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집, 타버린 마음

먹고 살기 힘든데 “취미 가지라”…크레파스 주고 떠난 전세피해 상담서비스

전지현 기자    김송이 기자

(上) 벼랑 끝에 선 전세사기 피해자들

올해 들어 인천 미추홀구에서만 4명의 전세사기 피해자가 숨졌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정신건강에 적신호가 켜지자 국토교통부·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지방자치단체는 앞다퉈 심리지원책을 내놨다. 그러나 매일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는 많은 피해자들은 이 같은 심리지원의 실효성이 와닿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4월21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주안역 인근에서 ‘찾아가는 전세피해지원 상담버스’가 운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21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주안역 인근에서 ‘찾아가는 전세피해지원 상담버스’가 운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국토부는 인천 미추홀구에서 지난 4월21일부터 지난달 31일까지 ‘찾아가는 전세피해지원 상담버스’를 운영했다. 인천시도 지난달 19일까지 한 달간 미추홀구에 ‘찾아가는 마음안심버스’를 집중 편성했다.

평일·일과시간에 운영되는 상담버스의 특성상 생업이 있는 피해자들은 접근이 쉽지 않다. 경향신문 설문조사 결과 자살 고위험군(15점 이상)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난 30대 남성 A씨는 “회사에서 멍하게 있을 때가 많다”며 “미추홀구에서 정신상담을 해준다고 하지만 평일만 가능해 방문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나마 상시 운영되지도 않았다. 인천시의 마음안심버스는 자치구 요청이 있을 경우 편성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현재는 자치구 신청이 없어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국토부에서 운영하는 상담버스도 이달부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상담을 받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답한 피해자도 다수였다. 경제적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회적 상담으로는 도움을 받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한상용씨(53)는 지난 4월 인천 제물포역에서 국토부 상담버스를 찾았다. 한씨는 당시 실시한 자가진단 체크리스트에서 정신건강 ‘고위험군’에 속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버스를 찾지 않았다. “상담이 별로 도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상담가는 “전세사기에 너무 힘을 쏟지 말고, 가끔 여행을 가는 등 다른 취미를 가지라”고 조언했다. 한씨는 ‘전세사기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다른 취미를 가질 새가 어디 있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했다.

김병렬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 부위원장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미추홀구청의 주선으로 피해대책위 회의에 참관한 정신건강 상담가들이 그림 상담을 진행했다. 상담가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한 분들에게 필요할 수 있으니 전달해달라”며 피해대책위에 크레파스를 줬다. 김 부위원장은 “찾아와주신 게 감사했지만, 실질적으로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재난에 준하는 트라우마를 겪는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일회적인 상담 서비스가 “와닿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피해자들은 전 재산을 다 잃은 상황에서 심리상담이 무슨 의미냐고 받아들이기 쉽다”며 “한두 번의 상담이 아닌 정부의 지속적 사례관리로 상담가와 피해자 사이의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피해대책위’ 등 모임이 더 활성화돼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회공헌특임이사는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피해자들의 고립”이라며 “모임을 독려해 이들이 고립되지 않게 살피고, 지금 당장 피해자들이 효용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언제든지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심리지원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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