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이름이 왜 여기에? ‘권춘섭 집앞 정류장’ 생긴 사연읽음

송윤경 기자

24년 전 암 투병 주민 위해 개설, 이름 대 이어

주변 정류장은 버스 뜸하고 승강장 시설 없어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에 있는 ‘권춘섭 집앞 정류장’에  있는 권춘섭씨. 이 정류장은 원래 그의 아버지인 권상철씨의 이름을 딴 ‘권상철 집앞 정류장’이었다. 권상철씨가 별세한 이후 아들인 권춘섭씨가 정류장 이름을 이어받았다.  송윤경 기자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에 있는 ‘권춘섭 집앞 정류장’에 있는 권춘섭씨. 이 정류장은 원래 그의 아버지인 권상철씨의 이름을 딴 ‘권상철 집앞 정류장’이었다. 권상철씨가 별세한 이후 아들인 권춘섭씨가 정류장 이름을 이어받았다. 송윤경 기자

[주간경향] 강원도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주민의 이름을 딴 정류장이 있다. 태백시 삼수동의 ‘권춘섭 집앞 정류장’이 그것이다. 이 정류장이 생긴 배경엔 한국의 열악한 대중교통 사정과 가족 사랑이 담긴 사연이 있다.

너른 들판 너머로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태백시 삼수동의 외딴곳에 권상철·김복녀 부부가 배추, 감자, 옥수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도보로 20분 거리에 초등학교와 식당이 있지만, 이웃은 찾기 힘든 곳이었다. 부부는 시내에 볼일이 있으면 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제대로 된 버스정류장이 없었다. 버스가 지나가면 ‘태워달라’ 부탁해서 타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부부는 열악한 사정 속에서도 2남1녀를 열심히 키웠다. 그러다 1999년 아내 김복녀씨가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았다. 그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 관절이 아파 오래 서 있기도 힘들어졌다. 대도시 종합병원에 다니기 위해선 태백시청 부근 터미널을 이용해야 했는데, 그러자면 매번 터미널까지 버스를 타야 했다. 몸이 아픈 김씨는 더는 예전처럼 도로에 서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릴 수 없었다.

남편인 권상철씨는 아픈 아내를 위해 태백시청에 ‘정식 정류장’을 만들어달라는 민원을 꾸준히 제기했다. 이를 받아들인 시청이 운수업체를 설득해 정류장을 만들기로 했다. 인근에 별다른 시설이 없어 시청 측은 고민 끝에 ‘권상철 집앞 정류장’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의 일이다.

“정류장 생겼을 때 어머니가 너무 좋아하셨죠. 살아 계셨으면 올해 아흔세 살이셨을 겁니다. 암 투병을 하다 2010년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치매로 고생하다가 2007년에 돌아가셨고요.”

지난 3월 17일 만난 권춘섭씨(71)가 정류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권상철씨가 작고한 뒤 이 정류장은 그의 아들 이름을 따 ‘권춘섭 집앞 정류장’이 됐다.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다 강릉에 나가 살던 권춘섭씨는 40대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함께 살던 아내는 당뇨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홀로 배추농사를 짓는다.

권씨는 자신의 자녀들도 “연어가 돌아오듯이” 이곳으로 돌아와 살길 바란다고 했다. “아들이 60세가 되면 들어올 거예요. 죽을 때 되면 고향 찾아와야 하잖아. 내가 죽으면 아들이 정류장 이름 이어받겠지. 가보야 가보.”

‘권춘섭 집앞 정류장’은 한국의 이색 정류장으로 종종 방송을 탄다.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권춘섭 집앞 정류장’은 오지에 버스가 잘 다니지 않던 ‘옛날이야기’쯤 된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교통 불편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여전히 버스가 뜸한 까닭이다. 상사미마을로도 불리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선 “시장 나갔다가 버스 시간이 안 맞으면 1~2시간을 기다릴 때도 많다. 버스가 부족해 답답하다”(정옥분씨·71)는 하소연이 나온다.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에 있는 ‘권춘섭 집앞 정류장’의 주인공 권춘섭씨와 동네 주민들이 마을회관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에 있는 ‘권춘섭 집앞 정류장’의 주인공 권춘섭씨와 동네 주민들이 마을회관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집 쪽이 마을 복판인데 승강장이 없어. 내가 (시청에) 얘기하면 건방지다고 할까봐…. 얘기 좀 해줘요.”

“거기 맞은편에 공터 있으니까 시청이 사서 지으면 될 텐데….”

“시내버스정류장은 아주 온실처럼 해놓고 촌은 등한시하는 거라고.”

이날 마을회관에 들른 권춘섭씨에게 김순란씨(83)가 버스정류장이 없어 겪는 불편을 털어놨다. 옆에 있던 다른 노인들이 김씨의 얘기에 공감하며 말을 보탰다. 김씨가 말하는 장소엔 ‘상사미 창마을 승강장’이라는 표지판만 세워져 있을 뿐 승강장 시설이 없다. 무릎이 아픈 노인들에게는 이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이 고역이라고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없는 곳에서 서 있으려면 정말 힘들어. 가끔 비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우산까지 날아가.”(김씨)

마을회관에 모인 6명의 노인 중 남성은 모두 운전자였고 여성은 모두 비운전자였다. 부부가 함께 농사를 짓더라도, 농기계를 몰고 관청 사무를 보는 일은 대개 남성이 맡았던 탓에 성별에 따라 운전 여부가 갈렸다.

운전을 배워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적은 없었는지 묻자, 정옥분씨(71)가 말했다. “어른 모시고, 자식 키우고, 일만 하느라 시간 다 보냈지. 좀 억울해.”

산악지대인 강원에선 열악한 대중교통망에 발이 묶여 있는 여성 노인들의 현실이 더욱 고달프다. 강원도여성가족연구원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강원도에서 홀로 사는 여성 노인 5명 중 1명은 교통불편 때문에 1년간 병원진료를 미뤘다고 한다.(2022년 강원도 여성노인 1인가구의 생활실태조사). 암진단을 받은 여성이 버스 타기가 쉽지 않아 정식 정류장이 만들어졌다는 사연을 ‘그때 그 시절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에 있는 승강장. 표지판만 세워져 있을 뿐 앉아 있을 곳이 없다. 몸이 불편한 마을 노인들은 이곳에서 오래도록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송윤경 기자

강원도 태백시 삼수동에 있는 승강장. 표지판만 세워져 있을 뿐 앉아 있을 곳이 없다. 몸이 불편한 마을 노인들은 이곳에서 오래도록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송윤경 기자

버스에 발목 잡힌 일상

이날 마을회관을 나온 권춘섭씨는 승용차를 타고 김씨가 말한 ‘상사미 창마을 승강장’에 들렀다. 휑한 대로변에 표지판만 세워져 있는 이곳 주변을 둘러보면서 승강장 시설을 설치할 만한 공터가 있는지 살폈다.

사실 권씨는 승용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버스 때문에 겪는 불편은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버스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동년배 여성 노인들의 호소가 남 일 같지 않다. 20여년 전 부모님이 겪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권춘섭 집앞 정류장’으로 돌아오면서 씁쓸한 듯 말했다. “자가용 끌고 다니는 사람들은 여그 노인들 사정을 몰라.”

권춘섭 집앞 정류장이 그의 자녀, 손자·손녀에게 계승되는 훗날에는 버스 때문에 고달팠던 일상이 진짜 ‘옛날 얘기’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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