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 224건(3)

재심 생각 못하고 살아온 수십 년…재심 청구해도 ‘기다리라’는 법원

조문희 기자    전현진 기자

대법원 서랍 속 국가폭력의 기록 224건 추적

①사과 위해 만든 국가폭력 기록 224건, 16년 동안 묵혀둔 대법원

②법원은 어떻게 국가폭력에 가담했나…과거사 사건 분석

③재심 생각 못하고 살아온 수십 년…재심 청구해도 ‘기다리라’는 법원

탄광회사에서 일하며 서울대 지질학과 강사로 있던 재일교포 2세 최창일씨. 그가 간첩으로 몰려 수감된 뒤 일본에 있는 지인들이 만든 소식지에 그의 약력이 간단하게 실렸다.

탄광회사에서 일하며 서울대 지질학과 강사로 있던 재일교포 2세 최창일씨. 그가 간첩으로 몰려 수감된 뒤 일본에 있는 지인들이 만든 소식지에 그의 약력이 간단하게 실렸다.

그녀의 이름은 나카가와 도모코(中川智子). 1981년 9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자랐다. 지금은 오사카부립고교의 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최지자. ‘도모코’(智子)라는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은 것이다. 이 한국어 이름을 쓸 일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녀의 아버지 최창일씨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히로시마대 지질과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최고의 명문인 도쿄대학원 자원개발공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대학원을 마친 뒤엔 일본을 떠나 한국에 왔다. 해방 전 일본으로 건너와 늘 고향을 그리워했던 아버지의 몫까지 조국에서 꿈을 펼쳐보고자 했다. 1967년이었다.

전공을 살려 탄광회사에 입사했다. 아내를 만나 첫째 아들을 낳았다. 한국에서 평안한 삶을 그렸을 테다. 하지만, 모국을 찾은 재일교포들을 간첩으로 만들어내던 당대 한국의 광풍을 피하지는 못했다.

국군 보안사령부가 1978년 펴낸 ‘대공30년사’에는 최창일씨 사건이 기록돼 있다. 최창일씨가 서울대 자원공학과에서 강사로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난 1973년 6월, 군인들이 그를 찾아왔다. 보안사는 최창일씨가 조총련계 공작원에 포섭된 뒤 북한을 드나들었고 간첩 활동을 하기 위해 국내에 입국했다고 봤다. 최창일씨의 신문 조서에는 ‘북한에서 지령을 받았다’, ‘조총련계와 내통해 간첩 활동을 했다’는 취지의 자백이 담겼다. 1974년 법원은 이를 근거로 징역형 15년을 선고했다.

지난 4월 정보공개청구로 확인한 ‘대법원 과거사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재검토 자료 224건’ 목록 중 52번째 사건에서 최창일씨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법원은 2005~2006년 사법부의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하고 반성하겠다며, 국가기록원이나 각급 법원이 보관 중인 1970~1980년대 판결 6000여 건을 살펴본 뒤 국가보안법 등으로 처벌한 과거사 사건 224건을 추려냈다. 유명 정치인 등이 연루된 사건도 포함됐지만, 이 목록에 담긴 모든 사건의 면면이 자세히 공개된 적은 없었다. 최창일씨 사건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2019년 12월, 서울고등법원에 아버지를 대신해 재심을 청구하면서 최지자씨는 오랫동안 쓰지 않던 한국어 이름을 썼다. 최지자씨는 이야기한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가 불법으로 아버지를 잡아가 가둬둔 채 수사했고, 간첩으로 둔갑시켰다”고. 법원은 3년째 답을 하지 않고 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최지자씨와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국가폭력 224건③] 재심 생각 못하고 살아온 수십 년…재심 청구해도 ‘기다리라’는 법원


■가족들은 재심을 두려워했다…“한국 정부에 살해당한다”고

최창일씨가 한국에서 살 때 태어난 오빠와 출소 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태어난 최지자씨는 10살 넘게 차이가 났다.  최지자씨 제공

최창일씨가 한국에서 살 때 태어난 오빠와 출소 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태어난 최지자씨는 10살 넘게 차이가 났다. 최지자씨 제공

최지자씨가 아버지의 일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된 건 서른 살 무렵이었다. 20세 때 어머니가 “왜 오빠랑 나이가 10살이나 차이 나는지 알려주겠다”며 “아버지는 감옥에 오래 계셨다”고 했다. 그때 최지자씨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거나 상당히 나쁜 짓을 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10년 뒤에야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쓴 정치범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재심 청구까지 결심한 건 8년이 더 지난 뒤였다.

최지자씨가 재심을 청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오빠와 어머니의 반대가 컸다. 아버지 사건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했다. 다른 가족들이 피해를 보게 될까 봐 겁을 먹었다. 그의 어머니는 “한국 정부에 절대로 살해당할 것”이라고 했다. 최지자씨가 재심을 말한 뒤 어머니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만큼 불안해했다.

“과장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오빠는 정말로 ‘한국 정부는 무서운 곳’이라며, ‘재심을 하겠다면 우리(가족)는 살해 당하고 싶지 않으니 인연을 끊겠다’고도 했습니다.”

그녀는 ‘224건 목록’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최지자씨는 아버지가 징역형이 선고된 뒤 45년만에 재심을 청구했다. 대법원에서 아버지의 사건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진작 알았다면 “더 빨리 행동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어머니와 오빠의 두려움까지 모두 해소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최씨의 생각이다.

이들이 일찌감치 재심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224건의 재심 여부를 살핀 뒤 재심 선고가 이뤄진 120건 중 44건의 판결문을 입수해 확인했다. 36건은 전부 무죄, 8건은 일부 무죄로 판단했다. 혐의가 인정된 부분은 선고유예나 면소(공소권이 없어져 기소를 면함) 등으로 판단했거나 외국환관리법·밀항단속법 등 다른 혐의였다. 간첩 혐의는 무죄였다. 대부분 불법체포와 임의성 없는 자백, 불충분한 증거 등을 이유로 공소사실을 입증하지 못한 게 무죄 판단의 근거가 됐다.

나머지 사건의 결론도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대법원이 정리한 224건 목록은 시국·공안 가운데 고문이나 불법구금이 의심스러운 사건을 꼽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최지자씨는 아버지에게 어떤 판단이 내려질지 알지 못한다. 그녀가 청구한 재심이 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최지자씨 가족의 멈춰선 시간

최지자씨는 아버지가 힘든 일을 겪었지만 자상한 분이라고 기억한다. 어린시절 부모님과 함께 한 시간. 최지자씨 제공

최지자씨는 아버지가 힘든 일을 겪었지만 자상한 분이라고 기억한다. 어린시절 부모님과 함께 한 시간. 최지자씨 제공

최지자씨가 두려워하는 어머니와 오빠 몰래 재심을 준비하게 된 건 이들의 지난 상처를 치료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1973년부터 가족의 시간은 멈춰 있습니다. 모두 계속 무언가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이제 무리지만, 어머니와 오빠만이라도 정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75세인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빨리 한국에 데려다 주고 싶습니다. 정말 그런 작은 꿈밖에 갖고 있지 않아요.”

‘멈춰있다’고 묘사한 그들의 삶은 실제 어땠을까. 224건은 대법원 법원행정처에서 ‘문제가 있거나 중요해 보이는’ 판결을 1차로 선별한 목록이다. 최지자씨가 “되돌려달라”고 한 가족의 인생은 담겨있지 않다. 그녀 가족의 시간이 멈춘 시점은 최창일씨가 잡혀간 무렵으로 되돌아간다.

6년 동안의 징역을 살던 중 최창일씨는 1979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회사에선 해고됐고, 강사 일은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아내는 이웃들로부터 손가락질당했고, 이곳저곳 이사를 다녀야 했다. 생계를 이어야 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장사해보려다 큰 빚을 지기도 했다. 최지자씨는 어머니가 이때를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라고 표현했다고 말했다.

최창일씨는 풀려난 뒤 한국에 터를 잡은 가족들에게 ‘일본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그는 한국인과 교포들이 많이 살지 않는 가나가와(神奈川)현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가족 외에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지 친구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놀러 가는 일도 없었어요.” 최창일씨는 대학에서 계속 연구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초중학생에게 수험공부를 가르치는 이력을 살려 학원 강사가 됐다.

최지자씨의 오빠는 한국에서 태어나 언어와 문화 모두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아버지를 원망했다. 어머니는 일본말을 할 줄 몰라 차별 속에서 살아야 했다. 가족이 일본에 간 뒤 태어난 최지자씨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오빠가 아버지를 향해 품었던 분노와 어머니의 정신적 괴로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버지의 사연을 알기 전까지 “나까지 인생을 망쳤다는 생각에 가족을 증오했다”고 한다.

1996년 겨울 최창일씨가 갑자기 쓰러졌다. 뇌종양이었다. 어머니가 직장을 그만두고 간병을 했다. 착하고 똑똑했던 오빠는 좋은 학교에 진학했지만 “대학생 때 심한 차별을 당하면서 마음이 무너진” 채 지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2년 뒤 끝내 돌아가셨다. 최지자씨가 17살이 됐을 때다. 그는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슈퍼마켓 계산대, 공장 등지에서 일했다. 대학에 가고 싶어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말 못할 고생을 하며 살았어요.” 최지자씨는 그렇게 회상했다.

최창일씨. KBS <다큐인사이트 - 스파이> 중

최창일씨. KBS <다큐인사이트 - 스파이> 중

■224건은 과거사 반성의 출발점

224건 중 법원의 재심 선고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 건 104건이다. 당사자 등이 재심을 청구하지 않은 경우, 재심을 청구했으나 법원의 판단이 나오지 않은 경우다. 재심이 진행 중이지만 선고가 이뤄지지 않은 사건도 여기에 포함된다.

224건 목록의 존재가 일부 드러난 2007년 무렵, 법원은 ‘과거사 사건의 명예회복은 재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당사자 등이 재심을 청구하지 않으면 재심을 개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최지자씨의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재심 청구는 결심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재심 청구 후 법원의 답을 기다리는 일도 녹록지 않다. 최지자씨는 재심 청구 결론이 어떻게 날까 여전히 두렵고 초조하다. 아버지와 가족들을 응원해준 일본의 지인들도 이미 고령이라 더 걱정된다. 늦기 전 좋은 결과를 전하고 싶다. 최지자씨는 지난해 12월 법원을 향해 “하루라도 빨리 재심을 열어달라”며 탄원서를 보냈다. 다른 재일교포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 13명도 최지자씨를 위해 “기다림이라는 고통을 더이상 주지 말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썼다. 재심을 청구한 지 2년 8개월째다.

최지자씨를 대리하는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최소한 법원이 직접 문제 있어 보이는 판결 사례로 꼽았으면, 재심을 열어서 판단은 해봐야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224건에 담긴 사건들은 대법원이 스스로 ‘문제 소지’가 있는 본 것을 꼽은 사건이다. 이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사건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224건 목록에 담기지 않은 사건들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224건 목록은 보존기간이 지났으나 폐기되지 않은 과거사 사건 판결문을 주로 활용해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 1명이 검토했다는 한계가 있다. 폐기된 판결문은 검토 대상에서 빠졌고 다양한 이들의 의견을 검토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다만 이 목록이 만들어진 처음의 목표처럼, 사법부 과거사 청산의 출발점으로 삼기에는 충분하다. 한 교수는 “법원이 인정할 정도로 문제가 있는 판결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사법부에 어떤 식으로 압력이 가해졌는지, 압력을 거부한 이들과 따른 이들의 인사는 어떻게 이뤄졌는지로 의미를 확장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수십 년을 기다린 데다 당사자 대부분이 고령인 과거사 사건은 빠른 결론을 내리는 것도 ‘지연된 정의’를 바로잡는 데 꼭 필요하다. 현행법상 재심 청구 자격은 사건의 당사자 또는 검찰에게 주어져 있다. 본인이나 가족이 두려움과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재심 청구를 망설일 경우, 검찰이 사건을 검토해 직접 재심을 청구할 수도 있는 뜻이다. 법원의 빠른 개시 결정과 판결도 중요 요소이다. 검찰이나 법원 모두 제주4·3사건을 다루는 전담 부서를 둔 것이 좋은 예다.

지난해 12월 최지자씨는 오빠와 함께 아버지의 묘를 찾았다. 오빠에게 “아버지를 아직 원망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한국 정부에 이용만 당하셨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생각해.” 오빠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제는 체념한 듯 보였다.

최지자씨는 이뤄지지 않은 일을 꿈꿔 본다고 했다. 한국에서 아무 일 없이 지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 상처는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지금부터 돌이킬 수는 없어요.”

과거의 일로 더이상 상처받지 않는 게 ‘작은 꿈’이라는, 최지자씨의 흉터 위로 3년째 상처가 늘어간다.

최지자씨. KBS <다큐인사이트 - 스파이> 중

최지자씨. KBS <다큐인사이트 - 스파이> 중


Today`s HOT
400여년 역사 옛 덴마크 증권거래소 화재 APC 주변에 모인 이스라엘 군인들 파리 올림픽 성화 채화 리허설 형사재판 출석한 트럼프
리투아니아에 만개한 벚꽃 폭우 내린 파키스탄 페샤와르
다시 북부로 가자 호주 흉기 난동 희생자 추모하는 꽃다발
폴란드 임신중지 합법화 반대 시위 이란 미사일 요격하는 이스라엘 아이언돔 세계 1위 셰플러 2년만에 정상 탈환 태양절, 김일성 탄생 112주년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