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 224건

EP.03 1972년의 고문 당한 진술 믿을 수 있다는 2022년의 법원

전현진 기자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

EP.01 재일동포 이동석, 그리고 사법부의 시간

EP.02 47년 만에 무죄…달라진 건 많지 않다

EP.03 1972년의 고문 당한 진술 믿을 수 있다는 2022년의 법원

[국가폭력 224건] EP.03 1972년의 고문 당한 진술 믿을 수 있다는 2022년의 법원

1972년 2월16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경동시장 근처의 성림여관. 설 무렵이라 몹시 추웠다. 이대식씨(84)는 조바(종업원)가 급하게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때가 서른네 살이었다. 그가 운영하는 여관에 경찰관들이 오면 사장이 용돈을 조금씩 쥐어줘야 한다. 안 그러면 경찰이 객실마다 돌아다니며 임검을 해 손님들이 싫어했다. 그 시절엔 그렇게 장사를 했다.

“사장님, 손님이 찾는데요?”

새벽 6시쯤 됐을까. 아직 어둑했다. 잠옷 바람으로 한 객실에 가보니 그보다 나이가 조금 많고 험상궃게 생긴 남자 둘이 서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대식씨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두 남자가 대뜸 큰절을 했다. 얼굴에 큰 흉터도 있던 무섭게 생긴 이들이었다. 살짝 겁을 먹은 이대식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떨결에 맞절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앞에 권총이 보였다.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따라와.”

그리고 잠옷 바람으로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 소속 경찰관들이란 걸 알았다. 그는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선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73년 4월 그대로 확정됐다.

1972년 7월15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된 이대식씨에 대한 1심 선고 기사다. 간첩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3명의 피고인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이대식씨에 대해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그대로 확정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2년 7월15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된 이대식씨에 대한 1심 선고 기사다. 간첩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3명의 피고인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이대식씨에 대해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그대로 확정됐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법원이 2005~2006년 만든 ‘대법원 과거사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재검토 자료’ 224건 목록에서도 그의 삶을 내동댕이친 판결을 찾을 수 있다. 1970~1980년대의 국가보안법 위반 등 사건의 판결 6000여건 중에서 대법원이 직접 뽑은 224건의 과거사 사건들 중 이대식씨의 사건은 2번째에 올랐다. ‘지하 통혁당’ 재건을 도모한 ‘무전간첩단’이라고 불렸던 사건이다.

그에겐 북한 공작원에 포섭돼 여론조사 내용을 유출하고 난수표와 공작금을 받았으며, 김일성의 회갑을 맞아 축하 메시지와 선물을 보내는 등 간첩 활동을 한 혐의 등이 적용됐다.

지난 8월9일 오전, 서울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서 이대식씨를 만났다. 4000세대가 넘는 아파트 단지에 1개동만 따로 지어진 복도식 아파트의 임대주택이 그의 집이다. 16층에서 내려 번잡한 복도를 한참 가로질러 갔다. 좁은 그의 집은 작은 방 하나에 큰 방처럼 쓰는 거실 하나, 조그만 부엌과 화장실이 전부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오랜시간 대북사업가로 활동했다. 그를 만나기 전, 당당한 진보적 사업가를 머릿 속에 그렸다. 그는 반팔 칼라티와 헐렁한 반바지 차림이었다. 흰 머리를 한 그의 모습은 상상과 달랐다.

그를 만난 건 지난 7월15일 재심 선고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224건 목록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재심 선고가 이뤄진 걸 파악했다. 224건의 당사자 중 2022년 7월26일 현재 기준 가장 최근 재심을 받은 사건의 당사자였다. 이대식씨는 선고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냐며 먼저 물었다.

48년을 기다려 받아낸 재심 판결. 그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울분이 치솟습니다. 울분을 넘어 (법원이) 가소롭기까지 합니다.” 무슨 일일까.

■ ‘GPS 거물간첩’

그의 억울함을 들여다보려면 출소 이후의 삶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그가 간첩으로 몰린 건 48년 전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1990년 3·1절에 가석방돼 출소한 그는 일본에 있는 지인의 도움으로 1991년부터 부산에서 신발공장을 했다. 그 무렵 이미 신발 산업은 이미 몰락하던 중이었다고 했다. 신발 생산 기지는 인건비가 더 싼 해외로 이전하고 있었다.

다른 사업을 찾으려고 했지만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던 때에 생각난 것이 북한이었다. 몇 해 전 노태우 정부에서 남북교류협력법(1990년)을 만들며 북한 물품이 국내로 막 들어오고 있었다. 북한의 물품을 가져와 한국에서 팔면 독점할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닿았다. 1993년, 그가 50대 중반이었을 때 본격적인 대북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안기부(국정원)를 비롯 이곳저곳을 통해 알아본 뒤 간첩으로 몰려 처벌받은 전력이 있는 자신이 아니라 아내의 이름으로 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통일부로부터 정식으로 승인을 받았다. 대동무역이란 회사를 차렸고, 대동주류도 이어 만들었다. 통일부의 대북사업협력자로 지정됐다. 북한의 술 판매도 거의 독점했다.

사업이 한창이었지만 1974년에 처벌받은 사건은 늘 마음에 짐이었다. 이대식씨는 재심을 받아 명예 회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고 했다. 사업도 궤도에 오르는 듯 했다. 2006년 8월 강서약수가 나오는 북한 평안남도 강서구역 청산리에 생산공장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때는 준공식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서 고려항공 전세기를 타고 북한에 가기도 했다.

2005~2006년에는 대법원이 과거사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잘못을 반성하겠다며 224건의 사건을 추렸다. 진실화해위원회 등 과거 청산을 위한 다양한 기구들이 활동할 때였다.

하지만 재심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출소한 뒤에도 계속 보안관찰을 받아왔고, 담당 형사는 거의 매일 전화를 걸었다. 처벌 전력도 있고 대북사업을 하면서 평양도 개성도 다녀왔으니 보안 담당 경찰들의 관심이 컸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재심을 하겠다고 나서면 사업에 큰 지장이 생길 게 뻔했다.

그러다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 터졌다. 금강산 관광객이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었다. 북한에서 초청장을 받아 평양에 들어가야 할 무렵이었다. 뱀장어 약식장을 만들어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대동수산이라는 회사도 만들었다. 하지만 사건이 터지면서 북한으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충북 음성에 800평 규모의 창고를 겸한 사무실을 마련해 대북사업의 기지로 삼았던 때였다. 통일부에 수시로 연락하면서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2010년 서해안에서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곧 5·24조치가 시행됐고 남북교역이 중단됐다. 북한 관련 사업은 모두 중단됐다. 투자금을 회수할 방법도 없었다. 길이 보이지 않던 그 무렵 뉴질랜드 교포인 ‘사이먼 김’이라는 사업가를 만났다.

북한의 대남사업 기관 민족경제협력연합회 관계자의 소개로 만난 그는 자신이 자유롭게 북한을 다닐 수 있으니 대북사업을 함께 하자고 했다. 사업이 궁지에 몰렸던 때였다. 송이버섯 사업을 함께 하게 됐다. 중국 단둥에 아파트를 마련했다. 이대식씨가 자금을 댔고 사이먼 김이 현지에 머물렀다. 그러다 수익배분 문제로 관계가 틀어졌다. 단둥에 마련한 아파트를 놓고 싸움이 번졌다.

그 싸움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GPS 간첩’ 사건이 됐다. 이대식씨는 GPS 교란기술을 북한에 넘기려한 ‘거물간첩’으로, 사이먼 김은 그 공범으로 함께 구속됐다. 사건을 제보한 게 사이먼 김이었다.

‘거물간첩’이란 별명이 붙었지만 그는 4년에 걸친 법정 싸움 끝에 누명을 풀었됐다. 1~3심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GPS 교란 기술은 국가기밀로 보기도 어려웠고, 유일한 증거인 사이먼 김의 진술이 모순된 게 많았다. 수사기관에 거짓 혹은 과장된 제보를 했거나, 처음부터 수사기관과 짜고 제보한 것이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무죄가 확정됐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5·24조치 이후 기울어진 사업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또 한 번 간첩으로 몰리면서 삶 전체가 무너졌다. 창고와 땅은 경매에 넘어갔고, 1990년 출소 후 결혼해 두 딸을 낳아 함께 살던 아내와도 이혼했다. 재기의 노력은 허망하게 수포로 돌아갔다.

이대식씨가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전현진 기자

이대식씨가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전현진 기자

■재심에서도 못 풀은 ‘억울함’

재심으로 명예를 회복하는 게 그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였다. 2012년 다시 간첩으로 몰려 수사받은 것도 48년 전의 일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간첩이라고 덧씌워진 불명예를 지우고 싶었다.

2016년 12월 재심을 청구했지만 오래도록 재심 개시 결정이 나지 않았다. 재심 청구 당사자에겐 기다리는 시간이 지옥과도 같다. 약을 달고 살며 건강도 악화됐다. 법원은 그러나 아무 답이 없었다. 자신의 남은 삶은 줄어들고 있었지만 법원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한 것처럼 느껴졌다.

2021년 7월 드디어 재심 개시가 결정됐다. 불법 구금 상태에서 수사가 이뤄졌다는 이유였다. 검찰이 재심을 할 이유가 없다고 반발하며 재항고를 제기했다. 재항고는 대법원에서 기각돼 같은 해 11월 재심 개시가 확정됐다. 재심을 청구한 지 5년 만이다.

재심 개시까지 걸린 오랜 시간과 달리 선고는 후다닥 진행됐다. 지난 5월 첫 신문기일이 진행됐고, 2차 공판에서 절차가 마무리됐다. 재판정에서 진행된 심리는 딱 두 번이었다. 충실한 심리가 이뤄진다면 빠른 결론을 싫어할 당사자는 없다. 하지만 두 번의 공판으로 사건을 충분히 살필 시간이 있었을까.

지난 7월15일 선고가 이뤄졌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그는 재심에서 모든 누명을 씻을 거라 기대했다. 그에게 적용된 12개 혐의는 원심에서 모두 유죄가 선고됐다. 재심에선 이 중 10개 혐의를 무죄로, 2개에 대해서 원심과 같이 유죄 판단을 유지했다. 그에겐 징역 3년이 새로 선고됐다. 이미 18년의 징역을 살아 새로 수감될 필요는 없다. 그는 새로운 억울함이 생겼다며 가슴을 쳤다.

“고문에 의해 날조된 사건인데 그 중 죄가 있다고 하니….”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3부(재판장 심담)가 유죄로 인정한 건 이대식씨가 남파공작원의 지하조직원에 김일성의 회갑선물과 메세지를 전달했다는 혐의, 남파공작원으로부터 15만원을 받았다는 혐의 등 두 가지다.

재심 재판부는 이대식씨가 강제연행돼 불법으로 구금된 상태에서 경찰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임의성 없는 진술, 즉 제 뜻대로 한 것이 아닌 허위자백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경찰에서 고문당한 심리상태가 검찰에서까지 이어졌을 테니, 검찰에서 한 진술 역시 증거로 쓸 수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대식씨가 재판에 넘겨진 뒤 법정에서 한 진술은 ‘임의성이 있다’고 보아 증거로 쓸 수 있다고 했다. 이대식씨에게 변호사가 선임된 상태에서 진술했고, 공소사실 중 인정하는 부분과 인정하지 않는 부분을 구체적으로 나누어 명확하게 진술하였다는 것이다.

이대식씨는 재판부의 판단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호소했다. 혐의를 인정하는 듯한 진술이 있었던 사정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대식씨는 우선 극심한 고문을 당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다고 했다.

그는 “북망산천을 가 보지 못한 사람들은 저의 이런 심경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북망산천은 그가 고문 당할 때 수사관에게 들었던 말이다.이대식씨는 체포된 뒤 군용 야전침대에 눕혀 몽둥이로 엉덩이에 피가 날 정도로 두둘겨 맞은 뒤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수사관들은 고춧가루를 탄 물을 얼굴에 부었다. 재심 판결문에도 이런 내용이 기재됐다.

그러다 한 수사관이 나무 판에 그를 눕혀 가죽 벨트를 묶더니 “칠성판이 무언지 아느냐”고 물었다. 이대식씨는 몰랐다. “시신을 염할 때 눕히는 곳이 칠성판이야.” 수사관이 이죽거렸다.

“원래는 염주실로 하는데 너는 가죽 끈으로 묶었으니 더 좋은 대접을 해준 거야.” 수사관은 가죽 끈에 묵인 이대식씨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부었다. 물에 잠기듯 숨을 쉴 수 없었고, 결국은 기절했다.

“북망산천은 잘 보고 왔느냐.” 기절하고 깨어났더니 수사관이 말했다. “염라대왕께서 아직 보낼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으니 이제는 협조해야지.” 북망산천은 사람이 죽어 묻히는 명당을 가리킨다. 그대로 죽었으면 모르지만 살아돌아왔으니 이제 협조하라는 식이었다. 재판 중에도 경찰이 ‘잘 해!’라고 말하는 순간 공포에 휩싸였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극형을 피하기 위해 각종 혐의에 대해 일부는 인정하고 일부는 부인하는 듯한 진술을 했고 이 상태가 법정에서도 계속됐다는 설명이다. 변호사가 선임됐다 하더라도 당시 충실한 조력을 받기는 어려웠다고 했다.

고문을 받고 한 허위 자백을 토대로 만들어진 공소장, 이를 토대로 한 원심 법정에서의 진술과 판결문. 이런 자료들을 세밀하게 살피지 않고 다시 유무죄를 판단하면 근본적인 모순이 생긴다고 그는 말했다.

1972년 4월1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이대식씨의 검거 기사. 오른쪽 사진의 위에서 4번째가 이대식씨다.

1972년 4월11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이대식씨의 검거 기사. 오른쪽 사진의 위에서 4번째가 이대식씨다.

이대식씨를 체포할 당시 경찰은 그가 1970년 9월 무렵부터 유위하라는 남파공작원의 지하조직 하부선으로 보았다.

유위하의 하부선으로 함께 대동입북했던 권영섭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대식씨 외사촌 형수의 오빠인 먼 사돈 관계다. 권영섭은 일찍 사망했다. 여기에 권영섭의 형 권양섭과 아들 권낙기도 등장한다. 이대식씨와 사돈들은 돈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그런데 이후 경찰의 수사로 권낙기가 고문을 당하면서 이대식씨를 지하조직의 하부선이라고 허위 진술하게 된다. 이대식씨가 간첩 사건에 연루된 계기였다.

이대식씨를 체포한 뒤 그에게도 허위 진술을 받아냈다. 그런데 경찰이 유위하, 권양섭, 권낙기 등을 조사해보니 1970년 9월 이전 이대식씨가 그들의 지하조직 하부선이라는 혐의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진술이 모순돼 아무리 허위자백을 받아도 입증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대식씨의 공소사실 첫 번째에는 다른 혐의가 등장한다. 간첩 사건의 공소사실 첫 번째는 보통 어떻게 공작원에게 포섭됐는지에 대한 혐의가 나온다. 이대식씨는 1967년 5월 아버지가 보관하던 산수화를 판매하려고 일본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조총련계 공작원에 포섭된 뒤 국내로 잠입했다는 혐의가 만들어졌다.

경찰이 처음에 체포했던 혐의와 전혀 다른 내용이다. ‘김일성 회갑선물’ ‘난수표 교부’ 같은 혐의들은 유위하의 지하조직과 연관된 혐의이다. 이대식씨가 유위하의 지하조직 하부선이라는 전제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런데 그가 포섭된 건 전혀 다른 조총련계 공작원으로 공소가 제기된 것이다. 게다가 조총련계 공작원에 포섭됐다는 혐의도 재심 재판부는 무죄로 판단했다. 이대식씨가 언제 누구에게 포섭됐는지는 제대로 판단하지 않았다.

재심 재판부의 판단 대로라면, 이대식씨는 어느날 갑자기 금전관계로 다툰 먼 사돈과 남파공작원에게 누구보아도 위험한 ‘김일성 회갑선물’을 건넨 것이 된다. 이대식씨가 유위하 지하조직의 하부선이라는 것이 입증되지 않았는데, 그 이후 순차적으로 벌어졌어야 논리적으로 성립되는 혐의에만 유죄로 판단한 건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대식씨는 문제의 남파공작원 유위하와 실제로 만난 적이 있었다. 1972년 1월 부산에 있는 권양섭의 집에서다. 권양섭의 아들이 급히 연락이 와 부산에 갔던 것인데 그 집에 잠시 머물던 유위하와 마주쳤다는 것이다. 유죄로 판단된 공작금 15만원을 받은 혐의도 이 날이었다.

유위하는 그때 북한에 우호적인 말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이대식씨는 그 정체가 의심스러워 말을 둘러댄 뒤 1시간 쯤 뒤 바로 그 집을 떠났다고 했다. 최소한 이 날 이대식씨가 유위하에게 포섭됐다고 하더라도, 공작원에 포섭된 뒤 교육을 받고 돈을 받아 떠나기에는 불충분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사실이 아니라 고문 받으면 허위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공작금을 받았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모순된 답변이 나온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밖에도 난수표를 받았다고 시인하고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은 부인했다거나(노동당에 가입하지 않으면 난수표를 제공받을 수 없는 것이 상식이기에 모순이 생긴다고 그는 설명했다), 여론조사서 작성 혐의도 부인했다가 시인하기도 했고, 불온선전물 ‘삐라’를 살포한 혐의도 시인했다가 부인하는 등 그의 진술은 오락가락했다고 그는 말했다.

재심 재판부에서는 이런 모순된 답변에 대해 제대로 심리하지 않고 인정하는 듯한 취지가 있는 건은 정말로 자백한 것처럼 과거 잘못된 공소장과 판결문, 수사기록을 근거로 유죄를 선고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이런 주장들을 자세히 정리해 변호사에게 보냈고, 엿새 뒤 대법원에 상고했다. 검찰도 닷새 만에 상고장을 제출했다. 수십년을 기다려 재심을 받아도 끝난 게 아니었다. 대법원 상고심의 결과는 언제나 나올지 알 수 없다.

이대식씨가 인터뷰를 하면 과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전현진 기자

이대식씨가 인터뷰를 하면 과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전현진 기자

무전 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던 이들 중 재심을 받은 건 이대식씨 뿐이다. 많은 이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이들도 재심을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지금도 몇 사람과는 연락이 됩니다. 재심 이야기를 하면 상상도 안 하겠다고 해요. 꿈에도 그 일을 떠올리기 싫다고요. 저는 너무 억울하게 엮여 들어갔으니까요.”

그는 어렵게 사는 중에도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온종일 사건에 대해 고민한다.

돈암동 자택 문 앞에서 처음 인사했을 때 그는 복도 쪽의 작은 방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불이 펴져있고 정리가 안 됐는데….”

거실 바닥엔 그의 말처럼 이불이 깔려있었다.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자리에 모시 이불이 보였다. 노인이 홀로 지내는 곳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방 한 켠에 컴퓨터 책상이 있었고 다른 쪽엔 낮은 밥상에 노트북이 올려져있었다. 행거 하나에 옷이 마구 걸려있었다. 이대식씨는 대부분 이곳에서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방 한쪽 구석엔 파스텔톤으로 칠해진 책꽂이가 있었다. 이런 저런 책과 서류더미, 약 봉투들이 쌓여있었다. 유치원생 정도로 보이는 두 여자아이의 빛 바랜 사진이 액자에 담겨 맨 윗칸에 놓여 있었다. 무더운 날이었지만 정적이 흐르는 이 집에선 오래 된 선풍기도 멈춰 있었다. 주목 받던 대북사업가였던 한 남자가 간첩으로 두 번이나 몰린 뒤의 초라해진 삶을 그의 집은 감춰주지 못했다.

이대식씨는 이빨이 몇 개 남지 않고 몽땅 빠졌다고 했다. 그동안 이를 악물고 버티며 살았기 때문에 그랬을까. 잇몸은 녹아 없어진 것처럼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삶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말이다. 재심 선고가 나왔지만 그 역시 달라진 건 많지 않아 보였다.

‘다시 읽고 싶은 긴-이야기 : 코끼리’는 짧은 기사에 충분히 담을 수 없는 사건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장문의 디지털 기사로 전하는 경향신문 뉴콘텐츠팀의 스토리텔링 롱폼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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