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동반자법

동성혼·지정 1인 등과 함께 다층적 안전망 기능

정희완 기자

다양한 가족구성권 선택 실현하려면

복지 지원체계 개인단위 전환 필요

민법 등 개정 ‘정상가족’ 개념 깨야

2019년 11월 13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회원들이 혼인과 가족생활 등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차별을 겪고 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 이준헌 기자

2019년 11월 13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회원들이 혼인과 가족생활 등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차별을 겪고 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 이준헌 기자

[주간경향]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족구성권)는 개인이 원하는 사람과 살아갈 권리를 말한다. 언뜻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국가가 법으로 규정한 ‘가족’은 이성 배우자와 혈족 등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돌봄 등의 제도적 지원은 이런 가족에게만 집중된다. 그 밖의 관계는 보호할 사회적 안전망이 없다 보니 쉽게 고립된다. ‘정상가족’을 넘어 다양한 관계를 가족으로 인정할 때 가족구성권은 실현된다.

가족구성권 운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시민들이 다양한 관계를 자유롭게 맺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상가족과 비교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차별은 제도를 통한 물질적 지원과 사회적 인식을 포함한다. 그러면 가족관계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위계’도 사라질 것이다. 모든 관계가 평등한 상태일 때 시민들은 자신이 원하는 관계를 온전하게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국가 지원체계의 변화도 수반돼야 한다. 국가가 정한 가족의 틀 안에 존재하니까 지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관계를 ‘실천’하는지를 지원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원 대상을 가족단위에서 개인단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가족구성권 운동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현재는 가족 안에서 모든 돌봄과 유대의 형성이 이뤄진다는 것을 전제로 가족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앞으론 개인이 삶의 과정에서 다양한 관계에 놓일 수 있기 때문에 생애주기별로 개인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구성권은 2005년 호주제 폐지 이후 등장한 개념이다. 2006년 당시 민주노동당의 제안으로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모임’이 꾸려졌고, 2019년 가족구성권연구소가 출범했다. 연구소는 다양한 연구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다양한 층위에서 돌봄 수행

가족구성권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생활동반자법, 동성결혼 법제화, ‘내가 지정한 1인’ 제도, 사회적 가족 지원을 위한 조례 등이 있다. 생활동반자법을 거론할 때 대표적인 적용 대상으로 성소수자가 부각돼왔다. 한국은 동성혼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활동반자법을 대안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생활동반자법과 동성혼 법제화는 이성애 혼인 중심의 가족제도를 벗어나 다양한 관계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내용 면에서는 그러나 다소 결이 다르다. 생활동반자법은 혼인보다 느슨한 관계를 맺고 그만큼 권리 보장의 범위도 혼인보다 좁다. 성별이나 성적지향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해당한다.

반면 동성혼은 말 그대로 결혼이다. 상속 등 보다 많은 권리가 부여돼 생활동반자보다 결속력 높은 결합이다. 또 성소수자 내에서도 관계에 관한 욕구가 다양하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2021년 11월 발간한 ‘성적소수자 노후 인식조사 보고서’에는 안정된 노후를 위해 필요한 법안을 주제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가 담겼다. 성소수자 488명 가운데 ‘동반자법(비혼 동거 커플)’과 ‘가족구성권 인정법(폭넓고 자유로운 공동체)’이 각각 25.2%로 공동 1위를 차지했다. 동성혼 법제화가 22.7%로 뒤를 이었다. 생활동반자 관계가 동성혼의 차선책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희망을 만드는 법’ 박한희 변호사는 “생활동반자법과 동성혼 법제화는 대체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의 관계”라며 “무엇이 먼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혼 동거 커플이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모습 / 김창길 기자

비혼 동거 커플이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모습 / 김창길 기자

내가 지정한 1인 제도도 생활동반자법 등과 함께 돌봄과 상호의존 체계의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안으로 거론된다. 일종의 대리인이나 연대인으로 볼 수 있다. 개인이 문서를 통해 지정한 사람에게 의료 및 연명치료 결정권, 해외 재난 시 안전 여부 확인 권리,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를 권리 등을 주는 방식이다.

법적 등록 관계를 거부해 혼자 살거나 법에 정의되지 않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 시민, 원치 않게 혼자 남은 시민 등을 염두에 둔 제도다. 예를 들어 가족이나 생활동반자가 아니더라도 실질적인 돌봄 관계에 있는 1명에게 가족돌봄휴가를 사용할 권리를 부여하는 식이다.

나기 가족구성권연구소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생활동반자법, 동성혼 법제화, 내가 지정한 1인 등은 배타적 관계가 아니다. 각기 다른 층위에서 돌봄을 수행함으로써 안전망을 두텁게 할 수 있다. 내가 지정한 1인은 법 밖의 관계 형태를 모두 개별법에 포섭하기 어려울 때 가능한 대안이다. 돌봄의 필요성으로 생활동반자 관계를 맺었다가 관계가 깨지면 혼자가 된다. 또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사람이 꼭 생활동반자가 아닐 수도 있다. 이럴 때 의료결정권을 대리하거나 장례를 치를 사람 등을 별도로 지정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무쌍한 삶의 주기에서 돌봄의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다.”

내가 지정한 1인은 이미 일부 현행법을 통해 시행 중이다. 2018년 4월 개정된 공직선거법은 예비후보자가 배우자가 없을 때, 그가 지정한 1명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검역법도 환자를 격리수용했을 때 가족이나 환자가 지정한 사람에게 알리도록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1월 대선후보 시절 유사한 제도를 공약한 바 있다. 이 대표는 당시 “친족이 아니라 응급한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고 소중한 이의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의료, 장례, 돌봄 영역에 있어 연대관계인을 지정하는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지자체 조례로 가능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다. 2021년 5월 당시 권수정 정의당 서울시의원은 ‘사회적 가족 지원을 위한 기본 조례안’을 발의했다. 서울시가 ‘사회적 가족’을 대상으로 주거·복지·보건·의료·안전 등의 지원사업을 시행할 수 있는 근거를 규정한다. 권 의원은 “소외될 수 있는 개인을 사회적 연결망으로 포용해 공생하는 사회를 구현하려는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조례안은 사회적 가족을 ‘혈연이나 혼인관계로 이뤄지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생계를 같이하거나 일상생활, 가사, 소비, 생활돌봄, 경제적 협력 등을 공유하는 생활공동체’로 정의한다. 사회적 가족에는 ‘2인 동거’는 물론 협동조합주택 등에 거주하며 가족을 구성한 주거공동체 유형도 포함된다.

특히 생활을 공유할 수 있는 지역사회에서 가족의 소속감을 갖고 돌봄을 수행하는 ‘네트워크 지향’ 유형도 해당한다. 꼭 동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는 활동보조인의 보조를 받는 장애인들이 돌봄 관계를 맺고 있지만, 동거 가능한 주거공간을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 등을 고려했다.

하지만 조례안의 사회적 가족 개념이 민법 및 건강가정기본법 등 상위법에서 규정한 가족의 개념과 배치된다는 이유 등으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못한 채 폐기됐다.

차별 양산하는 민법·건강가정기본법

민법과 건강가정기본법 개정도 시급한 과제로 꼽힌다. 이들 법에서 규정한 가족 등의 개념이 각 개별법에 영향을 끼치고, 낙인·혐오 등 차별적인 인식을 양상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민법 제779조는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로 규정한다. 또 직계혈족의 배우자,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 가운데 생계를 같이하는 경우로 한정한다. 이 조항은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신설됐다. 당초 정부는 민법에 별도의 가족 개념을 담지 않으려 했다. 별다른 실익이 없고 민법에 가족을 정의한 외국의 입법례도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가족 개념이 사라지면 가족해체가 가속화할 우려가 있고 개별법에서 가족을 다시 정의해야 하는 등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반대 여론에 막혔다. 2003년 10월 민법 개정안을 심의하는 국무회의에서 여성부 장관이 다른 국무위원들의 반대 의견을 방어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 등 국회의원 13명과 32개 시민단체가 2022년 9월 28일 국회 소통관에서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을 촉구하고 여성가족부를 규탄하는 내용 등의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 용혜인 의원실 제공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 등 국회의원 13명과 32개 시민단체가 2022년 9월 28일 국회 소통관에서 건강가정기본법 개정을 촉구하고 여성가족부를 규탄하는 내용 등의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 용혜인 의원실 제공

민법의 가족 개념이 가족해체를 막기보다는 가족 외의 관계를 상대로 한 차별과 배제를 조장하는 데 악용된다는 지적이 많다. 개별법 등에서 가족의 범위를 넓히는 데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앞서 언급한 서울시의회에서 발의된 사회적 가족 지원을 위한 조례안의 사례처럼 말이다.

건강가정기본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 법은 정부와 지자체가 가족 관련 정책을 수립·이행하는 기본틀이 된다. 법에 담긴 가족의 정의는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뤄진 관계다. 가정은 ‘가족구성원이 생계 또는 주거를 함께하는 생활공동체로서 구성원의 일상적인 부양·양육·보호·교육 등이 이뤄지는 생활단위’로 규정한다. 특히 ‘건강가정’이라는 개념을 명시한다. ‘가족구성원의 욕구가 충족되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가정’을 일컫는다.

가족의 범위가 협소하고 건강가정은 ‘건강하지 않은 가정’이라는 반대 개념을 만들 수 있어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법은 정부의 가족정책에 실질적인 영향을 준다. 가족지원 사업은 ‘가정의 원활한 기능 수행’이 목적이라고 법에 담겨 있다.

나기 가족구성권연구소 연구위원은 “건강가정기본법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출산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재생산 기능을 국민의 중요한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서의 시민을 이상적인 시민상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혼인을 통하지 않는 재생산, 사회를 유지·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재생산은 비정상이라고 낙인찍고 차별과 불평등의 영역에 남겨졌다”고 했다.

건강가정기본법은 2004년 2월 제정 당시부터 논란이 됐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년 10월 “실질적으로 가족 및 가정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가족 및 가정형태에 대한 차별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며 가족과 가정의 개념을 수정하고 법률 명칭도 중립적으로 개정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국회에서도 개정안이 수차례 발의됐지만 통과되진 못했다.

현재 국회에 계류된 법안은 남인순·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각각 2020년 9·11월에 발의한 개정안이다. 가족과 건강가정의 개념 등을 삭제하고 법률 명칭을 ‘가족정책기본법’으로 변경하는 내용 등이다. 보수 기독교계는 “동성애를 조장해 가정을 파괴하려는 것”이라며 반대한다. 지난 정부의 여성가족부는 개정안 내용에 동의했지만, 정권이 바뀌자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입장을 바꿨다.

앞으로도 가족을 넘어선 다양한 관계는 끊임없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생활동반자법 제정 등이 논의의 마침표가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기 연구위원은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변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돌봄의 위기를 어떻게 해쳐나갈지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생활동반자법이 시행되더라도 앞으로 관계는 계속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돌봄을 수행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는 무엇인지 우리 사회가 지속적으로 논의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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