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그런 일 당할 수도 있지”…사회는 스토킹 피해자들에게 가혹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추모공간이 마련된 서울 중구 신당역 화장실에서 지난 20일 시민들이 쓴 추모 메시지가 붙어 있다./한수빈 기자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추모공간이 마련된 서울 중구 신당역 화장실에서 지난 20일 시민들이 쓴 추모 메시지가 붙어 있다./한수빈 기자

‘누구보다도 이 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은 제가, 합의 없이 오늘까지 버틴 것은 판사님께서 엄중한 처벌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피해자의 대리인 민고은 변호사는 지난 20일 고인의 빈소 앞에서 피해자가 쓴 ‘마지막 탄원서’ 내용 일부를 읊었다. ‘엄중한 처벌’을 기대하며 버텨온 피해자는 결국 보호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민 변호사는 “사건을 진행하면서 수사기관과 법원 모두 피해자 보호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변호사로서 큰 한계를 느꼈다”며 “수사기관과 법원에서 사건 처리할 때 사건 그 자체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도 헤아려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과 전화 혹은 메신저로 만난 다른 스토킹 피해자들도 사법 절차를 밟으면서 마주친 ‘벽’을 호소했다. 어떤 피해자는 “별 거 아니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경찰을 마주했다. 실효성 없는 잠정조치와 구속영장 기각에 공포에 떠는 피해자도 있다. 스토킹 피해 이후 주변 인물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경우도 있다.

경찰, “인기 있으면 그럴 수 있지”…신고 단계부터 ‘뒷골’

“아가씨, 어리고, 학교 다니면서 인기 있고 하면 그런 일 당할 수도 있지.”

지난 21일까지 기자와 세차례 통화한 20대 여성 A씨는 2020년 스토킹 피해를 경찰에 신고할 때 수사관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A씨는 대학 재학 중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매일 학원 앞에 찾아와 자신을 지켜보는 남성이 있었다. 알고보니 같은 학과 선배였다. 그는 학과에 A씨와 자신이 사귄다는 소문도 냈다.

A씨는 “경찰에 신고해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나 덜 위험하고, 생명에 직접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스토킹에 대한 시각을 고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A씨는 스토킹을 한 사람을 다시 마주칠까 두려워 휴학했고, 현재 해외 유학 중이다.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인 서혜진 변호사는 22일 “경찰이 스토킹 피해자에게 ‘그 사람이 좋아해서 그런거 아니에요’ ‘아가씨가 예뻐서 그런거 아니에요’ ‘이거는 스토킹이라고 볼수 없지 않나’ 등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발언을 한 사례가 있다”고 했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희생자를 위한 촛불 추모제가 공공운수노조 주최로 21일 서울 중구 신당역 앞에서 열리고 있다. /김창길기자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희생자를 위한 촛불 추모제가 공공운수노조 주최로 21일 서울 중구 신당역 앞에서 열리고 있다. /김창길기자

“회계사라서” “면식범이라서”…구속영장 기각률 32.6%

창원지법 진주지원은 지난 21일 헤어질 것을 통보한 여자친구의 집에 배관을 타고 침입해 폭력을 행사한 20대 남성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는 스토킹 처벌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저질렀지만 법원은 “도주와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며 구속하지 않았다.

경찰이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를 받는 피의자의 구속영장을 신청해도 10건 중 3건은 법원이 기각한다.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찰이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8월까지 신청한 스토킹 범죄 관련 구속영장 377건 중 32.6%(123건)는 법원에서 기각됐다.

지난 18일 기자와 e메일 인터뷰한 30대 여성 B씨는 과거 교제하던 남자로부터 수년 간 스토킹 피해를 당했다고 했다. 전화와 문자, 카카오톡 메시지로 괴롭힘을 당하고 성폭행 피해까지 당할 뻔 했지만 법원은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기각 사유는 ‘피의자가 회계사여서’ ‘면식범이어서’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어서’ 등 3가지였다. B씨는 “회계사는 구속수사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인지 황당했다”며 “또 스토킹은 당연히 면식범이 저지른다”고 했다.

사법조치에도 보호 못받는 피해자들

스토킹 피해자들은 경찰의 보호 조치도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날 통화한 20대 여성 C씨는 2017년 교제하다 결별한 남성이 한달 넘도록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자시을 스토킹했다고 말했다. 마주치면 C씨를 자신의 차에 억지로 태웠고, 하차하려 하면 폭행하기도 했다. 금융정보를 알아내 결제내역을 토대로 C씨를 추적하기도 했다.

C씨는 경찰의 신변보호조치를 받았지만 여전히 위협을 느꼈다고 했다. 가해 남성이 인근에 와 신고해도 현장에 나온 경찰은 “물리적인 폭력이 일어나거나 큰 사건은 없었다”며 가해자를 귀가조치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C씨는 “교제하다가 헤어진 일에 대해서 잔감정 싸움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라며 “당시 폭행 등 혐의로 고소했지만 검찰로 사건이 넘어가면 ‘대질 조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합의로 끝냈다”고 말했다.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6월까지 접수된 범죄피해자 안전조치 3770건 중 1940건(51.4%)은 귀가조치의 일종인 ‘현장조치’로 끝났다. 구속으로 이어진 것은 90건(2.38%)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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