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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 아카이브

② 입법 공백이라는 핑계

낙태죄 헌법불합치 ‘입법 공백’ 속 방치된 ‘임신중지 건강권’[플랫]

“당시만 해도 임신중지가 불법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어요.” 고경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사는 40년차 산부인과 의사다. 그가 의사 생활을 시작한 1980년대는 경제개발 기조에 따라 활발한 인구 억제 정책이 시행되던 때였다. 그는 전공의 2년차였던 1983년 서울 영등포 보건소로 한 달 간 파견을 나갔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보건소에서 여성들이 임신중지 하러 오면 무료로 해줬어요. 의사들이 수술도 하고 루프(피임기구)도 삽입하는 거, 저는 봤어요. 불법이라는 인식은 아무도 없었어요.” 임신중지 뿐 아니라 피임시술도 활발했다. “국가가 인구 조절을 위해 임신중지를 필요로 했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둘도 많다, 이럴 때였으니까요. 국가 정책에 협조하는 거였죠. 보건소의 실적이었어요.”

1970년대 의료진들이 지역 보건소를 돌며 여성들에게 임신중지 시술을 제공한 ‘이동시술 차량’의 모습을 과거 자료사진을 토대로 재연했다. 차량에 적힌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당시 가족계획 선전 문구다. 김덕기 기자

1970년대 의료진들이 지역 보건소를 돌며 여성들에게 임신중지 시술을 제공한 ‘이동시술 차량’의 모습을 과거 자료사진을 토대로 재연했다. 차량에 적힌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당시 가족계획 선전 문구다. 김덕기 기자

그가 임신중지의 불법성을 인식한 것은 1990년대 초 독일 유학 때 동·서독 통일 과정을 지켜보면서였다. “서독은 임신중지를 엄격히 제한했는데, 동독은 3개월 이하면 무조건 할 수 있었어요. 그걸 막 토론하는 걸 봤어요. 귀국해서 여성단체 대표한테 ‘우리나라 낙태 불법인거, 바꿔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죠. 그땐 여성운동이 취약해서 그걸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워했어요. 의사들이 암암리에 다 해줬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되기도 했고요.”

1970년대 산아 제한 캠페인 포스터

1970년대 산아 제한 캠페인 포스터

임신중지에 대한 국가의 입장은 필요에 따라 계속 변했다. 1990년대 들어 인구가 급격히 줄기 시작하자 2005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만들어졌다. 2010년엔 낙태죄로 고발되는 의사들이 줄을 이었다. 저출산 타개책으로 ‘생명 존중(낙태 방지) 분위기 조성’을 내세운 정부의 기조와 맞물린 것이었다. 병원들은 위험 부담을 이유로 시술비를 올렸다. 시술을 제공하는 병원도 줄었다. 2016년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는 출산율 제고 방안의 하나로 ‘대한민국 출산지도’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시·군·구별 가임기 여성 수, 합계 출산율, 출생아 수 등이 나오는 지도였다. 곧바로 ‘국가가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만 본다’는 비판이 일었다. 홈페이지는 하루 만에 폐쇄됐다.

필요에 따라 임신과 출산을 이용해 온 국가 아래 임신중지는 공적 의료서비스로 자리잡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국가는 출산 억제 시기에는 낙태죄를 ‘관대하게’ 다뤘고, 출산 장려 시기에는 임신중지의 불법성을 강조했다.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고, 관련 후속입법이 이뤄지지 않은 ‘무법’ 상태인 지금은 어떨까. 국가는 입법 공백을 핑계로 해야 할 일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건강권에 개입하고 있다.

한국 국가인구정책 변천사. 정부가 성과 재생산권리를 국가의 필요에 따라 통제해온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김덕기 기자

한국 국가인구정책 변천사. 정부가 성과 재생산권리를 국가의 필요에 따라 통제해온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김덕기 기자

무개입이라는 개입

임신중지를 결정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다. 가까운 임신중지 시술 병원은 어디인지, 시술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하고 비용은 얼마인지 같은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보건복지부에서 위탁받아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운영하는 ‘러브플랜’ 사이트에 접속했다. ‘임신의 유지·종결’ 카테고리에서 ‘임신 종결’ 항목이 있었지만 시술법과 후유증 같은 ‘의학적 안내’가 대부분이었다. 약물을 통한 임신중지에 대해서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허가된 약제가 아직 없다’는 짧은 고지가 전부였다.

러브플랜에 안내된 보건복지상담센터(☎129), 인구보건복지협회(☎1644-7373)에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보건복지상담센터에 “임신중지 가능한 병원을 알 수 있나”라고 묻자 “병원은 안내하고 있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수술 비용 역시 “안내하기 어렵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임신중지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다니는 여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공공 플랫폼을 통해서는 임신중지와 관련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기 어렵다. 김덕기 기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임신중지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다니는 여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재현했다.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공공 플랫폼을 통해서는 임신중지와 관련한 ‘실질적인’ 정보를 얻기 어렵다. 김덕기 기자

인구보건복지협회도 마찬가지였다. “거주 지역의 병원이 사이트 검색을 해도 잘 안 나온다”고 하자, 상담원은 “수술 가능한 병원은 규모가 좀 있고 수술장과 분만장이 있는 곳이어야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임신중지 관련해 무엇을 안내해줄 수 있느냐”고 묻자 “아직 법이 개정되지 않아 저희도 정확하게 정보 전달받은 게 없다”고 했다.

“문의가 많이 오는데 상담 매뉴얼에는 ‘직접 알아보시라’고만 돼 있어요.” 여성가족부 임신출산갈등 상담(☎1644-6621)에서도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상담원은 “정부 산하 기관이기 때문에” 정보 제공이 어렵다며 오히려 자신도 문의 전화를 받으며 정보를 얻는다고 했다.

복지부가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7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러브플랜을 통해 제공된 임신중지 정보는 2021년 128건, 2022년 309건이었다. 2019년 9월 이후 임신출산갈등 상담이 제공한 임신중지 정보는 2019년 26건, 2020년 358건, 2021년 213건, 2022년 414건이었다. 임신중지 추정 건수가 3만여건(2020년 기준)임을 감안하면 저조한 수준이다. 공적 플랫폼을 통해 임신중지 정보 제공이 거의 안 되고 있다는 의미다.

뉴질랜드 정부가 운영하는 임신중지 정보 사이트 ‘디사이드(Decide)’에서 임신중지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을 검색할 수 있다. 지역, 마지막 생리 시작일을 기입하면 임신중지가 가능한 의료기관 상호명, 외과 및 내과 임신중지가 가능한 임신주수, 주소, 연락처 등이 뜬다. 디사이드 홈페이지 갈무리

뉴질랜드 정부가 운영하는 임신중지 정보 사이트 ‘디사이드(Decide)’에서 임신중지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을 검색할 수 있다. 지역, 마지막 생리 시작일을 기입하면 임신중지가 가능한 의료기관 상호명, 외과 및 내과 임신중지가 가능한 임신주수, 주소, 연락처 등이 뜬다. 디사이드 홈페이지 갈무리

해외는 어떨까. 뉴질랜드 정부가 운영하는 임신중지 정보 사이트인 ‘디사이드(Decide)’에 접속했다. 첫 화면에 ‘임신중지를 고려 중이라면 디사이드에 당신이 필요한 임신중지 서비스와 돌봄, 그리고 가까운 곳의 서비스 제공자(병원)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문구가 나왔다. ‘병원 찾기’를 누르자 ‘사는 곳’과 임신 몇 주차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마지막 생리 시작일’ 정보를 입력하라는 화면이 떴다. ‘북/서 오클랜드’, 생리 시작일은 ‘모름’이라고 한 뒤 엔터를 쳤다. 입력창 아래 ‘당신이 입력하는 정보는 프라이버시가 보장되고, 익명 처리된다’는 세심한 공지가 보였다.

몇 초 만에 네 개의 병원 위치와 간략한 안내가 떴다. 그 중 한 곳을 클릭하자 병원 운영 시간과 함께 해당 병원은 ‘약물적 임신중지는 9주까지, 수술적 임신중지는 14주까지’ 제공한다는 정보가 나왔다.

뉴질랜드 정부가 운영하는 ‘디사이드(Decide)’ 홈페이지에서 ‘북/서 오클랜드’ 거주, ‘생리 시작일은 모름’을 입력하자 임신중지를 제공하는 병원의 위치와 관련 안내가 떴다. 디사이드 홈페이지 갈무리

뉴질랜드 정부가 운영하는 ‘디사이드(Decide)’ 홈페이지에서 ‘북/서 오클랜드’ 거주, ‘생리 시작일은 모름’을 입력하자 임신중지를 제공하는 병원의 위치와 관련 안내가 떴다. 디사이드 홈페이지 갈무리

병원을 방문하지 않고도 자가의뢰(self-refer)를 할 수 있다는 안내, 뉴질랜드 시민일 경우 기본적인 비용은 무료지만, 처방비나 초음파 비용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안내, 뉴질랜드 시민이 아닐 경우 1400달러에서 시작하나, 더 자세한 안내는 병원에 연락해 봐야 한다는 안내도 있다.

접속한 지 채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필수적인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알아봐도 필요한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는 국내 상황과 비교된다. 공적 정보를 얻기 어려운 이들은 검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이 ‘2021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서 만 15~49세 여성 8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6.9%가 ‘인터넷 게시물 또는 온라인을 통한 불특정 대상’을 통해 임신중지 관련 정보를 얻었다고 답했다.

문보라 간호사(오른쪽)가 지난달 13일 서울 동작구 색다른의원 접수 창구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문보라 간호사(오른쪽)가 지난달 13일 서울 동작구 색다른의원 접수 창구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여성임을 인증해야 가입할 수 있는 한 임신중지 정보 애플리케이션에는 익명으로 임신중지 병원과 가격 정보 공유를 요청하는 글들이 하루에도 수 건씩 올라온다. 시술을 마친 이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장문의 후기를 남기기도 한다. 임신중지가 의료 체계에 들어와 있다면 모두 공적으로 안내되어야 할 정보들이다.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런 공간이 ‘커뮤니티’의 역할을 한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나 병원 광고에 활용될 가능성 등 우려도 남는다.

공적 정보의 부재는 임신중지 당사자들의 주체성도 떨어뜨린다. 색다른의원에서 일하는 문보라 간호사는 임신중지 문의를 하는 이들이 “정말로 질문이 없다”고 말했다. “의료진이 제공하는 정보를 듣고, 대답만 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어떻게 하겠다’ 같은 말도 없어요. 어떻게든 해결은 해야 하는데, 단순히 ‘임신이면 수술하겠다’ 정도까지만 생각하고 오시는 것 같아요.” 나영 셰어(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대표는 “병원마다 서로 다른 정보, 예컨대 ‘제3자 동의가 꼭 필요하다’ 는 식의 말을 해 혼선을 주는 경우도 많다. 한 병원에서 잘못된 정보를 얻으면 그 다음 병원을 찾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며 “해외의 경우 낙태죄 폐지 후 정보 체계를 제일 먼저 신경써서 구축했다”고 했다.

WHO ‘필수의약품’인 유산유도제는 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해 9월28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회원들이 지난해 9월28일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세계보건기구(WHO) 필수의약품에 등재돼 있는 미프진(유산유도제)도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전세계 61개국 이상에서 사용 중인 ‘미프진’은 임신중지에 사용되는 약물인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리스톨의 콤비팩으로, 수술과 유사한 수준의 임신중지율을 보인다.

2021년 현대약품이 식약처에 수입허가 신청을 했는데, 식약처의 두 차례 자료 보완 요구에 답하지 못하다 결국 지난해 12월 자진 철회했다. 식약처는 “구체적 보완 사유는 업체 개별 품목과 관련된 정보로 공개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부는 해당 약물에 대한 단속 강화 계획만 밝히고 있다. 최근 발표된 제3차 양성평등기본계획에서도 임신중지에 대한 의료 접근권을 보장하겠다며 ‘임신중절의약품의 불법 유통 단속 강화’를 내걸었다. 미프진을 보내주는 국제 비영리단체인 ‘위민온웹’ 사이트도 우리나라에선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차단해 접속할 수 없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 4일 열린 제38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올해의 ‘성평등 걸림돌상’ 수상자로 식품의약품안전처를 선정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식약처가 유산유도제를 도입하지 않는 등 여성 건강권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제공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 4일 열린 제38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올해의 ‘성평등 걸림돌상’ 수상자로 식품의약품안전처를 선정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식약처가 유산유도제를 도입하지 않는 등 여성 건강권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제공

복지부는 “인공임신중절의 방법으로 수술과 함께 약물 투여를 포함한 모자보건법 정부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는 원론적 입장만 밝혔다. 복지부가 유산유도제 및 임신중지 시술과 관련해 식약처, 여성가족부 등 관계부처와 공문을 주고받은 건 2020년 6월과 10월 단 두 건에 그쳤다.

김새롬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교수는 “불법 판매상들은 규제하면서 의약품 승인 허가는 안 해주잖아요. 기술이 존재하는데 한국에서 못 쓰는 건 진짜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독감 유행 시기에 타미플루 구하려고 엄청 노력했잖아요. 정부가 보기에 국민 건강에 중요하면 그렇게까지도 하는 거죠. 코로나 백신이나 관련 의약품은 3주 안에 승인 절차를 밟겠다고 홍보도 했어요. 그런데 미프진 도입하라고 국민 청원까지 했는데도 이러는 건 임신중지와 관련해 적극적 행정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여성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청소년이 임신중지를 원할 경우 ‘보호자 동의’를 요구하는 의료기관들이 많다. 이 경우 의지할 곳이 없는 청소년들은 오갈 곳이 없어진다. 김덕기 기자

청소년이 임신중지를 원할 경우 ‘보호자 동의’를 요구하는 의료기관들이 많다. 이 경우 의지할 곳이 없는 청소년들은 오갈 곳이 없어진다. 김덕기 기자

임신중지는 건강권의 문제다. 신뢰할 수 있는 기관으로부터 임신중지 정보를 얻을 수 없는 나라, 이미 안전성이 검증된 관련 약물을 도입하지 않은 나라에서 사는 여성들의 건강권은 잘 보장되고 있지 않은 셈이다. 이런 상황은 사회경제적 기반이 약한 청소년 등 취약층에 특히 더 불리하게 작용한다.

은아씨(가명)는 10대 때 임신중지를 했다. 혼자 인터넷 검색을 돌려 병원을 찾았다. “인천에서 병원을 엄청 많이 알아봤는데 다 거절됐어요. 결국 강남에 있는 병원도 갔는데 거기서도 부모님을 데려오라고 해서 수술을 못 했어요.” 대부분의 병원이 당시 만 18세이던 은아씨에게 부모나 파트너 등 보호자의 동의를 요구했다. 의지할 곳이 없던 그는 계속 시술을 거절당했고, 그렇게 2주가 흘렀다.

결국 은아씨는 자신보다 생일이 2개월 빠른, 만 19세인 친구의 신분증을 빌려서 간신히 임신을 중단했다. 시술비는 부르는 게 값인 것 같았다. 당시 임신 6주였던 그에게 책정된 시술비는 80만원. 학교에 다니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고 있던 때였다. 한 달치 월급이 그대로 빠져나갔다. 병원은 시술 뒤 외음부 세척제 하나를 시술비에 포함된 선물이라며 줬다.

그가 임신중지를 하고 4년 뒤 낙태죄는 폐지됐다.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밝힌 은아씨는 가끔 지인 등의 임신중지 상담을 해주곤 하는데, 낙태죄가 있었던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여전히 예전의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병원 찾기 같은 것. 청소년이면 여전히 누군가의 동의를 요구받고요. 장벽이 높다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보건복지부에서 위탁받아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운영하는 ‘러브플랜’ 홈페이지에  나온 임신중지의 정신적 후유증과 관련한 안내. 정신적 후유증의 하나로 ‘후회’가 나와 있다. 러브플랜 홈페이지 갈무리

보건복지부에서 위탁받아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운영하는 ‘러브플랜’ 홈페이지에 나온 임신중지의 정신적 후유증과 관련한 안내. 정신적 후유증의 하나로 ‘후회’가 나와 있다. 러브플랜 홈페이지 갈무리

국가는 교묘하게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낙인 강화에 일조하기도 한다. ‘러브 플랜’에 나와있는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정보도 그렇다. 임신중지의 정신적 후유증으로 우울증과 불안, 그리고 ‘후회’를 안내하고 있다. 복지부는 대한산부인과학회가 2020년에 낸 ‘인공임신중절 표준교육자료’에 근거한 것이라고 했다.

나영 대표는 “후회를 부작용 목록에 포함하는 건 임신중지에 대한 편견, 낙인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당연히 어떤 사람은 후회를 할 수도 있다. 당사자가 맺고 있는 파트너나 가족과의 관계, 종교 같은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겪는 ‘감정’이다. 당사자의 마음이 거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도록 상담, 지원을 하는 체계에서 고려해야 될 일”이라고 했다.

뉴질랜드 정부는 ‘디사이드’ 에서 임신중지 후의 감정에 대해 후회 뿐 아니라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고도 언급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다르게 느낀다. 종종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고, 안심하더라도 나중에는 강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분노, 자유, 후회, 죄책감 또는 슬픔을 느낄 수도 있다’며 ‘이러한 감정은 왔다갔다 할 수 있고, 그에 대해 거의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임신중지는 ‘건강권’의 문제

지난 4일 3·8 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제38회 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성평등을 향해 전진하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제공

지난 4일 3·8 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제38회 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성평등을 향해 전진하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제공

건강권의 관점에서 임신중지와 관련한 정보 체계를 갖추는 것, 유산유도제를 도입하는 것은 관련 법 개정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일까. 꼭 그렇진 않다. 나영 대표는 “입법이 된다면 체계를 더 빠르게 갖출 수도 있겠지만, 입법이 안 됐다고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시스템 구축 과정에서 입법에 필요한 내용을 찾아내는 작업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고 했다.

여성단체들은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이던 때부터 임신중지 관련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임신중지에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같은 데이터가 있어야 그걸 바탕으로 보건의료체계도, 법도 만들 수 있다”며 “법 없어서 못한다고 할 게 아니라, 뭐가 필요한지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제38회 여성대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한국여성단체연합 제공

제38회 여성대회가 열리고 있는 모습. 한국여성단체연합 제공

복지부 등 관련 부처 내 업무 조정도 필요하다. 김 연구교수는 “복지부는 정책 전문성이 높은 부처인데, 임신중지와 관련해서는 적극적이지 않다. 담당 부서가 명확하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다. 그는 “출산정책과는 출산을 독려하는 부서이다보니 임신중지를 본연의 업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복지부 출산정책과 업무 내용에는 ‘인공임신중절 예방에 관한 사항’이 있다. 그는 “‘성재생산건강과’ 같은 여성의 관점에서 정책을 보는 단 하나의 부서라도 있으면 나을 것”이라고 했다.

임신중지 비용 급여화 요구도 지속적으로 나온다. 김 연구교수는 “급여화하지 않으면 임신중지 관련 정보가 모이지 않는다”며 “누가, 어떤 시기에, 왜 그런 결정을 하는지 모르면 임신중지를 줄일 수도 없다”고 했다.

권인숙 의원은 “임신중지에 대해 정부는 4년째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며 “여성의 건강권과 자기결정권 보장을 위한 조치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 박하얀 기자 white@khan.kr · 김한솔 기자 hansol@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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