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깬 여성 경찰관들 “꽃길 아닌 돌밭이지만 경찰이라 행복하다”

이유진 기자    김나연 기자

마약 여성, 알고보니 약물 강간 피해자

여성 수사관 판단력 필요한 순간 있어

여경이라서 피했다 손가락질 받을까봐

부상 각오하고 피의자 더 가까이 가기도

‘대림동 주취폭력’ 편견 겪은 이선영 경사

“현장의 후배들, 나를 보고 힘내길 바라”

9년차 경찰 이선영 경사(왼쪽)와 5년차 경찰 강승연 경장이 지난 15일 서울 중구 정동에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9년차 경찰 이선영 경사(왼쪽)와 5년차 경찰 강승연 경장이 지난 15일 서울 중구 정동에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13.6%. 지난해 기준 경찰공무원 14만835명 중 여성 경찰관의 비율이다. 2000년만 해도 1%에 불과하던 여성 경찰관 비율은 2014년 처음 10%로 늘어났다. 온라인상에는 여성 경찰관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이 난무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가 세상에 전해진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 사회에 여경이 꼭 필요하냐고 묻는 당신을 위한 여성 경찰 안내서.’ 경찰의 날인 21일 출간되는 책 <여성, 경찰하는 마음> 첫 문장이다. ‘여경 무용론’을 증폭한 ‘대림동 주취폭력 사건’ 당사자인 이선영 경사를 비롯한 25년차 선배 경찰, 3년차 새내기 경찰 등 경찰젠더연구회 회원 23명이 자신이 경험한 ‘경찰 세계’를 글로 담담하게 풀어냈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이선영 경사와 강승연 경장을 만났다. 각각 9년차, 5년차 경찰인 이들은 ‘풀뿌리 치안’의 핵심으로 불리는 지구대에서 근무 중이다. ‘수사관K’라는 필명으로 집필에 참여한 10년차 김모 수사관도 전화로 인터뷰에 참여했다.

■‘영화 속 형사’가 비록 환상이었을지라도

미근동 경찰청 앞에 경찰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강윤중 기자

미근동 경찰청 앞에 경찰기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강윤중 기자

김 수사관은 중학교 시절부터 영화 속 형사 캐릭터를 보며 경찰을 꿈꿔온 ‘합기도 소녀’였다. 2013년 꿈에 그리던 경찰에 입직했지만 형사과의 문턱은 높았다. 3번을 지원한 5년 만에야 형사과에 입성할 수 있었다. 형사과에 발을 디딘 첫날 선배 형사는 팀이 해결 중인 사건 개수를 보여주며 “폭탄 터뜨리고 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란 뜻이었어요. 부담이 확 됐죠.”

여자 당직실이 없어 사무실 구석에 설치된 가림막 뒤 간이침대에서 쪽잠을 자며 당직을 섰다. 신고가 들어오면 즉시 출동해야 했기 때문에 사무실을 떠날 수 없었다. 김 수사관은 “형사과에 여자 형사가 하나둘 늘어난 뒤엔 여자 당직실이 생겼다”고 말했다. 첫 사건으로 ‘데이트 폭력 사건’을 맡았다. 집요한 수사로 단순 주거침입 사건으로 신고된 사건 이면에 성폭행 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피의자에게 구속영장이 발부되던 날, 피해자의 “형사님, 고맙습니다” 한 마디를 지금까지 가슴에 품고 산다고 했다.

이후 마약범죄수사과 등을 거친 김 수사관은 “형사로서의 근무 경력을 인정받은 듯해 내심 다행이었다”고 했다. 그는 “체력적인 면에선 분명 뒤처지는 부분이 있지만, 특히 여성 범죄가 증가하는 상황에선 여성 수사관의 판단력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마약과에서 일할 때 여성 피의자들을 많이 봤는데, 처음엔 피의자로 입건되지만 나중엔 데이트 강간 약물 피해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무조건 여자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최대한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에 임하는 편이에요.”

서울 일선서 수사과에 근무 중인 김 수사관은 10년의 경찰 생활을 돌아보며 “사건은 영화처럼 한 번에 해결되지 않더라”며 웃었다. 그는 “수사를 위해 전화를 걸면 ‘보이스피싱 아니냐’며 끊어버리는 일도 부지기수”라며 “그럴 땐 공권력의 현실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쉽진 않아도 보람이 있는, 경찰은 좋은 직업”이라고 했다. “사건 하나를 해결하면 가슴에서 돌덩이가 내려가는 느낌이 있어요. 오랜 기간 꿈꿔왔던 성취감이죠. 피해자가 보낸 ‘감사하다’ 문자 한 통으로 내일을 사는 직업 같아요.”

■불붙은 여경 무용론, ‘함께’로 이겨낸 순간들

경찰 내 여성 경찰 모임인 경찰젠더연구회 회원 23명이 집필한 글 32편이 실린 책 <여성, 경찰하는 마음> 표지. 생각정원 제공

경찰 내 여성 경찰 모임인 경찰젠더연구회 회원 23명이 집필한 글 32편이 실린 책 <여성, 경찰하는 마음> 표지. 생각정원 제공

“댓글을 보고 느꼈어요. 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구나. 자포자기 심정이었어요.” 2019년 5월 불거진 ‘대림동 주취폭력 사건’ 논란의 당사자인 이선영 경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 구로동에서 남녀 경찰관이 술 취한 남성을 체포하는 과정을 담은 이 영상은 ‘대림동 여경 사건’이란 이름으로 온라인에 확산했다. “대응에 문제가 없었다”는 서울경찰청의 공식 해명에도 ‘여경 무용론’은 빠르게 번져갔다. 쏟아지는 보도에 한동안 텔레비전을 켜지도 못했다. “조롱과 비난으로 뒤범벅된 끔찍한 댓글”은 이 경사의 머릿속에 영원히 박제됐다.

그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뻗쳐온 연대의 손길이 있었다. ‘대한민국에 만연한 공권력 경시 풍조에 경종을 울려야 할 사건이 여성 경찰에 대한 혐오 확산으로 오용돼선 안 된다.’ 경찰젠더연구회가 낸 성명이었다. 회원 만장일치로 채택된 이 성명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이 경사에게 큰 힘이 됐다. “이런 조직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네 탓이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힘이 됐죠. 진짜 문제는 경찰을 폭행한 주취자였는데, 이에 대해선 누구도 분노하지 않았어요.” 동료 지구대원들의 배려도 그를 버티게 한 힘이 됐다.

강 경장도 사건 당시를 또렷이 기억했다. 하루 약 100건씩 사건·사고가 떨어지는 서울 마포 홍익지구대에서 2년차 경찰관으로 일하던 때였다. 여경 비난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오히려 피의자랑 거리를 더 좁히게 됐다”며 “여경이라서 피했다는 말을 들을까 ‘차라리 맞고 말자’란 생각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동료 경찰 중에는 몸을 다치면서도 시선이 두려워 끝내 지원 요청을 하지 못한 이도 있었다.

새내기 경찰에게 버팀목이 된 건 이지은 지구대장(현 중앙경찰학교 교무과장)을 비롯한 선배 경찰관들이었다. 당시 홍익지구대엔 이 지구대장을 포함해 72명의 경찰 중 여성이 9명 이었다. 강 경장은 “젠더연구회도 대장님 권유로 가입하게 됐다”며 “힘들 때 많이 의지했다. 남녀를 떠나 ‘이지은 대장이 말한 건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좋은 리더는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꽃길 아닌 돌밭이지만, 경찰이라 행복하다

5년차 경찰 강승연 경장(왼쪽)과 9년차 경찰 이선영 경사가 지난 15일 서울 중구 정동에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5년차 경찰 강승연 경장(왼쪽)과 9년차 경찰 이선영 경사가 지난 15일 서울 중구 정동에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강 경장은 범죄심리학에 눈을 뜨면서 경찰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2018년 신임 순경 딱지를 떼고 지구대, 본청 내근직 등을 거쳐 지난 8월 “힘들게” 지구대로 돌아왔다. 강 경장은 “신고를 나가보면 매뉴얼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다”며 “힘보다는 상대가 원하는 걸 알아채고 갈등을 중재하는 능력을 필요로 할 때가 많다. 남이 하면 1시간 걸릴 일을 30분 만에 해결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중앙경찰학교 시절 부당한 일을 겪으며 “여자 동기들과 함께 강당에서 싸워가며 항의했다”는 그는 “후배들에게 ‘너무 예쁨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종종 한다”고 했다. “신입 여직원 대상 간담회에서 한 경찰관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 같다’고 했어요. 경찰이 하는 일은 사람에 따라 능력치가 달라지는 거지 성별에 따라 다른 건 아니라고 답했어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파요.”

“고등학교 3년 내내 생활기록부 장래희망란에 경찰을 써냈다”는 이 경사는 여전히 자신의 직업을 사랑한다. 최근에 보람을 느낀 일을 묻자 “사람 생명을 살렸을 때”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제는 멀리서도 번개탄 냄새를 알아챈다는 그는 “모텔에서 자살 시도를 했던 20대 여성을 구한 일이 있었는데, 죽은 줄 알았던 여성의 정신이 돌아왔을 때 ‘아, 또 한 사람 살렸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경사는 현장에서 분투하는 후배들에게 “저를 보고 힘을 냈으면 한다”고 했다. “그냥 제 존재를 알리고 싶어요. ‘아, 저 사람도 버텼구나’ 생각하면 조금은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사건 이후 무탈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하는 것이 목표가 된 그는 경찰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런 당부를 남겼다. “여경의 삶은 결코 꽃길이 아니에요. 돌밭인 걸 알고 들어오셨으면 해요.”

강 경장은 “누군가 왜 경찰조직에 남아 있냐고 물으면 ‘우리 사회에 여경이 필요하니까’라고 답한다”고 했다. 그는 “특히 여성 관련 범죄에서 여경은 필수적인 존재”라며 “없으면 다른 지구대에서 불러와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강 경장의 꿈은 좀 더 높은 곳을 향했다. “실력으로 인정받는 경찰이 되고 싶어요. 여러 업무에 지원될 때 불만이 생기기보다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어 행복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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