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모래바람보다 거센 ‘한류 열풍’…한국인이라서 ‘인싸’ 대접읽음

조혜임

조혜임의 아라비안 라이프

‘오징어게임’만 유명한 게 아니다

“나 진짜 재밌는 한국 드라마 찾았어! 애 데려다놓고 알려줄게. 잠깐만 기다려줘.”

오전 7시 반, 등굣길에 만난 모로코 출신 무슬림 친구의 눈밑이 퀭하다. 나는 ‘어젯밤에 또 정주행을 하셨구먼’ 하고 속으로 웃었다. 아이를 후다닥 데려다주고 온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왔다 .

아부다비의 대형마트의 외국 식자재 코너에는 한국 식품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아부다비의 대형마트의 외국 식자재 코너에는 한국 식품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제목이 <Young lady and gentleman>인데, 봤어?”

최근 넷플릭스 UAE의 Top10에 진입한 <신사와 아가씨>다. 얼마나 재밌길래 저리 밤을 꼴딱 새우고 봤을까 해서 1화를 틀어보았다가 드라마의 첫 장면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드라마는 어린 시절 일명 ‘방구차’라고 불리며 하얀 연기를 뿜어내던 소독차를 쫓아 뛰는 아이들이 나오는 모습을 시작으로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가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비단 이 친구만이 아니다. 나는 길을 걷다가, 쇼핑을 하다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도 한국 드라마에 푹 빠진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부터 한국 드라마에 대해 말하고 싶어 안달이다. 한국 연예계 소식도 빠삭해서 현빈과 손예진의 결혼 소식도 그들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때론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만나는데, 어디서 한국어를 배웠느냐 물으면 드라마를 보면서 익혔단다. 그들은 한국 연예인의 전매특허인 손가락 하트를 쏘아대며 “사랑해~”를 연발한다. 세상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유명해진 건 단군 이래 처음이지 않을까?

넷플릭스 톱10에 ‘신사와 아가씨’
K드라마에 빠진 현지인 자주 만나
유튜브서 한식 레시피 찾아 도전
동네 마트에도 한국 식재료 넘쳐

심지어는 ‘위장 한류’ 제품 등장
유명 쇼핑몰·백화점에도 입점

한국인이라 얻은 일상 프리미엄
중동서 벌어지는 ‘한강의 기적’

이역만리 떨어진 이 땅에서, 전혀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한국 드라마를 왜 이리도 열심히 보는지 이유가 궁금하던 찰나, UAE의 유력 영자신문에서 ‘Decoding K-drama: Why the world is in love with them?’이라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기사는 두바이에 거주하는 다국적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 이유를 세 가지 정도로 꼽아보았다.

한국 음식을 쉽게 재현할 수 있는 소스류가 인기가 많다.

한국 음식을 쉽게 재현할 수 있는 소스류가 인기가 많다.

첫째, 관객을 극도로 몰입시키는 한국식 로맨스와 가족, 친구 등의 인간관계를 재미있게 묘사하며 다양한 공감 요소를 만들어낸 점. 둘째, 폭넓은 장르와 높아진 퀄리티로 진화하면서 이미 한국 드라마에 대한 장벽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을 순식간에 빨아들였다는 점. 기사는 특히 이 부분에 주목하였는데 답습하던 신데렐라 스토리에서 벗어나 여성을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주체로 표현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스토리텔링으로 공감과 지지를 한꺼번에 얻어냈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아랍에서 행해졌던 강력한 록다운과 동반된 경기침체가 한국 드라마에 빠지게 만드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고 봤다. 평범한 일상을 빼앗긴 채 갑갑한 현실을 마주했던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도전 혹은 따뜻한 위안이, 또는 마음의 도피처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무궁 생활’이라는 콘셉트로 각종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위장 한류 매장.

‘무궁 생활’이라는 콘셉트로 각종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위장 한류 매장.

아랍에서 만난 나의 친구들은 한국 드라마에 흐르는 정서가 서구의 것들보다 깊게 공감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인도나 튀르키예 사람들은 우리만큼이나 끈끈한 가족애를 지니고 있는데, 한국 드라마에서 보이는 가족 간의 갈등과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그네들의 삶과 비슷하다고 한다. 타국에 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며 가족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것이리라.

한국 드라마에 빠져든 이들은 우리의 생활방식과 문화에도 자연스레 젖어들었다. 나의 주부 친구들은 유튜브를 뒤져 한식 레시피를 찾아 요리에 도전해보고 인증샷을 찍어 보내며 솜씨를 뽐낸다. 그들은 드라마 주인공들의 늘씬한 몸매와 빛나는 피부가 한국 음식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다. 최근에는 김치 유산균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춘다는 입소문을 타면서 김장을 같이하자고 부탁해온 친구가 있었는데, 김장을 혼자 해본 적이 없어 자신 없다며 거절을 하니 무척이나 실망하는 눈빛이었다.

위장 한류 매장인 MUMUSO에는 실제 한국 제품을 본떠 만든 제품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위장 한류 매장인 MUMUSO에는 실제 한국 제품을 본떠 만든 제품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한국 음식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동네 마트에 가도 쉽게 한국 식재료를 구할 수 있어 타향살이하는 주부로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동네 대형마트 외국 식재료 코너의 약 30%가 한국 식품으로 채워져 있는데 날이 갈수록 한국 식품의 지분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과 일본 코너에까지 한국 식품이 비집고 들어간 모습을 보며 나 혼자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다가 말을 걸어오는 외국인들에게 주부 10년차의 한식 레시피를 전수라도 하는 날이면 내 어깨 뽕은 마트 천장에 닿을 기세가 된다.

한국 패션과 상품에 대한 관심도 끊임없이 높아지고 있다. UAE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지인은 일 년에 두 차례 쇼핑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곤 했는데 최근 몇 년 팬데믹으로 못 가게 되어 속상하다며 울상을 지었다. 그는 명품 브랜드에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높은 품질과 다양한 디자인이 무척이나 만족스럽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 만나는 많은 여성들이 드라마 주인공들의 빛나는 피부 비결에 대해 궁금해한다. 화장품을 여러 단계로 바르는 ‘10 steps Korean skincare’가 유명해지면서 어떤 제품을 쓰는지 물어오는 사람이 많다. 나의 스킨케어는 아이들에게 아토피 로션을 발라주고 남은 걸 얼굴에 쓱쓱 문지르는 게 전부이지만, UAE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유명한 제품을 몇 개씩 알려주곤 했다. 이달부터는 마스크 쓰기가 전면 해제되어 내 피부가 노출되게 되었으니 조만간 한국 화장품 숍에 가서 스킨케어 제품을 사오리라 다짐해본다.

한국 상품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퍼지면서 몇 년 전부터는 간판에 KR이라고 적은 ‘위장 한류’ 매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UAE의 유명 쇼핑몰뿐 아니라 백화점에도 입점하며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의 품질 인증마크가 단 하나도 붙지 않은 물건들인데도 ‘품질 좋은 한국 상품’으로 착각당한 채 팔려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10여년 전 유럽에서 모진 인종차별을 당했던 나는 ‘한국’이라는 글자에 프리미엄이 붙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하루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길을 걷다가 돌팔매질을 당하기도 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어보이는 짓궂은 아이들이 나를 ‘중국인’이라고 부르며 괴롭혔는데 억울한 마음에 “나 중국인 아니야! 한국인이야!”라고 버럭 소리치니 아이들은 한국이 뭐냐고 되물어왔다. 속된 말로 ‘악플(악성 댓글)보다 무서운 게 무플(아무 반응이 없다는 인터넷상 표현)’이라는 표현처럼 내 조국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 앞에서 나는 더욱더 작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인종차별을 몇 번 겪고 나니 자신감이 떨어지고 늘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2022년 아랍, 길 가다 돌 맞고 다니던 자그마한 동양인이 이제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인싸(Insider, 각종 행사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을 이르는 말)’ 취급을 받는다니.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한류의 인기만큼은 영원해서 우리 아이들 대대손손 세계적인 ‘인싸’로 살았으면 하고 염원한다.

포스트 오일 시대를 대비하는 산유국 사람들은 천연자원 하나 없이 오로지 인적 자원 하나로 부를 일으키고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는 한국인들의 근면함과 미적 감각을 높이 사며 그 원동력을 궁금해한다. 그리고 타인의 일도 내 일처럼 공감하는 국민성에 따스함을 느낀다. 나는 그 두 가지 요소가 잘 보이는 게 바로 ‘K드라마’이고, 그러기에 이토록 사랑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산유국 사람들이 그들의 땅으로 축복을 받았다면,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DNA로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닐까.



[다른 삶]사막의 모래바람보다 거센 ‘한류 열풍’…한국인이라서 ‘인싸’ 대접

▶조혜임

국내외 기업에서 커뮤니케이터로 일했다. 현재는 남편, 쌍둥이 딸과 아랍에미리트연합에 거주하며 현지의 일상을 글과 그림에 담아 소셜 플랫폼에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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