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만난 인터넷 방송인, 결별 통보에 교제 강요
사생활 폭로 협박···2년 소송 끝 솜방망이 처벌
가해자 항소하자 ‘극단선택’, 2개월째 의식불명
“○○아, 누나가 하고 있는 재판이 있어. 니가 챙겨야 해.” “끝까지 단죄하는 걸 네가 봐야 해. 그게 누나 유지야.” “또 뭐 있지. 정신 더 희미해지기 전에 말해야 하는데.” “죽어서라도 잠자고 싶어. 항상 피곤했어.”
권나은씨(33)는 지난 2월27일 오후 9시부터 30여분간 동생에게 이같은 내용이 담긴 카카오톡 메시지를 20여개 남겼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과다 복용해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이었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겨진 나은씨는 다음날 새벽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지금까지 의식을 못찾고 있다.
무엇이 나은씨를 삶의 벼랑으로 떠밀었을까. 2개월의 짧은 교제, 지속적인 협박과 사이버 스토킹, 2년간 이어진 형사소송, 솜방망이 처벌과 가해자의 항소. 모두 나은씨가 겪은 일이다.
개인방송 폭로에 언론사 제보 협박까지···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은씨는 인터넷 방송인(BJ) A씨와 2020년 2월부터 4월까지 교제했다. A씨는 금융·투자 분야 BJ로, 누적 시청자 수는 316만9983명에 이른다. 주식·가상화폐 투자에 관심이 많았던 나은씨는 관련 방송을 찾아보거나 직접 1인 방송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A씨를 알게 됐고, 약 2개월간 짧은 만남을 가졌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검찰 공소장과 1심 판결문을 보면 A씨는 나은씨로부터 결별 통보를 받자 교제를 강요했고, 이를 거절당하자 나은씨의 사생활을 시청자들에게 알리겠다는 ‘폭로 협박’을 시작했다.
“중대발표 방송공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모든 내용 다 말씀드릴게요. 속시원하게 말씀드립니다. 5월1일 저녁 8시에 뵐게요.” “상상 이상을 보여드릴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A씨의 폭로 예고는 인터넷 개인방송과 방송 공지게시판, 시청자들이 모인 오픈 카카오톡 대화방을 오가며 이어졌다.
A씨는 2020년 5월1일 방송에서 “벌금 화끈하게 내고 모든 걸 다 공개하겠다”며 나은씨의 개인 소지품과 속옷 등을 카메라 앞에 꺼내 보였다. 나은씨에게는 카톡으로 만남을 강요했다. 나은씨가 “내 입장은 바뀌지 않아. 다시 사귈 생각은 없어”라고 답장하자 “이거 변할 순 없어?”라고 되물었다.
A씨의 협박은 개인방송 채널과 오픈 대화방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나은씨가 대기업 홍보팀에서 근무 중이란 사실을 협박에 이용했다. 폭로 방송 직후 A씨는 약 30개 언론사 기자들에게 ‘모 인터넷 방송 방송자 겸 OO사 홍보실 직원 권나은이 데이트폭력을 행사하고 허위로 명예훼손 고소를 했다’는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
나은씨가 다니는 회사 윤리경영실 제보 게시판에는 ‘연인관계였던 권나은으로부터 욕설과 무시로 정서적인 학대를 받아 데이트폭력을 당했고, 권나은이 자신을 만날 때 법인카드를 사용한 것 같으니 카드사용 내역을 조사해 달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A씨의 교제 요구와 협박은 같은 달 18일까지 수십회 지속됐다.
2년의 소송도 버텼는데···‘집행유예’ 선처에 무너졌다
검찰은 2021년 4월 A씨를 정보통신망법 이용 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강요미수,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당시엔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되지 않아 이에 대한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다.
2년간 이어진 소송의 결론은 집행유예였다. 인천지방법원 형사16단독 권형관 판사는 지난 2월1일 A씨에게 적용된 모든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겪은 정신적 고통이 상당했다”면서도 “벌금형을 초과하는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이라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나은씨는 판결에 크게 상심했다. 나은씨는 선고 당일 회사 상사에게 보낸 문자에서 “피고의 아내가 임신 중인 점 등이 고려돼 검사가 구형한 징역 3년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로 결정이 됐다”며 “3년 동안 스트레스로 건강도 돌보지 못한 채 외딴 섬에 갇혀 지냈는데 제 고통에 비해 처벌이 낮아서, 그리고 법의 심판대 앞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 오늘은 상처가 너무 크다”고 했다. A씨는 사건 이후 결혼해 가정을 꾸린 것으로 알려졌다.
나은씨의 가족은 A씨가 1심 선고 6일 뒤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나은씨의 우울증과 불면증이 악화했다고 했다. 나은씨의 모친은 “A씨가 집행유예를 받은 것도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는데,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항소까지 했다는 사실에 나은이가 많이 힘들어했다”며 “이후 잠을 못 자서 힘들다는 말을 더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은이가 ‘그 사람 감옥 안 가면 죽어버릴거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눈물을 흘렸다.
A씨 측은 항소 이유서에서 “공소사실 내용을 보면 피고인이 마치 자신의 방송 시청자들에게 피해자의 사생활에 관한 것들을 폭로하겠다고 예고방송을 하며 그것을 빌미로 피해자에게 다시 만나줄 것, 고소를 취하할 것을 종용한 것처럼 진술돼 있으나 이는 앞뒤 사정을 생략하고 여러 가지 맥락에서 한 발언들을 이어붙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시청자들에게 우습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거친 단어를 사용하고 가만두지 않겠다는 허풍을 떤 것은 사실이나 처음에 예고한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폭로를 한 것은 전혀 없다”며 “헤어진 연인에 대한 연민과 미련이 남아 걱정하는 내용으로 연락했고 그나마도 피해자가 답변이 없자 금방 그만뒀다”고 했다.
“꿈 많고 씩씩하던 내 딸 억울함 알려달라” 부모의 호소
“일 욕심 많고 늘 공부하는 자세였던 사람.” 기자와 만난 회사 동료 B씨는 나은씨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나은씨는 지난해 말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했다”며 “가해자 주장처럼 근태나 횡령 문제가 있었다면 회사에서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B씨는 “소송 중에 가해자가 내용증명을 회사로 보내기도 했다. 그런 일로 나은씨가 힘들어 했다”고 했다.
서울 서대문구 집에서 나은씨가 있는 요양병원까지 32.6km. 하루 두 차례, 1분30초처럼 지나가는 1시간30분의 면회를 위해 나은씨의 부모는 매일 운전대를 잡는다. 지난 20일 열이 40도 가까이 오른 나은씨의 팔다리를 주무르던 이들은 면회 시간이 끝난 후에도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가족은 살던 집을 내놓고 오는 5월 요양병원 100m 거리 아파트로 이사한다. 부동산 계약도 마쳤다. 아버지 권영우씨는 “우리 사회에 정의라는 것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3년이란 시간을 범죄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쏟아부었어요. 소송이 길어질수록 아이가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는데, 결국 이렇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딸 대신 소송을 이어가기 위해 성년후견인 신청을 했다.
나은씨를 대리한 이호영 변호사(법무법인 고운)는 “명예훼손 범죄 처벌이 그 행위의 파급효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라며 “특히 초범의 경우엔 벌금형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 변호사는 “이 사건은 가해자가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고, 피해자가 기자들을 상대하는 홍보 업무를 한 점이 악용되는 등 특수성이 있었다”면서 “과거 판례가 중심이 되다 보니 카톡이나 유튜브, 영상 매체 등이 보편화한 시대의 명예훼손 범죄의 파급력이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