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의 계보

(2) 마약왕이 된 막내

전현진 기자

1980년 중반 일본의 밀수선 단속 강화로 시장 막히자 국내로 눈 돌려

부산 단속 심해지자 서울로…호텔 방서 현금계수기로 돈 세다 잠들어

피해자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 마약이 대표적이다. 신고할 피해자가 없는 범죄 마약은 조용히 사회 곳곳에 퍼져갔다.

남녀노소·사농공상 가리지 않고 마약 투약자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저연령화’가 두드러진다. 가장 보편적인 마약류가 메스암페타민, 즉 히로뽕이다. 온갖 종류의 마약이 우후죽순 퍼져나간 데는 히로뽕이 60여 년 전부터 한국 땅에 중독의 토양을 만들어 놓은 영향이 컸다. 히로뽕 유통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만연한 마약 유통의 문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는 이유다.

주간경향에서 히로뽕의 역사와 현재 즉 대한민국 ‘뽕의 계보’를 5회에 걸쳐 되짚는다. 직업물 웹소설 및 실화 기획사 팩트스토리와 공동기획했다. <편집자 주>

1980년대 국내에 대량의 히로뽕이 유통되면서 수사기관에 압수되는 양도 계속 증가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 국내에 대량의 히로뽕이 유통되면서 수사기관에 압수되는 양도 계속 증가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주간 경향] 1980년대 초 어느 밤, J(1962년생)는 일본 효고현 고베시 앞바다 속에 있었다. 잠수복을 입고 있어도 물이 차가웠다. 육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멀리 세워둔 자동차가 깜빡거리는 불빛으로 신호를 줬다. 등에 멘 가방 속 물건만 전하면 임무가 끝난다. 물건은 한국에서 만들어진 히로뽕이었다.

당시는 일본과 한국을 잇는 히로뽕 ‘한국 루트’의 황혼기였다. 한국의 히로뽕 시장이 근본적 변화를 맞이하기 직전이기도 했다. 40년도 더 지난 일을 회상하며 J가 말했다. “어린 자식들이 있어서 이름은 밝히면 안 돼.”

2023년 여름, 부산 광안리의 한 카페에서 만난 J는 찢어진 청바지에 명품 로고가 새겨진 흰 티셔츠를 입었다. 손목에는 은색 롤렉스 시계를 찼다. 짧게 자른 머리와 밝은 피부 덕분에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J는 대한민국 ‘뽕의 계보’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이름 중 하나다.

밀수선에 오르다

한국은 1980년대까지 히로뽕 최대 생산지였고, 대부분 일본으로 밀수됐다. 밀수 단속이 강화되면서 일본으로 넘어가지 못한 히로뽕은 국내에 풀리기 시작한다. 1980년대 압수된 히로뽕과 담뱃갑을 비교한 사진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은 1980년대까지 히로뽕 최대 생산지였고, 대부분 일본으로 밀수됐다. 밀수 단속이 강화되면서 일본으로 넘어가지 못한 히로뽕은 국내에 풀리기 시작한다. 1980년대 압수된 히로뽕과 담뱃갑을 비교한 사진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0년대까지 한국은 최고급 히로뽕의 최대 생산국이었다. 한국에서 만든 히로뽕은 세계 최대 소비 시장인 일본으로 건너갔다. 재일조선인 기술자들이 기반을 다진 한국의 히로뽕 생산 체제는 거대한 밀수 산업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 초 고등학교를 졸업한 J는 우연찮은 계기로 히로뽕 업계에 발을 들였다. 댄스 교습소에서 춤을 배운 뒤 실습 삼아 간 부산 중구 백화당 카바레에서 한 여성을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J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던 그 여성을 누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누님은 어느 날 술 한잔하자며 J를 호텔로 데려왔다. 방안에서 능숙하게 양주와 얼음을 챙겼다. J는 이날 자신도 모르게 ‘뽕’을 배웠다. 며칠 동안 낯선 느낌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웠다.

짧은 만남 뒤, 일본으로 떠났던 누님은 얼마 뒤 부산으로 돌아왔다.

“J군아, 배 탈 줄 아나?”

누님은 일본을 오가는 활어선에 타라고 했다. 선주로 보이는 노인 S도 소개해줬다. 작은 배에는 선장, 기관장, 갑판장에 선원 1명, 그리고 잡일을 맡는 ‘화장’인 J까지 다섯 정도가 탔다. 수출용 고급 활어를 싣고 일본 각지를 다녔다. 돌아올 땐 ‘코끼리 표 전기밥솥’이나 ‘세이코 시계’ 같은 일제 상품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밀수도 좀 하나보다 했는데, 7~8번쯤 왔다 갔다 하다가 딱 꿈을 깼어.”

수조 밑바닥에는 히로뽕이 숨겨져 있었다. 노인 S는 거물 히로뽕 제조 전문가이자 밀수 조직의 수장이었고, 누님은 S와 거래하는 일본 야쿠자의 연락책이었다. 정체를 알았어도 발을 뺄 순 없었다. 그는 밀수 조직의 막내로 일을 배워갔다.

1980년대 초반까지 일본에선 단속이 심하지 않았다. 가끔 합동 단속이 뜨면 J가 히로뽕이 든 가방을 메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일은 순조로웠다.

1980년대 중반, 분위기가 달라졌다. 히로뽕 밀수선들이 계속 단속에 걸렸다. 그가 타던 활어선도 일본에서 검문을 받았다. 선장이 ‘잡일만 하는 아이’라고 말해줘 J는 겨우 풀려났다.

“한국하고 일본이 손잡고 수사가 활발하게 이뤄진 거지. 그때 원로 영감들이 그러더라고. ‘박정희 때는 일본에서 수사비만 받고 모른 척하더니, 전두환 때 돼서 일본하고 미국의 신임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수사하더라’라고.”

1987년 일본 경찰백서를 보면, 1982년 1㎏ 이상의 각성제(히로뽕) 압수 사례 중 한국산이 87.4%를 차지했다. 그런데 1984년 한국산 히로뽕 압수량은 5.2%로 급감한다. 단속 강화로 밀수 자체가 줄었고, 출발 전 국내에서 붙잡힌 사례도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산의 빈자리는 대만산이 차지했다. 대만산 압수량은 1982년 0.6%에서 1984년 87.4%로 급증했다.

밀수 막힌 히로뽕, 한국을 휩쓸다

“J군아, 이리 와봐라.”

S는 일본에서 붙잡혔다 풀려나 부산으로 돌아온 J에게 고생했다며 히로뽕 10㎏을 줬다. 일종의 퇴직금이었다. “가지고 가서 한번 팔아봐라.”

사실상 테스트였다. 히로뽕을 일본에 팔 수 없다면 한국에서라도 팔아야 했다. 히로뽕계 원로들은 그 일을 맡아줄 ‘젊은 인재’를 찾고 있었다.

J는 성매매업소를 운영하던 사채업자를 통해 히로뽕을 유통하기로 했다. 히로뽕 수요는 쾌락을 좇는 이들에게서 나온다. J는 공산품을 도매나 소매로 유통하는 총판이라도 된 듯 히로뽕을 팔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히로뽕 투약자는 많지 않았다. 제조업자들이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 맛을 보는 정도였다. 일본 밀수가 막히고 대량의 히로뽕이 국내에 풀리면서 중독자가 빠르게 늘었다. 히로뽕은 술·담배 같은 기호품으로 여겨졌고, 많은 사람이 죄책감 없이 금세 빠져들었다.

투약자들은 부산으로 몰렸다. 1988년 부산지검 관계자는 유흥가인 부산 서면 일대 술집의 80%가 히로뽕을 취급하는 것으로 봤다. 당시 부산지검이 보건사회부 통계를 인용해 정리한 자료를 보면, 1980년 이전까지 연간 100명 미만이었던 국내 히로뽕 사범, 즉 향정신성의약품 관리법 위반자는 매년 증가해 1987년 985명으로 늘었다. 특히 투약 사범의 증가 폭이 컸다. 1983년 투약 사범은 68명으로 밀조(75명), 밀매(142명)보다 적었다. 1987년 투약 사범은 765명으로 밀조(32명)나 밀매(170명)보다 월등히 많아졌다.

히로뽕은 온 국민이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이 됐다. 중독자가 늘자 한국방송(KBS) 등 주요 방송국에서도 히로뽕 남용 실태를 특집으로 보도했다.

J는 서울로 향했다. 단속도, 경쟁도 아직 부산보다 적었다. 신촌, 명동 등에 자리를 잡고 강남의 클럽이나 안마시술소, 영등포와 청량리의 성매매업소 등을 주로 공략했다. 수요는 빠르게 늘었다. 여러 차례 징역을 살았지만, 교도소에서 고객도 만나고 동료도 만났다. J는 불과 수년 사이 서울에서 첫 손에 꼽히는 히로뽕 유통업자가 됐다.

J를 따르는 이들도 생겼다. J의 뒤를 이어 히로뽕 유통 거물이 된 A도 그중 하나다. A는 20대 초반이었던 1997년 J를 처음 만났다.

“J형님은 당시 마약 세계에서 최고라는 별칭을 지녔고, 일반인들은 쉽게 만나기 힘든 거물이었습니다.” 옥중서신으로 인터뷰한 A는 J를 이렇게 표현했다.

둘이 처음 만난 장소는 서울 잠실의 한 호텔 커피숍이었다. J는 A와 마주 앉아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은 일생에 3번 기회가 온다.”

자신을 만난 것이 성공할 수 있는 일생의 기회 중 하나라는 의미였다. 눈앞에 있는 J의 모습이 그의 말을 보증해주는 것 같았다. J는 외제 차를 탔고, 그를 따르던 이들은 값비싼 양복을 차려입었다.

‘이런 사람들과 마약 비즈니스를 함께한다면 젊은 나에게 영광이다.’ A는 그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했다.

J는 A에게 서울의 호텔, 나이트클럽, 모델 회사,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소개해줬다. 모두 J의 고객이었다.

한국의 히로뽕 수요는 계속 늘었다. 연간 마약류 사범 수는 1999년 1만명을 넘었다.

J는 동생들과 밤낮없이 일했다. 물건은 주로 부산에서 가져와 서울에서 2배를 받고 팔았다. 현금을 받고 히로뽕을 건네는 ‘오른손 왼손 거래’만 했다. 호텔 방에 현금계수기를 두세 대 들여놓고 밤새워 돈을 세다가 잠들었다. 하루 동안 들어온 현금이 많을 때는 1억원도 넘었다.

마(魔)약?

1998년 10월 15일 KBS 9시 뉴스에 보도된 검경의 J 추격 사건. J는 총에 맞아 강남구 골목에 차를 버려두고 달아났다. KBS 캡처

1998년 10월 15일 KBS 9시 뉴스에 보도된 검경의 J 추격 사건. J는 총에 맞아 강남구 골목에 차를 버려두고 달아났다. KBS 캡처

J는 시장을 장악했지만, 긴장 속에서 살아갔다. 특히 경찰이나 경쟁자의 ‘작업’을 경계했다. 실제로 신촌의 한 클럽에서 거래를 마치고 나오다가 미리 기다리던 지역 조직폭력배에게 물건을 다 뺏기기도 했다.

검찰과 경찰도 J를 노렸다.

1998년 10월 14일 자정 무렵, J는 서울 서초구 남부터미널 인근에서 히로뽕 115g을 갖고 구매자를 기다렸다. 받을 돈은 1500만원. 구매자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승합차들이 그의 차를 에워쌌다. J는 급히 차를 들이받아 빈틈을 만든 뒤 도주했다.

총성이 울렸다. J는 “너무 긴장해서 (다리에) 총을 맞은 줄도 몰랐다”라고 떠올렸다. 신발에 피가 들어찼지만 멈출 순 없었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부산으로 간 뒤 치료했다.

다음날 뉴스는 검경합동단속반이 실탄까지 쏘며 마약 사범을 추격했지만, 검거에 실패했다는 소식으로 도배됐다.

J는 약 6개월간 도피 생활을 이어가다 붙잡혔고, 2001년 징역 3년이 확정됐다. 남부터미널의 추격전은 히로뽕 업계에서 ‘영화 같은 총격 사건’으로 여전히 회자된다.

“남들은 영화 같은 일이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아주 괴로운 일이었지요.” J는 기자에게 총에 맞은 상처를 보여줬다. 흉터가 흐릿하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J는 이후에도 히로뽕 유통을 계속했다. 거물이 됐지만, 피로감도 느꼈다. J가 마약 관련 혐의로 처벌을 받은 것은 2013년이 마지막이다. J는 이제 히로뽕 유통에서 손을 털었고, 약도 끊은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공사 기기 대여업 등을 하며 평범하게 산다고 했다. 여러 히로뽕 유통업자들도 J가 이 바닥을 떠났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J의 말투에는 히로뽕 유통의 산증인이라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그렇다고 자신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이따금 회한을 내비쳤다.

“마약이라는 단어에 ‘마’ 자가 껴있어 그런지 몰라도 다들 말년을 비참하게 사는 것 같아요. 저야 이미 나이가 들어 선택에 미련은 없지만, 너무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던 것은 아닌가 싶죠.”

마약의 ‘마’는 삼베 마(麻) 자다. J는 발음이 같은 마귀 마(魔)로 비유했다. 거물로 대접받았지만, J의 인생이 결코 성공적이거나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간접적인 고백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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