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제3자 욕설, 다 들렸다면 불법녹음 아냐”
노동계 “괴롭힘 물증 확보에 도움될 것”
사무실에서 ‘남 들으라는 듯’ 공개적으로 이뤄지는 제3자끼리의 폭언·욕설을 녹음하면 불법일까?
법원은 ‘자신이 참여한 대화 녹음만 합법’이라고 판단해 왔다. 하지만 최근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대화라면 자신이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녹음이 불법은 아니다’라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15일 노동인권단체 직장갑질119의 설명을 종합하면, 대구지법 제11형사부(이종길 재판장)는 지난 2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공공기관 직원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A씨는 상급자인 B씨가 사무실에서 자주 욕설을 해 고충을 겪고 있었다. A씨는 B씨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려고 녹음을 통해 증거를 수집하려 했다.
A씨는 2021년 12월21일 사무실에서 B씨가 다른 직원들과 대화하면서 관장·본부장 등을 욕하는 내용을 녹음했다. A씨는 이듬해 1월 B씨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면서 해당 녹음 녹취록을 제출했다. 검찰은 A씨가 자신이 참여하지 않은 대화를 녹음해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했다며 징역 1년을 구형했다.
1심 재판부는 “통신비밀보호법이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하지 못하게 한 것은 원래부터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제3자가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발언을 녹음해선 안 된다는 취지”라며 “여기서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은 비밀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일반 공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장소의 성격과 규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통신비밀보호법상 ‘대화’에는 당사자 중 한 명이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덧붙였다.
재판부는 “사무실의 구조와 크기, A씨 자리 파티션 높이 등에 비춰보면 A씨는 B씨의 발언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이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 7명도 모두 ‘무죄’ 평결을 내렸다.
노동계는 물증 확보가 힘들어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받기 어려웠던 피해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증거를 모을 수 있게 됐다고 해석했다. 녹음은 직장 내 괴롭힘의 주요 물증인데, 피해자들은 녹음을 하려 해도 ‘불법 녹음’이라는 가해자들의 협박에 위축돼 왔다.
권두섭 직장갑질119 온라인노조 추진위원은 “공개된 사무실에서 피해자를 앞에 두고 다 들으라는 듯이 폭언·모욕을 할 때 주변의 동료가 녹취를 해준다든지, 피해자가 자리에 있는데도 큰 소리로 다른 사람들에게 험담이나 모욕적인 말을 할 때 피해자가 이를 녹취하는 경우가 있다”며 “판결은 이런 증거 수집이 불법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직장갑질119는 “녹음기는 본인이 없는 장소에 놓아두고 녹음하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고, 합법적으로 녹음했더라도 신고 등 목적이 아니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개할 경우 모욕죄나 명예훼손죄에 해당할 수 있다”며 “녹음기를 반드시 몸에 지니고 녹음하고, 녹음 내용을 신고용으로만 사용하며, 가해자의 불법 녹음 협박에 당당하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