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 “형제복지원 사건,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 35년 만에 첫 공식 인정읽음

이홍근 기자    윤기은 기자

“국가가 문제 인지하고도 조치 안 해”

국가기관에 의한 조사·발표도 처음

조사로 밝혀낸 사망자 105명 더 많아

수용자에 약물 투약 ‘화학적 구속’도

한종선씨(46)는 9살이던 1986년 파출소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다 의문의 트럭에 납치됐다. 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트럭이 한씨를 내려준 곳은 부산의 형제복지원이었다. 깜깜한 밤 철문을 열고 들어선 한씨를 앞서 비슷하게 끌려온 80여명이 신기한 듯 쳐다봤다고 한다.

수용 다음날부터 폭행이 시작됐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먹이 날아들었다. 한씨 앞에 있던 한 아이는 머리에서 골수가 터져나올 정도로 폭행당했고, 병원에 실려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밤에는 성폭력도 당했다. 한씨는 “이런 일이 매일같이 일어나는 곳이 형제복지원”이라고 했다.

경찰이 부랑인을 형제복지원에 인계하는 모습. 진실화해위 제공

경찰이 부랑인을 형제복지원에 인계하는 모습. 진실화해위 제공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결론내렸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35년 만에 국가기관이 국가의 책임을 처음으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국가기관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조사해 결과를 발표한 것도 처음이다. 조사 결과 형제복지원 사건 관련 사망자가 종전보다 100명 넘게 추가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는 24일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날 진실규명을 결정한 형제복지원 사건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정근식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진실규명 결과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었음을 확인했다”며 “국가는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진정을 묵살했고 사실을 인지하고도 조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부산의 형제복지원에서 1975∼1987년 일어난 인권유린 사건이다. 불법감금은 물론 강제노역, 구타, 암매장 등이 자행됐다. 1987년 이곳을 탈출한 사람들에 의해 그 만행이 세상에 알려졌으나 가해자인 박인근 형제복지원 이사장은 업무상 횡령 등 혐의만 인정돼 징역 2년6개월을 받는 데 그쳤다. 박 원장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부랑아 퇴치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과 1984년 각각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박 원장에 대한 훈포장은 2018년 7월 박탈됐다.

진실화해위는 1987년 부산지검 울산지청의 수사·공판 기록과 부산 각 경찰서가 보관 중인 소장, 형제복지원 신상기록카드 등을 입수해 분석했다. 그 결과 피해자들을 시설에 수용할 수 있게 한 내무부 훈령부터가 위헌·위법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부랑인의 신고·단속·수용·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인 내무부 훈령 410호는 군과 구청, 경찰로 구성된 부랑인 단속반이 형사 절차 없이 부랑인을 시설에 강제수용할 수 있게 했다.

형제복지원 정신환자시약비 자료 사진. 진실화해위 제공

형제복지원 정신환자시약비 자료 사진. 진실화해위 제공

이번 조사에선 형제복지원이 수용자들에게 정신과 약물을 과다 투약해 ‘화학적 구속’을 행한 정황도 드러났다. 1986년 형제복지원이 1년간 구입한 클로르프로마진(조현병 환자의 증세 완화제)은 총 25만정에 달했다. 1년간 342명이 매일 2회 복용할 수 있는 양이다. 형제복지원 정신과 약물 구입 목록엔 정신분열증과 양극성장애 치료제인 할로페리돌, 간질성 경련 및 부정맥치료제인 디펠과 마약류에 해당하는 향정신성의약품인 바리움, 달마돔 등도 포함돼 있었다.

강제노역, 구타 등 학대로 사망한 사람만 657명으로 확인됐다. 기존에 알려진 552명보다 105명 많은 수치다. 수용자들의 결핵 사망률도 높았다. 1986년 형제복지원의 결핵사망률은 0.41%로 당시 일반인구 결핵사망률 0.014%보다 29.2배 높았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이 사망진단서를 조작한 정황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국가가 형제복지원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한 사실도 드러났다. 군사안보지원사령부(옛 국군보안사령부) 존안자료 중 요시찰 및 보안처분 관련자료를 분석한 결과 국가보안법, 국방경비법, 반공법 위반자 다수가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됐다. 경찰 조사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은 피의자가 강제 수용된 사례도 있었다. 심지어 당시 보안사는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납북귀환어부 김모씨(당시 29세)를 감시하기 위해 보안사 요원을 위장 침투시켰는데, 보안사는 형제복지원을 ‘교도소보다 더 강한 규율과 통제를 하는 곳’으로 판단했다.

사망한 형제복지원 피해자 박모씨가 생전 형제복지원을 그린 그림. 진실화해위 제공

사망한 형제복지원 피해자 박모씨가 생전 형제복지원을 그린 그림. 진실화해위 제공

관계기관은 형제복지원의 실태를 알고도 사건을 조직적으로 축소하고 은폐했다. 형제복지원에 대한 검찰수사가 시작된 1987년, 당시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는 부랑인 강제수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부산시와 경찰, 안기부 등 부산지역 모든 기관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축소, 은폐한 사실도 확인됐다. 특히 부산시는 피해자와 가족들의 진정·소송을 회유하고, 원장과 측근들이 다시 형제복지원 법인을 장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진실화해위는 “경찰 등 공권력이 적극 개입하거나 이들의 허가와 지원, 묵인하에 부랑인으로 지목한 불특정 민간인을 적법절차 없이 단속하여, 형제복지원에 장기간 자의적 구금한 상태에서 강제노동, 가혹행위, 성폭력, 사망, 실종 등 총체적인 인권침해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결론내렸다”며 “국가가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피해 회복 및 트라우마 치유 지원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각종 수용 시설에서 피수용자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할 것, 사회복지공무원 및 시설 운영자 등에 대한 인권교육을 강화할 것, 유엔 강제실종방지협약을 조속히 비준할 것 등을 권고했다.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현재까지 진실규명을 신청한 이들의 수는 544명으로, 진실화해위는 오는 12월까지 계속해서 접수를 받은 뒤 신청 순서대로 추가 조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이날 기자회견장에 나온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연생모씨(54)는 “피해보상 이런 것보다 제일 시급한 게 트라우마 치료”라며 “법으로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트라우마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법을 만들어달라”고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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