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한 동이 ‘전세사기’ 피해자…절망 속에서도 연대는 싹튼다

김송이 기자
지난 29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A아파트의 주민들이 모여있는 모습. 김송이 기자

지난 29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A아파트의 주민들이 모여있는 모습. 김송이 기자

“905호님, 우리 얼굴은 진짜 처음 보네!”

“1102호님, 제가 생각하던 인상이랑 많이 다르시네요?”

지난 29일 저녁 7시. 인천 미추홀구의 한 아파트 905호는 거실 한 가운데 길게 펴둔 음식상 앞에 모여앉은 주민 20여명으로 북적였다. 피자부터 직접 부친 전까지 제각기 음식을 싸 들고 온 이들은 서로를 ‘905호’ ‘602호’로 불렀다. 오가며 눈에 익은 얼굴을 마주한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한쪽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는 소리가 들리자 아이가 몇 살인지로 시작된 대화는 무슨 일을 하는지, 요즘 근황은 어떤지를 묻는 어른들의 수다로 이어졌다. “얼마 전에 막 50일 기념사진을 찍었대요.” 태어난 지 70여일 된 최연소 주민의 곤히 잠든 모습을 보며 짓는 미소로 905호가 가득 찼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과 고개도 겨우 끄덕거리는 요즘, 보기 드문 모습이 펼쳐진 이곳은 주민 60세대가 전부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A 아파트다. 이곳 주민들은 지난 17일 세 번째로 극단적 선택을 한 인천 전세사기 피해자의 이웃들이기도 하다.

이날 모임은 또 다른 비극이 이어져선 안된다고, 이웃들이 서로 위로하고 힘을 내자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했다. 주된 소통 창구였던 아파트 단체채팅방에서 ‘우리 만나자’는 얘기가 먼저 나왔다. “소통방에서 개인 얘기를 올리진 않잖아요. 어디 얘기할 데가 없으니 같이 와서 얘기하자고 한마음으로 모인 거예요.” 지난해 A 아파트 채팅방을 처음 개설한 이현호씨(36)가 말했다.

이들은 지난해 여름 전세사기꾼 ‘건축왕’의 피해를 알리면서 관계가 돈독해졌다. 이씨를 비롯한 주민들은 ‘개인이 얘기하면 백 마디를 해도 안 들어준다’는 생각에 힘을 합쳤다. 사기꾼이 건물을 부실공사한 탓에 장마철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하고 옥상 외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됐다.

애초 옥상에서 열려던 모임은 비 소식에 공실이던 905호에서 열렸다. 지난해 이사를 나간 박재희씨(32)가 먼저 비어있는 본인 집의 문을 열었다. 경매에 부쳐진 이 집의 전세권자는 아직 박씨이다. “가족 같은 사람들인데 추운 데서 모이게 둘 수 있냐”며 흔쾌히 집을 내어준 박씨는 A 아파트를 떠났지만 소통방에 남아 이웃들과 끈끈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 29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 내 한 집 현관이 20여명 주민의 신발로 가득 차 있다. 김송이 기자

지난 29일 오후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 내 한 집 현관이 20여명 주민의 신발로 가득 차 있다. 김송이 기자

이날 만난 주민들은 가족에게, 서로에게 그리고 떠난 이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아파트 대표이자 미추홀구 전세사기 대책위 부위원장인 김병렬씨는 “(극단적 선택을 하신 걸 보면서) 우리 아파트 이웃들이 이미 단단히 뭉쳐있다고 내가 너무 자만했던 것 같다”며 “이런 자리를 사건이 터진 뒤에야 만들어 죄책감이 든다”고 말했다.

4살 아들을 키우는 김진희씨(35)는 “2017년 입주 당시 제가 이 집을 골랐었는데, 그게 너무 후회되고 남편한테 미안하다”면서 “아들이 뉴스에 아파트 건물이 나오면 ‘여기 우리 집인데, 이제 이사해야 하냐’고 물을 때 정말 속상하다”고 했다.

모임에선 미소와 수다가 가득 했지만, 사실 주민들의 몸과 마음은 편치 않다. “하루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들은 스트레스 수치가 위험 수준을 가리킨다고 했다.

경매 중단부터 특별법 제정까지 정치권을 중심으로 해법이 쏟아지지만 이들에게 달라진 건 없었다. “(경매) 유예가 될지 안 될지 불안하니 매일 법원 사이트에 들어가서 1차 기일만 기다리는 상황이에요.” 김영옥씨(50)는 쫓겨난 뒤 월세 보증금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원래 하던 일에 더해 편의점 저녁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정부 발표를 듣고 나서 은행이나 피해자지원센터를 찾아 대환대출이든 피해확인서 발급이든 요청해봤지만 ‘아직 안된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무너진다고 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다짐도 무뎌지곤 한다. 이미 집이 경매에 낙찰된 강동우씨(37)는 “사기 피해 소식을 들은 낙찰자가 낙찰 취소 의향을 밝혔지만 (법원) 공무원이 매뉴얼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면서 “5월12일에 낙찰자가 대금을 납부하면 끝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 전에 무언가 바뀌지 않으면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강씨는 두 아이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얘기해야야 할지 고민 중이다.

지치는 싸움은 이들만의 몫이어야 할까. 박찬문씨(59)는 “과한 전세대출을 내준 은행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사기 피해를 당한 주민들이 보증금을 조금이라도 돌려받을 방안이 무엇인지 빨리 나와야 한다”고 했다.

가까운 이들도 이해못할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 그 얘기에 공감하고 함께 눈물짓는 이들의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주민들에게는 가장 큰 위안이다. 주민들은 앞으로 격주에 한 번 만나 서로의 근황을 묻고 힘을 내자고 다독이기로 했다.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옥상에서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막막하고 불안한 나날이지만 주민들은 그렇게 서로 의지하며 싸우고, 살아갈 힘을 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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