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는 제사 준비에서 빠져!” 이런 시대가 있었다

조해람 기자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어린이들이 차례상 문화를 배우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하나로마트 양재점에서 어린이들이 차례상 문화를 배우고 있다. 연합뉴스

‘상다리 휘어지는’ 명절 차례상은 정말 전통이 맞을까요?

추석 명절 차례상을 간소화하고 제사 대신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는 흐름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집에서 과도한 제사상 문화를 유지해 여성들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부엌일을 하고 남자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한국의 전통문화라는 관념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전통문화 전문가들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과도한 차례상 차리기는 한민족 전통이 아닐 뿐더러 정통 유교 예법에도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전통문화 전문가인 김용갑 전남대 문화유산연구소 연구원이 2020년 발표한 연구 ‘한국 명절 쇠는 방식의 방향성’을 보면, 한국의 양대 명절인 설과 추석은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고(설) 농사의 수고에 감사하는(추석) 데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에서 지난달 24일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한수빈 기자

서울 동대문구 경동시장에서 지난달 24일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한수빈 기자

명절을 기념하는 방식은 제사 같은 ‘의례’와 떡국·송편 등 명절 음식을 먹는 ‘절식’으로 갈리는데요. 절식의 경우 최소한 15세기 이전부터 떡국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쌀이 지금보다 훨씬 귀했기 때문에 ‘귀한 쌀로 만든 음식을 먹는’ 행위는 농경사회에 어울리는 기념방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의례의 경우 사람들의 인식만큼 오래된 전통은 아니라고 합니다. 김 연구원은 “의례는 다수가 인식하는 것만큼 한국의 유구한 전통문화가 아니며, 이 의례는 18세기 들어 대다수 한국인에게 수용됐다”며 “5000여 년의 한민족 역사에 비추어 결코 길다고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세시풍속을 다룬 19세기 ‘동국세시기’ 같은 문헌에도 추석 차례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차례와 제사의 규모가 크게 확대되고 엄격해진 것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라고 역사학계는 봅니다. 조선 땅 전체가 잿더미가 되면서 남성 사대부 지배계층의 정치적 정당성은 흔들리게 됐습니다. 그러나 당시 지배층은 이 위기를 개혁으로 돌파하기보다는 ‘더 강력한 유교 질서’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기존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교조적·원리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동원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흔한 현상입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중앙 정부에서는 예법을 놓고 치열한 ‘예송 논쟁’이 벌어졌고, 전국 각지에 여성의 절개를 강조하는 ‘열녀문’이 세워졌습니다. 양반 족보를 사고팔면서 양반의 수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제사문화가 부담스러운 수준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입니다. 전쟁 이전에는 ‘제사는 그 집안의 일’이라며 며느리는 참여하지 않고 딸이 참여하며, 가정 형편에 맞는 수준으로 음식을 차렸다고 합니다.

김 연구원은 어차피 그리 전통적이지도 않은 과도한 차례 관행을 없애야 명절이라는 전통문화가 계승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군다나 시대가 민주화되고 성평등 인식이 높아지고 있는데, 여성에게만 과도한 가사노동을 시키는 차례는 전통 계승에 오히려 방해된다고도 했습니다.

김 연구원은 “전통을 계승하는 방향성은 의례를 생략하고 절식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며 “아예 지내지 않는 것보다는 시대에 맞게 변용해 전통을 유지하려는 마음의 정성이 중요하며, 의례는 마음, 즉 정성이 우선인 것은 조선시대 유교 의례의 전범인 ‘가례’의 가르침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최영갑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차례 간소화’ 방안을 발표 후 간소화 방안대로 차린 차례상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최영갑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위원장(왼쪽 두 번째)이 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차례 간소화’ 방안을 발표 후 간소화 방안대로 차린 차례상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유교 전통문화를 보존해 온 성균관도 최근 과도한 차례상에 부정적인 의견을 냈습니다.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는 지난 5일 기자회견을 열고 “예의 근본정신을 다룬 유학 경전 ‘예기’의 ‘악기’에 따르면 큰 예법은 간략해야 한다(대례필간)고 한다”며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음식의 가짓수에 있지 않으니 많이 차리려고 애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차례상 간소화를 제안했습니다.

경향신문 자료 사진

경향신문 자료 사진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2018년 공개한 ‘서울시 성평등 생활사전-추석특집’을 보면, 응답자 절반 이상(53.3%)이 명절 때 겪는 성차별 사례 1위로 “여성만 상차림을 시키는 가사분담”을 꼽았습니다. 지난 1월 인크루트가 성인남녀 84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94.3%가 차례상 음식의 간소화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있습니다. 과한 허례허식에 집착하느라 가족 구성원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간소한 음식과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 보면 어떨까요? 가족과 함께 읽어볼 만한 글을 몇 편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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