이 일본에서 ‘구원회(救援会)’를 만들었다. 일본인들과 동포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한 구원회는 한국의 교도소에 갇힌 재일동포들을 위해 매일 같이 엽서를 보냈다. 출소한 뒤에야 더 많은 엽서가 보내졌다는 걸 알았다. 교도소에서 모든 엽서를 다 전달해준 게 아니었다.

그가 수감된 동안에도 같은 처지의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계속 생겨났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학교를 다녔던 이들도 많이 붙잡혔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겠다며 조국에 온 이들은 조국으로부터 버림 받고 간첩으로 몰려 교도소에 갇혔다.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북한에 납치된 뒤 돌아왔다 간첩으로 몰린 어부들도 있었다. 법원에서 억울함을 호소해보려 했던 이들은 좌절하고 미리 포기해버렸다.

1977년 8월 이동석씨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받은 엽서 중 하나다. 엽서를 보낸 지인이 안부를 묻는 인사 말미에 ‘면회할 때의 동석씨의 얼굴’이라며 그의 얼굴을 그려놓았다.

1977년 8월 이동석씨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받은 엽서 중 하나다. 엽서를 보낸 지인이 안부를 묻는 인사 말미에 ‘면회할 때의 동석씨의 얼굴’이라며 그의 얼굴을 그려놓았다.

사라질 줄 알았던 간첩 조작 사건, 1980년대에도 변함없던 사법부

이동석씨는 1980년 출소해 일본으로 돌아왔다. 직후인 1981년 재일동포 손유형씨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제품을 수출하는 회사를 운영했던 손유형씨는 북한 공작원에 포섭돼 간첩활동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영장없이 불법 체포돼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한 뒤 1998년 가석방 될 때까지 옥고를 치러야 했다.

손씨가 막 체포됐을 때 오사카 지역 일본인과 동포들이 구원회를 결성하자 이동석씨도 함께 서명운동에 나섰다.

이동석씨는 자신이 겪은 것 같은 사건이 또 다시 생길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다고 했다. 1970년대에는 ‘박정희 독재’라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었다. 1980년대에는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 독재’가 다시 시작됐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더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1980년대에 계속 벌어졌다. 이때도 1970년대처럼 법원의 역할이 컸다.

“우리(법관들)는 국방의식, 국가안보의식을 고취하여야 하겠습니다.” 1981년 4월15일 취임한 유태흥 대법원장은 힘주어 말했다.

“국방은 행정부나 입법부의 소관이니 우리 사법부는 오불관언(나는 상관하지 않는다)이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우리나라는 여유가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 실정법의 세계에 있어서는, 법도 국가 이전의 것이 아니고, 국가가 있은 연후의 것입니다. 따라서 법을 해석 적용함에 있어서도 항상 국가의 존망을 의식하면서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 중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 유태흥 대법원장, 1981년 취임식에서.

유 대법원장의 말은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재판에 선 이들에 대해 법의 원칙과 논리가 아닌 국가의 존망을 의식해서 판단하라는 주문이었다. 신군부에서는 대법원과 각급 법원을 상대로 특별 정신교육을 실시했다.

그때 붙잡혔던 사람 중에 조신치씨도 있었다. 1956년에 태어난 조신치씨는 일본 효고현 야마가사키에서 나고 자랐다. 야마가사키공업고 전기과에 다닐 때 우리 이름을 쓰겠다는 본명선언을 했고, 우리 역사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조선문화연구회에서 활동했다. 고교 졸업후 잠시 대학을 다니다 작은 금속회사에 다녔다. 대만으로 가서 중국어 공부를 하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 유학을 온 건 1983년 3월이었다. 연세대 부설 어학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듬해 9월 일본에 잠시 갔다 돌아오던 중 김포공항에서 연행돼 간첩이 됐다. 어학공부를 위해 대만과 한국을 다녀왔던 일은 포섭대상자를 찾기 위한 것으로 둔갑했다. 한국에서 보낸 어학연수 생활은 학생 데모 상황과 전방 경계 태세를 파악·보고하기 위한 간첩 활동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조신치씨를 체포했다는 1984년 10월13일자 경향신문 보도 내용. 왼쪽 네번째 사진이 조신치씨다. 구속됐다고 발표된 6명 중 조신치씨를 포함한 5명은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것으로 파악됐다. 1명은 재심을 받았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조신치씨를 체포했다는 1984년 10월13일자 경향신문 보도 내용. 왼쪽 네번째 사진이 조신치씨다. 구속됐다고 발표된 6명 중 조신치씨를 포함한 5명은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것으로 파악됐다. 1명은 재심을 받았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조신치씨는 1985년 1월 열린 1차 공판기일에서 본인에 대한 혐의를 부인하고 물고문 등을 당했다고 말했다. 평소 지니고 있던 사진기가 시위상황을 수집하기 위한 공작 도구로 제시되자, 사진을 좋아해서 갖고 있던 것일 뿐이라며 다시 고문을 당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1심에선 징역 7년이 선고됐고, 2심에서 유지됐다.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 파기환송이 선고됐고, 이후 파기환송심에서 반공법 위반 혐의만 인정돼 2년 형이 선고됐다. 선고가 이뤄질 때 ‘관계자 외에는 퇴정하라’는 재판장의 지휘로 방청석은 비어있었다. 1986년 10월이 되어서야 징역 2년형이 확정됐다. 재판을 치르면서 이미 모든 형기가 지난 뒤였다. 한국에 아는 이가 많지 않았던 그는 교도소에서 홀로 나와 그해 11월 일본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조신치씨는 몸이 좋지 않았다. 수감되기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아 약을 항상 챙겨먹어야 했다. 감옥에 갇힌 뒤로는 일본에서 보내준 약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일본에 돌아와서 건강검진을 받았고 심장에 이상이 발견됐다. 몸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울분이 쌓였다.

그는 이런 마음을 일본 각지에서 활동 중인 구원회에 참가하며 가족들을 격려해주는 방식으로 풀었다. “먼저 돌아온 자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가 발족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90년 12월 준비모임에도 함께 한 터였다.

적극적인 활동이 기대됐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은 1991년 3월 저녁식사 후 자택 인근의 목욕탕에 갔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노천탕에 빠져 숨졌다.

이동석씨는 조신치씨가 갑작스렇게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사카 인근의 작은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조신치씨가 일본에 돌아온 뒤 여러 번 만나며 가까워졌을 때다. 서로를 알아가고 위로를 주고 받는 사이였다. 이동석씨는 퇴근을 한 뒤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우선 집으로 향했다. 이동석씨는 평소에도 심한 꽃가루 알레르기를 앓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그의 얼굴은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됐다.

“친구가 죽어서 그런 것인지, 꽃가루 때문인지….”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이동석씨는 먹먹한 표정을 짓는다.

조신치씨.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 제공

조신치씨.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 제공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한 피해자, 무시하고 잊어버린 사법부

1990년대 들어 재일동포 간첩 조작 사건으로 투옥됐던 이들이 풀려나기 시작했고 구원회 활동도 하나 둘 끝을 맺었다. 다들 저마다의 삶을 일구며 악몽 같은 지난 시간을 이겨내려고 했다. 누군가는 몸과 마음이 다쳐 세상을 등졌고, 누군가는 이를 악물며 기억을 이겨내려 애썼다.

이동석씨는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심히 공부해도 마땅한 직업을 구하기 힘들었던 재일동포들의 삶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노동운동 조합에 참여하면서 세상이 여러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게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재심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 한참 지난 뒤였다. 재일동포 간첩 사건에 연루됐던 이종수씨가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진실화해위원회라는 기관이 출범했다는 걸 아는 재일동포들은 많지 않았다.

하루는 벚꽃놀이를 위해 오사카 이쿠노쿠(生野區)의 한 공원에 재일한국인양심수동우회 회원들이 모였다. 회원 10여명과 구원회 활동을 함께 한 일본인 20여명도 있었다. 벚꽃 아래 둘러 앉아 맥주도 한 잔씩 나누며 불고기도 구워먹었다. 이동석씨는 그날 이종수씨가 진실화해위원회에 대해 이야기하며 재심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한 것으로 기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재심에 대해 관심을 보였던 이들은 많지 않았다. 일단 한국의 정부 기관을 믿기 어려웠다. 재심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재심으로 무죄를 받게 되더라도 무엇이 달라지겠냐며 체념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다시 상처 받을까 두려움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진실화해위원회라는 게 생기는 것이 민주화운동의 성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일동포양심수동우회의 이름으로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법원이 사법부의 어두운 과거를 정리하겠다며 나선 것도 이 무렵이었다.

2005년 취임한 이용훈 대법원장은 확보할 수 있는 과거사 판결문 6000여건을 검토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사법부가 잘못 판단한 사건들은 무엇인지 살펴보자는 취지였다. 법원행정처에선 판결문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는 224건의 과거사 사건을 분류해냈다. 과거사 정리를 위한 기초 자료였다.

하지만 사과와 반성을 위해 꼽아낸 224건의 과거사 사건들은 더 이상 재검토되거나 추가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224건 목록은 경향신문 데이터저널리즘팀이 만든 인터랙티브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khan.co.kr/kh_storytelling/2022/covered224/ )

이동석씨를 포함한 224건의 당사자들은 대법원이 이런 작업을 했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다. 자신의 사건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사법부가 직접 문제가 있는 사건으로 보인다고 검토했다는 사실은 무게가 달랐다. 사법부가 그 때 직접 나서 과거사 사건을 검토했단 걸 알았다면 더 많은 이들이 재심을 청구했을 지 모른다. 하지만 대법원은 과거사를 정리하는 시늉만 한 채 224건의 사건 목록을 서랍 속에 묵혀 둔 채 지냈다.

대법원은 직접적인 사과나 진실 규명 대신 사법부 60주년을 기념해 <역사 속의 사법부>라는 책을 펴내며 과거사 정리 작업을 일단락 짓겠다는 입장이었다. 이 책에 담긴 결론은 이런 식이었다.

“고문 받지 않을 권리, 불리한 진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임의성 없는 자백의 증거배제 원칙 및 자백의 보강법칙은 1962년 제3공화국 헌법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법원은 형사재판을 하면서 이러한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단 비판을 받기도 했다.”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비판을 받기도 했다’며 남의 일인 것처럼 굴었다.

대법원이 멈춰있는 사이에도 당사자들은 존엄을 지키려는 싸움을 이어갔다.

한국에서 재일동포 재심 변호인단이 꾸려졌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던 이종수씨가 2010년 재일동포 중에선 처음으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것이 계기가 됐다고 이동석씨는 이야기했다.

“2011년 3월11일이었어요. 지진이 나던 날 한국에서 변호사들이 왔지요.”

동일본대지진이 있던 날이었다. 변호사들은 지진으로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만남을 미룰 수 없다며 오사카로 갔다. 양심수 동우회 회원들을 만났고, 재심을 준비했다.

이동석씨(가운데)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동석씨 제공

이동석씨(가운데)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동석씨 제공

이동석씨는 2016년 무죄가 확정됐다. 2013년 시작된 재심은 검찰의 상고를 거쳐 2016년이 돼어서야 결론이 났다. 무죄 판결을 받고, 자신을 지지해줬던 구원회 회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그는 한국외대를 찾아갔다. 3학년까지 다니다 체포되면서 다닐 수 없게 된 대학생활을 다시 하고 싶어서였다. 복학이 되는지 물어봤더니 재입학이 가능하고 했다.

다시 학교를 다니려고 했던 건 ‘어떻게 인생을 되찾을 수 있을지’ 고민했기 때문이다. 그만두고 싶어서 학교를 그만둔 게 아니었다.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고 배상금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나간 과거의 삶이 다시 돌아올 수는 없었다.

국가에선 ‘이제 다시 잘못을 묻지 마라. 모두 끝난 것이다’라고 하는 듯 했다. “빼앗긴 인생을 다시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오래 전 일이 돼버린 과거를 어떻게든 내 안에서 다시 소화시키기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무죄가 확정된 뒤 모두 그만두고 프랑스로 떠났다. 재심이 시작되면서 20년 동안 일했던 공장이 도산했고, 이후엔 장애인의 생활을 지원해주는 활동가로 일했다 마무리했기에 여유가 있었다. 다행히 두 아들은 장성해 잘 살아갔다. 다른 걱정 없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할 시간이었다.

프랑스로 6개월간 연수를 떠났다. 그리고 돌아와 한국외대 프랑스어학과로 재입학해 다시 수업을 들었다. ‘편하게 대하라’고 해도 교수는 꼭 존댓말을 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기’들을 보며 그도 열심히 공부했다. 즐거운 추억을 주었던 연극동아리에 방문해 인사도 나눴다.

조국에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 중 3분의 2는 교도소에서 보냈다. 조국은 그를 이미 한 번 버렸었지만, 그는 끝내 조국을 버리지 못했다. 한국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되고 이야기하면서 그는 지난 시간을 되돌려보려 노력했다.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마음의 정리를 해 가려고 했다. 가보지 못한 조국의 땅 곳곳을 여행하면서 말이다.

이동석씨가  한국외대 프랑스어과를 졸업하면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졸업식이 열리지 않았다. 이동석씨 제공

이동석씨가 한국외대 프랑스어과를 졸업하면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졸업식이 열리지 않았다. 이동석씨 제공

그렇게 한국에 머물면서 이동석씨는 법정을 꼬박꼬박 찾았다. 법원에서 다시 다뤄지는 과거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학교에 다시 돌아갔던 것처럼 지난 과거를 다시 소화시키려고 했다. 다 끝난 일이라고, 나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않았다. 혼자 겪은 일이 아니었다고 다짐했다.

일본에서 궁금해할 동료들에게 재판의 진행 상황을 전해주려 하얀 스프링 노트에 이런 저런 내용들을 메모했다.

“피고인 망 조신치 재심 사건입니다.”

지난 6월23일 서울고법 형사5부 재판장 서승렬 부장판사가 조신치씨 사건의 선고를 하려 하자 이동석씨도 펜을 굳게 쥐었다.

공소사실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어 무죄를 선고합니다.

재판장이 선고 요지를 짧게 밝힌 주문했다. 이동석씨는 참지 못하고 조용히 박수를 쳤다. 작게 쳤는데도 방청석이 텅비어 소리가 조금 울렸다. 그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법정을 나섰다. 그는 법정 밖에 사건 일정을 알리는 안내판을 사진으로 담아뒀다. (조신치씨의 재심은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이동석씨는 재심 사건을 방청하면서 무죄를 선고하는 사건을 여럿 보았다. ‘무죄’라는 말이 나오면, 본인 사건이 아닌데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얼마나 고생했지 잘 알고 있으니까. 모두가 잊은 것 같지만 그래도 끝까지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은 건지 모른다.

조신치씨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이동석씨(오른쪽 두번째)가 함께 법원에 온 일행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조신치씨의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이동석씨(오른쪽 두번째)가 함께 법원에 온 일행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 코끼리’는 짧은 기사에 충분히 담을 수 없는 사건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장문의 디지털 기사로 전하는 경향신문 뉴콘텐츠팀의 스토리텔링 롱폼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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