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지켜온 장애인권영화제, ‘약자와의 동행’에서 배제됐다

김송이 기자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와 31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5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서울시 장애인인권영화제 예산 미집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2024.03.05 문재원 기자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와 31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5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서울시 장애인인권영화제 예산 미집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2024.03.05 문재원 기자

“영화 파묘에는 장애인이 나오지 않잖아요? 장애인이 주인공인 영화는 쉽게 볼 수 없어요. 그런데 영화제 상영작에는 장애인이 많이 등장하고, 또 영화를 보기도 쉬워요.”

발달장애인 남태준씨는 다음 달 20일 열리기로 돼 있는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이 배우, 제작진, 관객, 운영위원 등으로 참여하는 이 영화제는 매년 열린 축제의 장이다. 상영작들은 장애인이 여기저기 이동하고, 여행 다니고,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조명한다. 남씨는 영화제를 통해 여러 가지 꿈을 꾸게 된다고 했다.

영화의 맛을 느끼기에도 더없이 좋다. 멀티플렉스 극장은 많지만 음성해설이 지원되거나 자막이 제공되는 국내 영화를 틀어주는 상영관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지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에선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영화제 사흘간 상영되는 작품은 모두 ‘배리어프리’로 제작되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리기 때문에 휠체어 이용 장애인은 물론 시민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다. 남씨가 올해부터 영화제 집행위원을 맡아 영화를 쉬운 말로 소개하는 ‘이해하기 쉬운 프로그램 북’을 기획·제작하는 것도 더 많은 이들이 영화제를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남씨는 “밖에서 누구나 다 같이 볼 수 있으니까 영화제가 참 좋다”라고 했다.

그런데 남씨에게 큰 걱정거리가 생겼다. 서울시가 지원해오던 영화제 예산 5000만원을 일절 배정하지 않아서다. 이 탓에 올해 영화제가 열리지 못하거나 대폭 축소될 위기에 처했다. 서울시는 2024년도 장애인단체활동 및 행사 지원사업 가운데 ‘장애인인권영화제 사업’의 보조사업자를 선정하지 않았다. 공모에 유일하게 지원한 단체이자 지난 4년간 지원을 받아 온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사무국이 평가에서 합격점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영화제 측은 “올해부터 서울시가 도입한 보조금관리위원회의 발표 심사에서 별 문제 없이 5분간 발표를 진행했다”라면서 “서울시 담당 직원은 ‘영화제 점수가 높지 않았다’고만 할뿐 정확한 결격 사유를 알려주지 않았다”라고 반발했다. 남씨는 5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마이크를 잡고 “장애인인권영화제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장애인들이 일 년에 한 번 영화를 함께 즐기자고 하는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올해로 22회를 맞는 영화제는 2020년 서울시 예산을 지원받기 시작하면서 배리어프리 제작을 상영작 전체로 대폭 확대할 수 있었다. 영화제에 투입되는 총 예산 6000만원 중 절반 가량이 배리어프리 제작에 투입된다. 영화제 사무국은 서울시가 지원하지 않는 금액을 펀딩을 통해 충당하려 하지만 배리어프리 축소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배리어프리 제작팀 민아영 감독은 50일도 채 남지 않은 영화제 개최 장소 물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민 감독은 “야외에서 개최하려면 LED 스크린을 세우고 음향장비를 다 대여해야 하는데 예산과 인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면서 “마로니에 공원 외에는 휠체어 이용자가 갈 수 있는 규모 있는 공간을 찾는 것부터 문제”라고 했다.

민 감독은 그동안 영화제가 축적해 온 배리어프리 제작 경험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는 “지난 4년간 장애인 당사자들의 여러 피드백을 받아 영화 매체에 적합한 음성 해설과 수어 작업을 하고 그 기준을 만들어 왔다”라면서 “예산이 깎이면 이런 작업이 위축될 수밖에 없고 기존의 노하우도 흐지부지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예산이 담보되지 않으면 전문직인 수어통역가와 음성해설가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못 주고 헌신을 요구해야만 할 수도 있다.

지난해 자원활동가로 참여했던 대학생 조혜성씨는 영화제에서 장애인 관객들이 어느 때보다 즐거워하는 것을 봤다고 했다. 조씨는 “언어장애인이든 시각장애인이든 누구든 여기에 오면 영화를 즐길 수 있고 활발하고 동등한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라면서 “장애인권 보장에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현장이 꼭 축제 같았다”라고 했다.

영화제 축소는 그만큼 장애인권이 위축된다는 의미다. 조씨는 “지하철 혜화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시위도 탄압하고 있는데 그 앞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리는 영화제도 축소한다는 것은 장애인과 함께 살지 않겠다는 (서울시의) 입장을 보여준다”라고 했다.

서울시는 “현재로선 영화제 사업을 추가로 공모할 계획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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