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복권당첨자 숭배하는 세상
스타가 상상 초월 수입 얻는 건
그들 재능에 열광하는 군중 때문
돈·기회 ‘선점’한 스타급에 밀려
잠재력에도 기회 놓친 선수 많지만
이런 박탈·착취는 쉽게 포착 안 돼
‘값비싼 신호’ 향한 욕망의 세상
‘복권당첨자’ 의심 없이 숭배해
이를 ‘능력주의’로 정당화
땀·노력 대가 인정해야 하지만
사회에 기여한 실질 가치 보상을
한국의 스포츠스타에 대한 기사를 보니, 해외로 진출한 어느 투수는 공 하나를 던질 때마다 884만원을 받았고, 어느 축구선수는 1분을 뛸 때마다 313만원을 벌었다는 계산이 얻어졌다고 한다. 광고나 기타 수입 말고 연봉만 따진 것이다. 팬들은 아마도 그들의 빛나는 재능과 엄청난 양의 노력에 대한 찬사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이 많은 훈련을 소화한다. 다른 선수들의 수십~수백배에 해당하는 연봉을 받는 것이 수십~수백배의 훈련을 했기 때문일 수 없다.
스포츠스타뿐 아니라 유명 영화배우, 가수 등이 얻는 수입은 상상을 초월한다.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과학자들에게 주어지는 노벨상 상금이 공동수상자 전체에게 10억원 남짓이라는 점이나 위대한 사상가들의 책값이 얼마인지를 생각한다면, 이들이 관중에게 제공하는 쾌감의 가격은 엄청난 사치로 여겨진다. 그에 비하면 구급대원, 식료품과 필수품의 생산과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들, 대중교통이나 택배 기사, 탁아, 양로, 보육시설 등의 종사자들이 맡고 있는 이 사회에 필수적인 일들은 거의 공짜로 제공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에서 의사들의 필수성을 생각할 때, 최근 정부의 졸속 행정으로 불거진 의정갈등에서 보인 의사들의 연봉에 대한 대중의 막연한 반감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극단적인 예로, 가사 노동은 인간의 생존과 사회의 재생산에 갖는 필수성에도 불구하고 아예 무보수로 이루어지고 있다. 시장에서 매겨진 가격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보는 자유시장 경제의 결과다.
이렇게 무분별한 시장가격을 매기는 이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성공한 이들의 재능에 열광하는 군중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스포츠나 연예계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에는 진화적인 이유가 있다.
환호의 대상이 되는 육체적 능력, 외모, 예술성은 지난 글 ‘유한계급이 된 호모 루덴스’에서 예로 든 동물의 세계나 원시 인간사회의 ‘값비싼 신호’를 연상케 한다. 새들의 지저귐과 화려한 색, 수사자의 갈기, 길고 화려한 수컷 공작의 꼬리, 사슴의 크고 아름다운 뿔, 화려한 맨드릴의 얼굴, 톰슨가젤의 대담한 행동, 수렵채집인의 사냥 기술 같은 것들 말이다. 결국 짐승이나 원시인들과 아무 다를 바 없이 현대인들도 비슷한 종류의 ‘값비싼 신호’에 열광하며 기괴한 시장 수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스포츠나 예술에는 특출난 재능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많은 부모들은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과거에는 없었으나 현대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값비싼 신호’ 중 하나는 바로 학력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학업 역시 예술이나 스포츠 못지않게 타고난 재능이 필요한 영역이다. 학업성취도에 미치는 유전인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는 유수 국제학술지들에 여러 편의 논문으로 발표되는 등 유전학 분야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삼성서울병원,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등이 주도한 한국인에 대한 연구에서도 유전자의 영향력이 밝혀져 2023년 ‘네이처 인간행동’에 발표되었다. 이러한 연구의 선구자 중 하나인 텍사스 오스틴 대학의 캐스린 하든 교수는 한 인간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학력이 유전자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있다는 사실을 빗대어 ‘유전자 복권(genetic lottery)’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물론 성공에 영향을 주는 것은 재능만이 아니다. 소위 집념, 끈기, 열정 등으로 번역되는 ‘그릿(grit)’이나 지적 호기심, 성장하고자 하는 동기 혹은 좋은 성적을 얻고자 하는 욕심과 같은 ‘비인지적(noncognitive)’ 자질도 중요하다. 그러면 이런 자질들은 유전자의 통제를 받지 않는 순수한 후천적 노력의 영역일까? 하든 교수는 인지능력에서는 비슷한 점수를 보이지만 교육성취도에서 차이가 났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 질문을 다루었다. 결론적으로 ‘네이처 유전학’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학업성취도에 영향을 주는 유전학적 변이의 57%가 비인지적 자질들에 의해 설명된다.
본 연재의 두번째 글 ‘위대한 동물, 호모 이코노미쿠스’에서 자세히 설명했듯이, 생태학적 착취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의 경제학적 착취 역시 제한된 자원과 기회를 단지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선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스타급 선수들은 가장 먼저 연봉협상에 나서 구단이 줄 수 있는 돈의 가장 큰 부분을 선점하게 된다. 이들에게 밀려 어쩌면 더 많은 훈련을 수행하고 더 높은 잠재력을 지니고도 출전 기회를 얻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을 것이다. 인기 배우들에게는 좋은 작품의 주연을 맡을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이 돌아가며, 인기 가수들은 훌륭한 곡을 받고 뛰어난 음반제작사들과 작업할 기회를 차지할 수 있다. 2021년 국세청 자료를 보면 상위 1% 가수들의 1인당 소득은 38억원으로서 나머지 99%의 1인당 소득 1100만원의 345배에 달했다. 운동선수의 경우도 상위 1%의 1인당 소득이 하위 99%의 100배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러한 기회 박탈 과정이나 경제학적인 착취와 같은 것이 인간의 인식에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당장의 이익이나 손실은 쉽게 눈에 띄지만 그것이 집단 내 다른 누군가의 손실이나 이익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은 잘 인지되지 않는다. 어째서 착취를 행하는 자나 당하는 자들마저 이 과정을 이토록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생물학적으로 우리 모두는 가치를 생산해낸다는 경제학적 관념 없이, 오직 자연에 존재하는 자원을 최대한 확보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진화해왔다. 따라서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집단 전체 가치의 양과 거기에서 내가 취해가는 부분의 양에 대한 균형을 맞추는 도덕적 판단 기제와 그에 상응하여 집단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는 자기조절 행동을 진화시키지 못했다.
영국의 동물학자 윈 에드워즈는 집단 전체를 위해 스스로의 번식률을 감소시키는 등 동물 개체의 자기조절 능력이 있고, 이것은 집단 수준에 작용하는 자연선택의 결과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이타적인 개체들이 많은 집단이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논리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집단선택설을 대변하는 것인데, 가장 흥미롭게 사용된 예시는 레밍이라고도 불리는 나그네쥐들의 소위 집단자살 현상이었다. 엄청난 번식력을 가진 이 쥐들은 몇년에 한 번씩 수천 마리가 바닷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는데, 집단선택론을 지지하던 학자들은 개체군의 밀도가 너무 높아지거나 먹이가 부족하게 되면 늙은 쥐들이 후손들을 위해 스스로 떨어진다는 추론을 했다.
그러나 연구 결과 떼죽음의 이유는 먹이를 찾아 우르르 몰려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벼랑 끝에서 멈추지 못하는 데다 뒤에서 따라오는 다른 쥐들에게 밀려서 떨어지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의 만화가 게리 라슨이 풍자한 그림을 보면 함께 죽으러 가는 쥐들 사이에 구명 튜브를 하고 있는 쥐 한 마리가 있다. 결국 몇세대만 지나면 이 나그네쥐 집단은 구명 튜브 모습을 한 이기적 유전자가 지배하고 있을 것이고 집단자살이라는 현상은 진화의 역사 속에서 금세 사라지게 될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전체 자원의 양과 집단 내 개체의 수를 인지하여 자기조절을 하는 유전자라는 것은 아예 없었거나 나타났어도 한두 세대 만에 소멸했을 것이므로, 애초에 생명의 역사에 집단자살과 같은 희생적인 현상 따위는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집단선택론의 모순은 이렇게 만화 한 컷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벌이나 개미와 같은 소위 사회적 동물들이 예외적으로 보이는 이타적인 행동마저 유전학적 수준에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네번째 글 ‘유전자와 교육열’에서 소개한 ‘포괄적 적합도’ 및 혈연선택 이론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일개미의 경우 스스로 자식을 낳지 않으며 여왕개미와 다른 일개미들을 돌보고 먹을 것을 나누고 심지어 목숨을 바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것은 개미의 성 결정 시스템으로 너무나 잘 설명되는데, 한 여왕개미가 낳는 모든 암컷 자매들은 서로 유전자를 공유하는 정도가 무려 75%나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부모와 자식 간의 근친도가 50%인데, 75%의 근연도라고 하면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보다 더 지극 정성으로 돌볼 수 있다. 즉 개미는 자신이 자식을 낳아 50%의 유전자를 공유하는 후대를 기르는 것보다 어머니인 여왕개미를 도와 75% 근친도를 가진 자매를 계속 낳도록 돕는 것이 훨씬 이득인 셈이다. 불행히도 집단선택이란 일어날 수 없으며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조차 실은 혈연 이기주의일 뿐이다.
집단선택의 부재 속에 ‘값비싼 신호’를 향한 욕망이 낳은 세상에서 복권당첨자들은 숭배받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며 또한 숭배의 과정을 통해 착취해가는 가치의 정당성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이를 ‘능력주의(meritocracy)’라 불렀으며,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예일 대학의 대니얼 마코비츠 교수는 <엘리트 세습>에서 이런 세태를 비판한다. 반면 소위 명문대라고 자부하는 K대와 Y대의 가을 축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일부 젊은이들의 공정에 대한 관점은 기계처럼 공부만 해온 머리에서 나온 딱 그만큼이다. 서울캠퍼스 학생들은 본인들이 더 좋은 성적으로 입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캠퍼스 학생들과 ‘명문대생’이라는 사회적 타이틀을 함께 누리는 것은 불공정하다며, 이들을 아예 다른 학교 학생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짝퉁’이나 ‘저능아’ 등 조롱과 멸시의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런던 대학교 장하준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높은 교육 수준이 한 국가의 경제적 번영으로 이어진다는 증거는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스위스 패러독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된 나라인 스위스의 대학 진학률이 다른 잘사는 나라들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데, 이는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얼마나 낮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장하준 교수는 고등교육의 주된 목표가 생산성과 관련된 지식과 기술의 전수보다는 피교육자들을 고용 시장에서 순위를 매기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고등교육을 받고 높은 연봉을 받는 인력들이 많다고 해서 나라 전체의 생산성이 높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명문대생’들이 가치의 생산보다는 착취에 특화된 일들에 몰두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물론 노력할 수 있는 자세마저 유전자의 영역이라고 해서 좋은 위치로 가는 데 성공한 이들이 실제로 땀 흘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땀과 노력의 대가도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경제학적으로’ 보상해야 할 것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자 달려간 노력이 아니라, 그 위치에서 노동을 통해 ‘실질적으로’ 사회에 기여한 가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복권당첨자들을 축하해주자. 그러나 숭배하지는 말자.
카이스트 교수로 2009년부터 재직하며 인간유전체학을 연구하고 있다. 연구목표는 암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유전학적 원인 규명과 진단 및 치료기술 개발이며, 진화론을 접목하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데 관심이 많다. 아산의학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선정 과학기술인상을 포함해 여러 학회의 학술상을 수상하였고, 과학기술한림원 선도과학자,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에 선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