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남겨진 공범들(1)

‘n번방과 다르다’는 착각···성착취물 찾는 그들이 ‘지옥’ 만드는 주범

박사·갓갓 사라져도···수요 끊이지 않아

유포자, n번방 아니라며 시청자 끌어모아

수익구조·플랫폼 다양화 교묘해진 수법

성착취물을 유통하는 텔레그램 대화방에 올라온 공지. 텔레그램 캡쳐

성착취물을 유통하는 텔레그램 대화방에 올라온 공지. 텔레그램 캡쳐

‘2019년도 텔레그램에서 활동하다, n번방 이슈 논란으로 잠적 후 다시 활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n번방처럼 그런 방은 절대 아닙니다. 현재 자료는 140TB(테라바이트) 정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위 한 마디로 설명 더 안 하겠습니다.’

지난 2일 제보를 통해 확보한 링크를 타고 텔레그램 대화방에 입장하자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공지다. n번방은 닉네임 ‘갓갓’(본명 문형욱)이 2019년 2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운영한 텔레그램 성착취 대화방을 뜻한다. 지난해 항소심 재판부는 문형욱에게 1심과 같은 34년형을 선고했다. 갓갓의 n번방은 사라졌지만 법망을 빠져나간 수많은 가담자는 디지털 공간에 남아 또 다른 ‘지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최근 다수의 미성년자를 착취한 가해자 ‘엘’(가명)의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가 언론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수사기관을 비웃기라도 하듯 엘은 8개월째 도피 중이다. 이번 사건에 붙은 ‘제2의 n번방’이라는 수식어는 n번방과 같은 디지털 성착취 사건이 ‘또 하나’ 드러난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하지만 지난해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은 피해자는 총 6952명으로 전년 대비 약 1.4배 증가했다. n번방 사건 이후에도 디지털 공간에는 수 많은 n번방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뜻이다.

n번방 당시 130개의 성착취 대화방에는 26만명(중복 추산)에 이르는 ‘공범’이 있었다. 이들은 지금도 디지털 공간에 남아 주범들이 생산한 성착취물을 소지·판매·재유포하고 있다. 경향신문은 지난 3년 간 ‘n번방 근절’을 약속한 정부 기관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무엇인지 3회에 걸쳐 진단한다. 첫회에선 디지털 성착취의 실태를 다뤘다. 피해자들이 증언하고 기자들이 직접 목격한 디지털 성착취 범죄의 현주소다.

100명의 시청자, 100명의 공범들

[n번방, 남겨진 공범들①]‘n번방과 다르다’는 착각···성착취물 찾는 그들이 ‘지옥’ 만드는 주범

‘○○이, 하이.’ 모든 것은 트위터 일대일 쪽지(DM)로 전달된 이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중학생이자 성소수자인 A군은 트위터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일상을 올리는 계정을 익명으로 운영했다. 계정에는 A군이 익명성을 전제로 남긴 사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남몰래 운영하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A군의 실명을 언급하며 인사를 걸어온 상대방을 차마 무시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익명의 상대 ‘케이(가명)’는 A군이 사는 곳, 학교, 지인 SNS 계정을 모두 꿰고 있었다. 그는 A군의 성 정체성과 SNS에 게시한 사진을 약점으로 잡았다. 자신의 말만 잘 들으면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지난 1월 텔레그램에 한 대화방이 개설됐다. 대화방 이름엔 A군의 트위터 닉네임이 욕설과 함께 적혔다. 그날부터 이틀에 거쳐 A군은 케이의 지시에 따라 총 8차례 성착취물을 올렸다.

A군에 따르면 대화방엔 최대 100여명의 사람이 몰렸다. 케이뿐만 아니라 방에 접속한 이들 모두 A군에게 성착취물을 올릴 것을 강요했다. 잠이 든 A군이 약 6시간 가까이 응답이 없자 케이는 “주소를 공개하겠다”는 협박 메시지를 남겼다. 협박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대화방 참가자들은 환호했다. A군의 신상을 공개하면 직접 찾아가 성폭행 영상을 찍어 ‘진상’하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지옥같던 시간은 케이가 돌연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사라지며 끝이 났다. 케이가 사라진 후에도 일부 참가자는 A군에게 신체 부위를 찍어 올릴 것을 강요했다. “케이가 나에게 네 신상을 공유했다”는 식의 협박이 이어졌다. A군이 이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자 대부분은 ‘신작’을 찾아 방을 떠났다.

오랜 고민 끝에 인터뷰에 응한 A군은 당시를 회상하며 “부모님에게 성 정체성을 알리겠다는 협박도 무서웠지만, 돌이켜보면 사람들의 반응이 가장 무서웠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은 만족을 모르는 것 같았다. 영상과 사진을 올릴 때마다 더 심한 요구가 이어졌고,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에 홀렸던 것 같다”고 했다.

최근 ‘엘’로 불리는 가해자의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가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보며 A군은 악몽 같은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케이와 엘은 다른 인물로 추정된다. 케이는 A군이 여러 SNS 계정을 비슷한 아이디로 가입해 사용 중인 점을 이용해 신상을 알아낸 것으로 보인다. 두 가해자는 트위터 등을 통해 미성년 피해자를 유인하고 약점을 잡아 협박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A군은 이용 중이던 SNS 계정을 모두 탈퇴한 상태다.

A군은 지난 6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성착취 범죄 피해자가 된 사실에 대해선 담당 의사와 부모님에게 털어놓지 못했다고 했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도 없다고 했다. “그냥 다 잊어버리고 싶어요. 제가 그 방에 올린 사진이랑 영상이 어딘가 떠돌고 있다는 생각만 하면 죽고 싶고요. 대화방에 넘버링(숫자)이 붙어 있었거든요. 저 말고 다른 피해자도 있을 수 있다는 거라서 그게 지금은 제일 걱정돼요.”

보도가 나오자 ‘물갈이’가 시작됐다

‘텔레그램 성착취’와 관련한 연속 보도가 나온 직후인 지난 2일 새벽 성착취물을 유통하는 텔레그램 대화방에 ‘회원 물갈이를 시작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텔레그램 캡쳐

‘텔레그램 성착취’와 관련한 연속 보도가 나온 직후인 지난 2일 새벽 성착취물을 유통하는 텔레그램 대화방에 ‘회원 물갈이를 시작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텔레그램 캡쳐

A군의 사례처럼 n번방 사건 이후 수년이 지난 지금도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는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여성이지만 남성 청소년 피해자도 적지 않다고 관계 기관들은 전했다. 청소년 성상담 및 성교육 활동단체 ‘탁틴내일’ 이현숙 대표는 12일 “성폭력은 권력 관계를 이용해 발생한다는 점에서 여성, 아동·청소년,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피해가 크다”고 말했다.

약자를 착취해 제작된 영상물은 조직화, 체계화된 ‘유포방’으로 모인다. 경향신문은 지난 1일 ‘대피소 서버’를 네 차례 거쳐 한 성착취물 유포방에 잠입했다. 대피소는 경찰 수사로 인한 ‘방폭’(서버 제거)에 대비해 개설하는 별도의 채널을 뜻한다. n번방 사건 이후 경찰 수사를 회피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의 하나이다. 대화방 운영자들은 이 대피소를 통해 대화방 폭파와 재개설을 반복한다.

‘이 시간부터 회원 물갈이 시작합니다.’ 2일 오전 2시 회원 1200명이 모인 텔레그램 대화방에 공지가 떴다. ‘엘 성착취 사건’과 관련한 연속 보도가 나온 이후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대검찰청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엄정대응을 지시했다”고 알려진 다음 날 새벽이었다. 이날 오전부터 회원 수는 줄어들기 시작해 다음 날인 3일 800명대로 감소했다.

물갈이가 시작된 후에도 새로운 가입자는 트위터·인스타그램 등 각종 SNS로 유포된 링크를 따라 꾸준히 유입됐다. 12일 오전 10시 기준 990여명의 참가자가 상주했다. ‘진짜’ 회원으로 인정받으려면 운영자가 안내한 성인 사이트의 유료 회원가입을 인증해야 했다. 인증을 마친 회원에게는 이들이 소개하는 VIP방(상위방)으로 가는 링크가 제공됐다. 과거 n번방 주범들이 텔레그램 가입자들을 상대로 상품권, 가상화폐 등을 지급받은 것과 달리 성인 사이트와의 제휴를 통해 금전적 이득을 취하고 가입자를 유치해주는 형태로 수익 구조가 진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텔레그램에 대한 수사기관의 관심이 집중되자 플랫폼을 다양화한 것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운영자는 지난 5일 “여러 가지 사정상 디스코드와 혼합 운영을 준비 중”이라며 “운영 가동률은 디스코드 60%, 텔레그램 40%가 될 예정이다. 디스코드에서 더 나은 자료 관람이 가능하다”는 공지를 남겼다. 디스코드는 게임 특화형 인터넷 채팅 메신저로, n번방 사건 이후 텔레그램이 성착취 동영상 유통의 온상으로 지목받자 이용자들이 옮겨간 해외 메신저 중 하나다.

운영자는 ‘우리는 n번방과는 다르다’는 말을 반복했다.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n번방 사건과 무관하다고 가입자들을 안심시키려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유통하는 영상 다수는 불법 촬영물이나 미성년자 성착취물이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된 9일 운영진은 “디스코드 운영을 시작했다. 들어와서 무료 자료를 보고 가라”는 공지를 올렸다. “텔레그램 업로드는 추석 끝나고 진행한다”는 안내도 덧붙였다. 이 공지의 조회수는 이틀 만에 1만2000회를 기록했다.

‘n번방과 다르다’는 착각이 만든 지옥

[n번방, 남겨진 공범들①]‘n번방과 다르다’는 착각···성착취물 찾는 그들이 ‘지옥’ 만드는 주범

취재를 통해 확인한 디지털 성착취 범죄 실태는 수법이 조금 더 교묘해졌을 뿐 n번방 사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착취물을 제작하는 ‘주범’은 피해자의 약점을 잡아 성착취물 생산을 강요했고, 이렇게 생산된 사진과 영상은 해외에 서버를 둔 SNS를 통해 유통됐다. 디스코드에는 현재 동시접속자 수가 수만명에 이르는 성착취물 공유방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일반 가담자들은 새로운 영상물을 얻기 위해 성착취물을 제작하는 주범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기도 한다. 성착취물을 소지하거나 시청한 것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개의치 않는 것이다. 성착취 대화방 운영자들도 시청자 집단을 범행에 활용했다. 대표적인 예가 ‘실검 챌린지’다. 운영진의 공지에 따라 포털사이트 등에서 성착취물 피해자의 이름을 수회 검색하는 것으로,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를 통해 텔레그램 대화방을 홍보하는 일종의 ‘선전전’이다.

실검 챌린지에 동참한 일부는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2019년 텔레그램에 개설된 ‘박사방’에 가입했던 B씨는 운영진의 공지에 따라 성착취물 피해자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순위에 오르게 하는 실검 챌린지에 동참했다. 이 시기 박사방에서는 아동·청소년과 성인 여성에 대한 성 착취물이 제작·유통되고 있었다. 재판부는 B씨의 실검 챌린지 참여 행위에 대해 음란물 유포 방조죄를 인정했다. 청주지방법원 제천지원 정경환 판사는 지난해 3월 B씨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실검 챌린지와 유사한 선전전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텔레그램과 디스코드 대화방에서는 시청자들에게 링크 유포를 유도하는 공지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일종의 ‘다단계식’ 운영으로, 신규 참여자를 많이 끌어올수록 높은 수위의 영상물이 공유되는 ‘상위방’ 입장이 용이하다. 성착취물의 생산과 유통 구조를 떠받치는 다수의 시청자는 소비자인 동시에 성착취물의 선전 매체인 셈이었다.

조주빈 등 n번방 주범들이 경찰에 붙잡힌 뒤에도 성착취물은 여전히 거래 대상으로 SNS에 유통됐다. C씨는 n번방이 언론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이후인 2020년 2월 웹하드 내 비밀클럽에 후원금을 지급하고 가입했다. C씨는 웹하드에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544개가 포함된 압축 파일을 내려받았다. 인천지방법원 김이슬 판사는 지난해 4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음란물 소지) 혐의로 C씨게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수요가 끊이지 않으니 디지털 성착취물 피해자도 매년 수천명에 달하고 있다. 올해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발표한 ‘2021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센터)의 지원을 받은 피해자 수는 6952명으로 집계됐다. 여성은 5109명(73.5%), 남성은 1843명(26.5%)이었다. 센터의 피해지원 상담과 피해 촬영물 삭제지원, 수사·법률 및 의료 지원 연계 건수는 지난해에만 18만8083건에 달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n번방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성 착취물 제작자에 버금가는 책임이 있다”고 했다. 조주빈을 비롯한 n번방 운영진이 잡혀도 성 착취물 범죄가 양산되는 이유는 막대한 수요를 만드는 성착취물 시청자와 소지자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 대표는 “성착취물 이용자들은 자신들이 제작자와 다를뿐더러 피해자의 권리를 침해하지는 않는다고 합리화한다”며 “침묵하는 방관자들이 디지털 성착취 문제를 근절하지 못하게 하는 주원인”이라고 비판했다.

텔레그램·트위터·디스코드 등 익명성을 앞세운 플랫폼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언급된 플랫폼 모두 성 착취물이 유포되는 주요 창구로 활용된다. 이 대표는 “익명으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플랫폼 모두 성 착취물 유포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한다”며 “성 착취물 제작자들이 플랫폼을 통해 미성년자를 비롯한 피해자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플랫폼 규제와 관련한) 심화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악성댓글은 삭제·신고조치 될 수 있고 기자 개인에게 인신공격성 e메일을 보낼 경우 발신자를 추적해 민·형사상의 조처를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당하거나 불법 촬영물 삭제 지원이 필요한 경우 여성긴급전화 ☎1366을 통해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카카오톡에서는 ‘1366’을 검색해 ‘여성폭력 사이버 상담(women1366)’과 친구 맺은 후 1:1 채팅으로도 상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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