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동료는 못 팔아넘기겠더라”···똑같이 끌려갔지만 선택은 달랐다

이홍근 기자

80년대 녹화공작 피해자 정화용씨

첩보 수집 강요받자 ‘허위 보고서’

‘프락치 의혹’ 김순호 국장과 대조

“국가폭력에 의해 젊은이들 희생

김 국장의 인노회 이후 활동과

녹화공작 피해 분리해서 봐달라”

1984년 1월, 휴가증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정화용씨(61)는 종로3가 공중전화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정씨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 학번 위 운동권 선배를 만나 성균관대 학생운동 동향을 파악하는 것. 만나서 술 한잔하자는 말 한마디면 군의 고문도, 폭행도 없을 터였다. 얼음장 같던 전화기가 따듯해질 때까지 전화기를 들었다 놓기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정씨는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나 휴가 나왔어. 이따 만나자.” 정씨는 전화를 마치고 부스 앞에 쪼그려서 한참을 울었다.

정씨는 이날 선배를 만나지 않았다. 첩보 활동 보고서도 모두 거짓으로 적었다. 이 때문에 곡괭이 자루로 폭행당한 정씨는 지금까지 왼쪽 무릎을 잘 쓰지 못한다. 그러나 시큰거리는 무릎보다 더 아픈 건 그날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다. 끝까지 동료를 팔아넘기지 않은 정씨에게도 신군부의 녹화공작사업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녹화공작사업이란 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가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을 군에 강제 징집한 뒤 시위계획 첩보 등을 수집하도록 강요한 일을 말한다.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이 지난 8월2일 서울 종로 정부서울청사 내 경찰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경찰국은 총괄지원과·인사지원과·자치경찰지원과 등 3과 16명으로 구성된 가운데 이 중 12명은 경찰 출신이다. 이준헌 기자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이 지난 8월2일 서울 종로 정부서울청사 내 경찰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경찰국은 총괄지원과·인사지원과·자치경찰지원과 등 3과 16명으로 구성된 가운데 이 중 12명은 경찰 출신이다. 이준헌 기자

정씨의 존안자료를 보면 정씨는 교내 서클 ‘농우회’에서 시위 활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1983년 군에 끌려갔다. 농우회는 <역사란 무엇인가>와 같이 당시 불온서적으로 낙인찍혔던 책들을 읽고 토론하던 서클로, 시위를 조직하고 불온가요를 불렀다는 이유로 보안사의 감시 대상에 올랐다.

농우회에서 시위를 조직하는 역할을 맡았던 정씨는 휴학 처분을 받고 군에 끌려갔다. 경찰관과 학교 관계자가 찾아와 자진 입대에 동의한다는 서류에 지장을 찍으라고 협박했다. 정씨가 거부하자 경찰관은 “너 이거 안 찍어도 어차피 끌려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함께 강제징집 위기에 처한 후배 두 명을 구제하는 조건으로 정씨는 서류에 지장을 찍었다.

정씨의 특수학변자 활동결과보고서.

정씨의 특수학변자 활동결과보고서.

자대에서 소총수로 복무하던 1984년 1월10일, 정씨는 느닷없이 휴가를 명령받았다. 휴가를 신고하러 찾은 대대장은 측은한 얼굴로 “군 생활 잘 하고 있는데 왜...”라며 말을 흐렸다. 부대 밖을 나서자마자 정씨는 알 수 없는 지프차에 실려 보안사로 끌려갔다.

정씨 존안자료 갈무리.

정씨 존안자료 갈무리.

보안사는 정씨의 존안자료에 “심사기간 중 담당관과의 상호 이념토론을 통해 재학시 포지했던 좌경이론의 모순점과 허구성을 깨닫고 과거 무분별했던 소행을 깊이 인식함으로써 차후 좌경활동에 일체 관여치 않음은 물론 후배들을 적극 선도할 의사를 표명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보안사 담당자는 영하 14도의 날씨에 김씨의 옷부터 벗겼다. 시멘트 바닥에선 냉기가 올라왔다. 정씨는 “첫날 가자마자 얼굴과 다리를 맞았다”고 말했다. 폭행 후 군은 갱지를 가져다놓고 정씨의 생애와 학생운동 가담 경위를 적게 했다. 정씨는 태어날 때부터 보안사에 앉게 된 당시까지의 일을 모두 적었다. 작성이 끝나면 똑같이 빈 갱지가 정씨 앞에 놓였다.

정씨는 7박8일간 똑같은 생애보고서를 작성했다. 앞서 작성한 내용과 토씨 하나 다르면 추궁과 협박이 이어졌다. 첫 진술 당시 정씨는 군과 경찰이 알 것 같은 정보만 추려서 진술하고 중요한 정보는 가렸다고 한다. 암기와 복기가 이어졌지만 8일간 잠을 한 숨도 못 잔 탓에 점점 의식은 흐려졌다. 정씨는 “당시를 생각하면 술을 마신 것처럼 기억이 희미하다”면서 “벽에 머리를 박고 자해한 기억이 있다”고 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정씨는 동료를 밀고하지 않았다. 존안자료에 담겨있는 진술서에서 정씨는 “교학처장, 학생처장들과 권고 휴학 처분을 내리지 않기 위해 시간을 갖는 등 바쁜 연유로 토론회를 갖지 못하고 방학을 맞았다” “본인이 농우회의 활동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한다는 내용을 들었고 데모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했고, 그 이후로 논쟁을 끊고 만나지 않았다” “농우회 활동은 거의 정지된 상태였다”고 했다. 동료의 활동을 진술하지 않은 것이다.

정씨의 특변자 활용 결과보고서 갈무리.

정씨의 특변자 활용 결과보고서 갈무리.

순화 작업 이후 정씨는 첩보활동 업무를 부여받았다. 정씨는 “당시 이화여대에서 모임을 갖고 있던 ‘전국복학생협의회’의 활동 내용과 군 입대 전 농우회에 대한 활동 내용을 알아오라고 했다”고 했다. 정씨는 휴가증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성대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양심에 찔려 결국 선배를 만나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각 언론사의 학생운동 관련 신문기사를 짜깁기해 보안사에 보고했다.

허위보고는 고문으로 이어졌다. 정씨는 “보안사에서 권 부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옷을 벗긴 뒤 곡갱이 자루로 폭행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허벅지, 그다음은 발을 맞았다. 권 부장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정씨를 무릎 꿇게 한 뒤, 무릎 사이에 곡괭이를 넣어 밟았다. “빡!”하는 파찰음과 함께 정씨의 무릎은 망가졌다. 정씨는 “이제 정말 죽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며 “죽음을 결심하니 어릴 때부터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고 말했다.

정씨가 고문 피해로 다리를 쓰지 못하자 보안사는 정씨의 무릎에 압박붕대를 감아준 뒤 최전방 부대로 전출했다. 전역 때까지 정씨는 군의 감시를 받았지만 끝까지 동료를 밀고하지 않았다. 1984년 6월27일 작성된 ‘특변자 접촉결과보고’에 따르면 정씨는 “휴가를 나와보니 기말시험이 종료돼 동료 후배들의 귀향 등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아 만날 수 없었다” “농우회는 성낙회로 개명되었으며 지하활동을 지양하고 공개활동을 하고 있으나 과거 운동으로 핵심 회원들이 희생되어 현재 리더가 없이 활동이 부진하다”고 보고했다.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지난 9월7일 열린 ‘밀정의혹 김순호 파면, 녹화공작 진상규명 국민행동 발족’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한수빈 기자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지난 9월7일 열린 ‘밀정의혹 김순호 파면, 녹화공작 진상규명 국민행동 발족’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한수빈 기자

정씨는 프락치 의혹을 받는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의 성대 81학번 동기이자 훈련소 동기다. 정씨가 군에 끌려하고 이틀 뒤 김 국장이 같은 훈련소에 입대했다. 김 국장을 포함해 성대에서 학생운동을 한 동기만 4명이었다. 같은 학교 후배도 있었다. 정씨와 김 국장은 프락치 투입 직전까지 28사단 82연대에서 같은 소총수로 근무했다. 정씨는 “지금 기억으로 전체 훈련소 동기가 한 10명 넘었던 것 같다”며 “훈련소가 끝난 뒤 김 국장과 함께 28사단 82연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 같은 부대에서,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지만 김 국장과 정씨의 선택은 달랐다. 동료를 밀고하지 않고 고문받은 정씨와 달리 김 국장은 성대 서클과 동료들의 동향을 상세히 보고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동료들이 어디서, 어떤 책을 읽었는지, 합숙과 MT 등 방학 활동계획은 무엇인지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국장과 다른 길을 걸은 정씨였지만 정씨는 김 국장을 프락치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정씨는 “김 국장의 인노회 이후 활동과 녹화공작 피해를 분리해서 봤으면 좋겠다”며 “밀정 공작 등의 프레임으로 보기보다는 왜 국가폭력에 의해 젊은 아이들이 희생되어야만 했는지를 봐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프락치를 하지 않았다, 나는 의롭고 다른 사람은 의롭지 않다, 이렇게 나누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 국장은 지난 8월29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하며 정씨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Today`s HOT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황폐해진 칸 유니스 교내에 시위 텐트 친 컬럼비아대학 학생들 폭우 내린 중국 광둥성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한국에 1-0으로 패한 일본
아름다운 불도그 선발대회 지구의 날 맞아 쓰레기 줍는 봉사자들
페트로 아웃 5연승한 넬리 코르다, 연못에 풍덩! 화려한 의상 입고 자전거 타는 마닐라 주민들 사해 근처 사막에 있는 탄도미사일 잔해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