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도 10편 못 넘긴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소송 이겨도 영화관에 장애인은 없다읽음

박하얀 기자

시각장애인 이희영씨는 친구와 함께 영화관에서 외국 영화를 봤지만 두 시간 내내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친구는 이씨에게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하지만 한국 영화 관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근 영화 <한산>을 관람한 이씨는 영화를 보는 내내 일부 대목에서 내용을 어림짐작해야 했다. 등장 인물들이 일본어를 구사하는 장면에서 딱히 대화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시력 시각장애인 박승규씨는 1일 문자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한국영화 몇 편을 오는 20일 오후 7시, 21일 오후 2시, 22일 오후 2시 몇몇 영화관에서 상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한 달에 고작 1~3차례 자막과 음성해설이 제공되는 ‘배리어프리 영화’를 상영하지만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다. 박씨는 “경기 오산시에 사는데 영화를 보려면 서울 노원구까지 가야 하고, 평일 낮에 영화를 상영해 일하는 장애인들은 가지 못한다”며 “지정된 영화가 보고싶지 않을 수 있고,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이들도 있는데 선택권이 없다”고 했다.

장애인단체들이 1일 CJ CGV 왕십리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영화상영업자들 및 영화진흥위원회에 “법원 판결에 따라 장애인에 대한 정당한 편의 제공 의무를 즉각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박하얀 기자

장애인단체들이 1일 CJ CGV 왕십리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영화상영업자들 및 영화진흥위원회에 “법원 판결에 따라 장애인에 대한 정당한 편의 제공 의무를 즉각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박하얀 기자

6년 소송 승소했지만…장애인을 ‘관객’으로 보지 않는 영화관

6년에 걸친 시·청각 장애인들의 영화관람권 차별구제 소송에서 1·2심 재판부는 장애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등법원 제5민사부(재판장 설범식)는 지난해 11월25일 판결에서 CJ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등 영화 상영업자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영화 상영 시 자막과 음성해설을 제공할 의무를 부담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다만 재판부는 300석 이상의 좌석을 가진 복합상영관 내 1개 이상의 상영관에서 편의 제공 조치를 하라는 제한을 뒀다. 총 상영 횟수의 3%에 음성해설 등의 편의를 제공하도록 했다. 그러나 상영업자들은 하급심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했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는 “장애인 동시관람 상영 시스템에 대한 시범 상영 및 수용성 조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영진위 관계자는 “비장애인 관객 40명, 장애인 15명가량이 영화관에서 비치된 설비들을 이용해 관람하면서 보완점은 없는지 테스트하는 것”이라며 “동시 관람 방식의 시스템을 마련해달라는 요구가 있어 4개월 동안 연구용역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장애인단체들은 재판 당시 현장검증으로 시범 상영을 했던 사실을 언급하며 공공기관인 영진위가 대기업 눈치를 보며 ‘시간 끌기’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는 1일 CJ CGV 왕십리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법원 결정대로 편의 제공을 즉각 시행하라”고 밝혔다.

원고 측 변호인이자 시각장애인인 김재왕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2016년에 소송을 제기했고 이후 많은 장애인이 탄원서도 냈는데 영진위는 장애인의 욕구를 파악하지 못한 것인지 엉뚱한 데에 돈을 쓴다”며 “수용자 조사를 왜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박김영희 장추련 상임대표도 “문화를 누릴 권리는 비장애인만의 것이 아니라 장애가 있는 사람 누구나 함께 가져야 할 권리”라고 했다.

박승규씨가 1일 받은 문자. 시·청각 장애인이 관람 가능한 영화 일정이 공지돼 있다. 박하얀 기자

박승규씨가 1일 받은 문자. 시·청각 장애인이 관람 가능한 영화 일정이 공지돼 있다. 박하얀 기자

‘비용 문제’라는 상영업자들, 재판부 판단과는 간극

2심 판결문에 따르면 CJ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가 개방형 상영 방식(상영관 내 모든 관객에게 음성해설이나 자막을 노출하는 방식)으로 배리어프리 영화를 보여준 상영관 수는 전체 상영관 수의 1~3%에 그쳤다. 상영 횟수는 전체 횟수의 1%에도 못 미쳤다. 지난해 CJ CGV는 2021년 8편·61회·19개관, 롯데시네마 6편·26회·11개관, 메가박스 4편·5회·3개 관에 불과했다.

상영업자들은 판결 이행에 따른 ‘비용 부담’이 과도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폐쇄형 상영 방식(별도의 개인용 수신기기를 사용하는 관객에게만 음성해설이나 자막을 노출하는 방식)을 위한 장비를 제공하는 데에 100억원에 가까운 비용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진위는 지난해 재판부에 낸 검토의견서에서 같은 방식을 채택할 경우 소요 비용이 81억7116만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CGV 관계자는 “배급사 등 이해관계자들의 사회적 합의가 우선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며 “서비스가 가능한 표준화된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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