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명이 삭발한 이유…“깍두기 아닌 시민으로 살고파”

정희완 기자

“장애인 권리 보장” 촉구하는 투쟁결의문 낭독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출근길 자하철을 타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그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만평 / 전장연 제공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출근길 자하철을 타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을 그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만평 / 전장연 제공

[주간경향] “사회는 저를 시민 박성준으로 보지 않습니다. 단지 장애인으로 봅니다. 지금도 저는 ‘깍두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다 보니 당연한 권리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 일할 수 있는 권리,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 권리, 이 모든 권리를 보장해주십시오.”

박성준 가치이룸동대문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지난해 7월 28일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 승강장에서 이렇게 말하며 삭발했다. 박 활동가는 어릴 때 소아마비로 장애를 가졌다. 그는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이동수업 때문에 쉬는 시간 10분을 계단 오르는 데 사용했고 화장실이 불편해 최대한 먹지도 않았다. 조회, 체육, 교련 시간에 장애인은 분리되고 배제됐다. 저도 모르게 깍두기가 됐다”고 말했다.

박 활동가는 삭발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관련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만평도 언급했다. ‘다른 반응’이라는 제목의 만평은 시민들이 우영우를 보면서는 “장애인도 함께 살아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출근길 지하철을 타는 장애인을 향해선 “집에만 처박혀 있을 것이지”라고 화를 내는 내용이다. 박 활동가는 “‘장애인과 함께 살아야지’라는 시혜와 동정의 감성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를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라며 “장애인이 온전하게 느꼈던 장애의 무게를 이제는 이 사회가 함께 나눠서 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장애인과 비장애인 177명이 지난해 3월 30일부터 12월 1일까지 141일 동안 머리를 깎았다. 장애인의 권리 보장을 촉구하면서다. 이들은 삭발하기 전 직접 작성한 ‘투쟁결의문’을 낭독했다. 짧은 글이지만 여기엔 삶의 궤적이 담겼다. 이들의 생애는 곧 장애인 차별 및 배제의 역사와 맥을 같이했다. 억울함과 답답함도 묻어났다. 출근길에 지하철을 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집이나 시설에만 있었다면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듣지 않는 세상을 향해 투쟁결의문을 통해 함께 외친 것”이라며 “이들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 안에서는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177명의 투쟁결의문은 인터넷 언론 ‘비마이너’에 전문이 실려 있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

삭발 참여자들은 장애인도 공동체의 시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난해 10월 28일 삭발한 진성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는 “얼마 전 활동 지원 시간이 7시간 삭감됐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화장실에 가고 밥을 먹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포기해야 한다. 책임져야 할 정부는 예산이 없다,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말로 차별을 조장했다”라며 “내가 원하는 만큼 활동 지원 시간을 보장받기 위해선 ‘예산을 쓸 만큼 가치 있고 쓸모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출근길 지하철 타는 장애인을 향해) ‘시민들 불편하게 왜 이렇게까지 하나’라는 말은 장애인이 시민에서 배제돼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했다.

이들은 이동하지 못해 교육받지 못했고 교육받지 못해 일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시설에 갇혀 살아야 했던 삶을 증언했다.

장애인배움터 너른마당의 학생 허종씨는 열일곱 살 때까지 집에서만 지내다 스물아홉 살이 돼서야 노들야학에 다녔다. 이동 시간만 4시간이 소요됐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선 리프트에 올라야 했는데 공포에 시달렸다고 한다. 허씨는 “지금도 지하철 탈 때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너무 따갑다. 특히 출퇴근 시간이 힘들다.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컸지만 이동의 불편함, 따가운 시선이 심해질 때면 ‘나오지 말아야 하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지난해 3월 30일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승강장에서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촉구하며 삭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지난해 3월 30일 서울 종로구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승강장에서 장애인 권리 예산 보장을 촉구하며 삭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종희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리중심공공일자리 노동자는 고등학교 시절 일화를 소개했다. 버스기사가 “학생, 장애가 있는 것 같은데 사람이 많으니 다음 버스를 타라”고 했다. 그러나 다음 버스도 박씨를 두고 떠났다.

박씨는 새벽에 일어나 전동휠체어를 타고 출근한다. 그는 “집을 나서면 걱정이 먼저 몰려온다. 저상버스가 있는지 걱정해야 하고, 저상버스가 와도 사람이 많으면 승객들 눈치를 봐야 한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앞에는 어르신과 비장애인들이 줄서 있어서 기다려야 한다. 간신히 엘리베이터를 타면 ‘왜 장애인이 아침부터 나오느냐’면서 쌍욕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용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의 소망은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는 “단지 지하철을 타는 우리 시민분들의 삶이 부러웠다. 내가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은 정말 대단한 게 아니다. 이동하고 싶고, 이동할 때 떨어져 죽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민들레장애인야학에 다니는 학생 오명진씨는 결의문 대신 절규하듯 소리를 질렀다. 오씨와 동행한 박길연 민들레장애인야학 대표는 “(오씨는) 뇌병변, 언어,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라며 “몇 살 때 시설에 들어갔는지조차 모른다. 가평 꽃동네에서 폭행과 노동착취를 당하고 감옥 같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시설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 지금도 수어, 한글을 다 익히지 못했다”라며 초등학교 1학년 자녀와 거의 소통을 하지 못한다고 전했다. 오씨는 자녀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도 함께하지 못했다. “아이가 아빠 때문에 놀림을 받을까 봐, 그게 걱정됐기 때문”이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

장애인 중심의 사회 구조 탓에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실도 드러냈다.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최규정 가온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토닥이고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마음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높은 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휠체어를 타고 살아가기엔 이 사회는 너무도 열악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심각했고, 장애인으로서의 삶은 그야말로 처절했다. 국가와 사회는 장애인과 함께 살아갈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고 했다. 최 활동가는 자신감을 잃으면서 소심한 성격으로 변했다. 오래도록 은둔생활을 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십수년 동안 키워온 꿈을 접은 사례도 있다. 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는 열한 살 때부터 목사를 꿈꿨다. 신학대학원에도 진학했다. 유 활동가는 “제가 아는 목사는 소외된 자, 배제된 자와 함께 활동하던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목사가 되고 싶었다”라며 “학교에서 하라는 과제, 공부, 책 읽기를 했다. 노력이란 노력은 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17년간의 꿈을 포기했다. 그는 “비장애인 중심 커리큘럼을 이수하기 위해 발버둥쳤고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기도하겠다’, ‘기다려라’, ‘장애인인데 할 수 있느냐’ 등이었다”라고 했다. 이어 “비장애인 중심 구조가 가득한 신학교, 교회 내에서는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봤다”라며 “권리의 주체가 아닌 도움의 객체로 상정해 저의 노력은 그냥 장애인이 하는 노력이 됐다”고 말했다.

탈시설 성공 경험담도 나왔다. 지난해 12월 1일 마지막 삭발 참여자인 이상근 질라라비장애인야학 활동가는 30년을 시설에서 살다가 2017년에 나왔다. 이후 처음으로 장애인야학에 다니며 공부를 시작했다. 2021년 초등학력인정서를 받았고 현재 중학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탈시설 뒤부턴 하루하루가 행복하다. 물론 사람들과 다투고 열 받는 일도 생기지만, 적어도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이 활동가는 시설에 있을 땐 머리 짧게 깎고 생활했기 때문에 탈시설 후엔 염색, 파마 등 머리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했다. 그는 “며칠 전에 머리를 했는데 오랜만에 머리를 빡빡 밀게 됐다”라며 “우리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바꾸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지난해 4월 19일 서울 종로구 효자치안센터 앞에서 발달장애인과 가족 등 555명이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촉구하며 삭발을 했다. / 성동훈 기자

지난해 4월 19일 서울 종로구 효자치안센터 앞에서 발달장애인과 가족 등 555명이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체계 구축’을 촉구하며 삭발을 했다. / 성동훈 기자

이들은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거두라고 촉구했다. 지난해 3월 30일 첫 번째로 삭발에 나선 이형숙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의 말이다. “제가 지하철을 타고 선전전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시민 여러분, 불편을 끼쳐 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이다. 장애인으로 살면서 항상 무엇이 미안한지, 무엇이 죄송한지, 입에 껌딱지처럼 달고 말을 한다. 왜 장애인은 매번 미안하고 죄송해야 하나. 지하철의 시민들은 장애인이 열차를 지연해서 화가 나서 욕을 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길을 가다가도 휠체어가 걸리적거린다고 욕하고, 엘리베이터를 조금 늦게 타도 욕하고, 식당에 들어가도 휠체어가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고 뭐라고 하고…. 단 한 번도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명확하게 장애인의 혐오와 차별이 밑바닥에 깔린 것이다.”

이라나 중구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언젠가 ‘정말 세상 좋아졌어’라는 말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에서 제 딸이 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죽지 마세요. 죽이지 마세요.”

발달장애인과 가족 등 555명도 지난 4월 19일 발달장애인의 24시간 지원 체계 구축을 촉구하며 삭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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