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캠프 위탁 운영업체 ‘산재보험 포기 각서’
실업급여도 포기…“이의제기 금지” 조항까지
취재 후 ‘개선 약속’했지만 사례 더 있을 수도
“전형적 ‘가짜3.3’…캠프 전반 근로감독해야”
쿠팡의 소분·배송 물류창고(쿠팡 캠프)를 위탁운영하는 업체가 근무자들을 상대로 ‘산재보험 포기 각서’를 받아 온 것으로 드러났다. 각서에는 ‘해당 조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모든 법률적·금전적 책임을 감수한다’는 조항도 버젓이 있었다. 쿠팡과 해당 캠프 관리 업체는 취재가 들어간 뒤 개선을 약속했다. 전국 곳곳의 쿠팡 캠프를 관리하는 다른 업체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수 있어 전반적인 근로감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류호정 정의당 의원실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로부터 제주 지역 쿠팡 캠프 운영을 위탁받은 물류업체 A사는 근무자들로부터 ‘사회보험 미가입 책임각서’라는 서류를 받아 왔다. 쿠팡 캠프는 물류센터에서 온 물건들을 다시 소분해 고객에게 배송하는 거점이다.
각서에는 “본 각서인은 근로자 지위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사회보험(국민연금·건강보험·장기요양보험·고용보험)의 가입이 성립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서약한다”는 내용이 있다. “본 각서인은 실업급여(고용보험), 산재급여(산재보험)의 대상자가 되지 않음을 인지하고 관공서에 청구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 “추후 노동관계·세무관계에 따른 법률적·금전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모든 책임을 각서인이 부담한다”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한다” 등 조항도 있었다.
A사는 전체 근무자를 대상으로 일괄적으로 각서를 받아 왔다. A사 근무자들이 속한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을 보면, 관리자는 “신규 또는 기존 근무자들 중 용역계약서, 서약서, 사회보험 미가입 책임각서를 작성하지 않으신 분들은 출근한 뒤 말씀 부탁드린다”며 “계약서 작성은 필수라 꼭 작성해야 한다”고 했다.
해당 캠프에서 일한 B씨는 “처음 각서를 봤을 때는 ‘이런 걸 아직도 쓰는 데가 있구나’ 싶어 많이 황당했다”며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안 쓰면 안 된다’고 공지하기도 했다”고 했다. B씨는 “물류센터 특성상 타박상도 종종 있고, PDA(개인정보단말기) 찍는 사람들은 다들 손가락 관절염을 호소한다”며 “(사측은) 산재 안되니까 조심해라, 다치면 절대 안된다 등 말을 하는데,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 서약서 때문에 하는 말인지 모르겠더라”라고 했다.
A사는 근무자들과 ‘노동자(근로자)’로서 정식 근로계약을 맺지 않고 ‘개인사업자’로서 용역계약을 맺으며 사회보험 미가입 서약서를 받아 왔다. 사업장에 종속돼 지시·감독을 받으며 일하는데도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계약하는 이른바 ‘가짜 3.3’ 계약이다. 노동자인데도 개인사업자처럼 3.3%의 세금을 내는 경우를 일컫는 말로, A업체의 ‘용역(사업소득) 계약서’에도 사업소득세 3%와 지방소득세 0.3%를 원천징수한다고 적혀 있다. 이 같은 계약은 사업주가 노동관계법 적용이나 사회보험 등 비용 부담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곤 한다.
A사가 근무자들과 용역 계약을 맺었지만, ‘사회보험 미가입 책임각서’는 계약의 형태와 관계없이 불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법원과 고용노동부 등은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계약의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노동자로서 일했는지(근로관계의 실질)’로 판단한다. 업무 내용과 장소·시간을 사용자가 정하는지, 사용자의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는지,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 관계에서 노무를 제공하는지 등이 판단 기준이다. 노동자의 산재보험 등 사회보험 가입을 막으면 300만원 이하 과태료나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A사는 경향신문 취재가 들어가자 개선에 나서겠다고 했다. A사 관계자는 “제주 지역 특성상 장기적으로 일할 직원을 구인하기가 쉽지 않아서 용역계약을 맺었다”며 “(사회보험 미가입 책임각서는) 노동자 중 보험료 징수를 원치 않는 분들도 있어 받은 것이지만 잘못된 것은 인정하며, 현장을 살펴 문제가 되는 부분을 시정하겠다”고 했다.
원청인 쿠팡이 위탁 물류업체들의 노무관리를 제대로 살피고 감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쿠팡 캠프가 전국에 퍼져 있는 만큼 A시와 같은 사례가 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B씨는 “업체가 쿠팡과 계약하는 만큼 근무자들도 쿠팡을 보고 간 것”이라며 “아무리 하청을 줬다지만 (쿠팡이) 손을 놓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쿠팡 측은 “위탁사의 고용 계약 등에 관여할 수 없지만, 개선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면 해결을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류 의원은 “노동자를 사업소득자로 위장한 가짜 3.3노동의 전형”이라며 “‘법과 원칙’과 ‘약자 복지’를 중시한다는 고용노동부는 쿠팡 캠프 전반의 고용실태에 대한 근로감독을 통해 위법행위에 대해 엄벌하고, 일하는 사람 모두가 노동관계법을 적용받아 노동권을 존중받을 수 있도록 국회도 적극적으로 입법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