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거부’ 러시아인들···난민심사 기회조차 못 준다는 법무부

강은 기자
독일 베를린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무기 지원을 반대하고 평화협상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독일 베를린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무기 지원을 반대하고 평화협상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저희는 감옥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강제징집을 피해 한국에 온 러시아인 안드레이(가명·30대)는 지난 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안드레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쟁 동원령을 내리자 지난해 10월 급하게 비행기표를 구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를 비롯한 러시아 청년 5명은 난민 신청을 냈으나 법무부가 심사 자체를 거부하면서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이들은 넉 달 가량 인천국제공항 출국 대기실에서 사실상 노숙과 다름 없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안드레이는 법무부를 상대로 난민인정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달 14일 승소까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감옥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법무부가 ‘난민 심사를 진행하라’는 법원 판결에 불복해 지난달 28일 항소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등 승소한 러시아인 2명은 거처를 출국 대기실에서 영종도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로 옮기긴 했지만 여전히 자유롭게 이동할 수는 없는 상태다.

안드레이는 온라인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심사조차 받지 못하면 이런 생활이 몇 년간 이어질지도 모른다”며 “한국 정부는 우리가 이곳을 떠나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 같다. 너무 굴욕적이라고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법무부는 이들의 난민 신청이 ‘단순 징집 거부’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심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 1일 항소 사실을 밝힌 법무부는 “단순 징집 거부는 난민 인정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 및 국제규범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난민법 시행령 제5조에 따르면, “박해 가능성이 없는 안전한 국가 출신이거나 안전한 국가로부터 온 경우” “오로지 경제적인 이유로 난민 인정을 받으려는 등 난민 인정 신청이 명백히 이유 없는 경우” 등을 난민심사를 진행하지 않아도 되는 사례로 규정한다.

난민 인권 관련 시민단체에서는 법무부가 ‘반쪽짜리 해석’을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일 공익법센터 어필 변호사는 “단순한 징집 거부가 아니라 ‘정치적 의견 표명’ 차원의 징집 거부라면 난민 인정 사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8년에는 내전 참전을 거부하며 국내로 도피한 콩고인이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난민인정 불허 결정 취소소송에서 승소하기도 했다.

유난히 까다로운 난민심사의 배경에 심사 통로 자체를 차단하려는 정부의 의도가 깔려 있다는 의구심도 제기된다. 이 변호사는 “난민 인정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일단 심사를 시작해서 구체적인 판단을 받아보면 될 일인데 지금 법무부는 그 심사 자체를 안 하겠다고 항소를 한 것”이라면서 “법무부의 이러한 조치는 (난민 유입을 막으려는) 억제적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지난 1일 “(이들의 난민신청을 진행하면) 유사한 난민신청 사례가 속출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안드레이는 “나는 이미 러시아에서 3년의 ‘의무 복무’를 마쳤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단순 징집 거부’가 아니며 전쟁이 끝나는 즉시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로 망명을 신청할 수밖에 없다”면서 “나는 결코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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