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꽃다운 생명을 바쳤어요. 우리 부모들이 죽고 없어져도 나라에서 기억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서울교대 학생으로 1987년 학내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숨진 뒤 전국 교대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박선영 열사의 어머니 오영자씨(84)는 지난 29일 오후 용산 대통령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민주유공자법)’ 등 야당 주도로 통과시킨 4개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민주유공자법 등은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오씨를 포함해 80세를 훌쩍 넘긴 고령의 민주열사 유가족들은 “대통령이 민주유공자들을 원래 자리로 복원시키라”며 울분을 토해냈다.
성신여대 학생회장으로 1996년 학내 민주화 운동을 하다 단식 투쟁 이후 숨진 권희정 열사의 어머니 강선순씨(81)도 함께 했다. 강씨는 “30년을 싸워 통과시킨 법안을 대통령이 하루 만에 거부했다”며 “어제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뒤 ‘제발 오늘만 넘기자’고 했지만 결국 넘지 못해 암담하다”고 말했다. 오씨도 “대통령은 김귀정과 박종만 등에게 훈장을 줬는데 그 훈장은 민주화운동을 인정한 것 아니냐”며 “그때는 인정하고 지금에 와선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소리를 높였다. 김귀정 열사는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가 경찰에 맞아 숨진 뒤 열린 규탄시위에 참여했다가 또 다시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사망했다. 박종만 열사는 1984년 노조 간부 부당해고에 맞서 택시기사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했다.
윤 대통령이 거부한 민주유공자법은 박종철과 이한열, 전태일 등 민주화운동을 하다 희생된 노동자와 농민·학생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데 대한 비판에서 시작됐다. 법안은 이미 특별법이 마련된 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외에도 민주화운동을 하다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고 다친 사람을 유공자로 인정하고 본인과 가족에게 의료 등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가족들은 이 법이 민주열사의 명예 회복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씨는 “전태일은 죽은 지 50년이 넘고, 한열이와 종철이는 37년, 우리도 28년째인데도 피켓을 들고 있으면 여전히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세금 가져간다고 도둑이라고, 빨갱이라고 한다”며 “적어도 법안이 통과되면 이런 일은 당하지 않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1989년 노동운동 중 분신한 김윤기 열사의 어머니 정정원씨(86)도 “내가 데모하지 말라 해도 어깨를 조물조물 주무르며 ‘다 같이 잘 살기 위한 일이니까 조금만 기다리라’던 아들이었다”며 “다 같이 잘 사는 운동하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국가가 명예회복이라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민주유공자법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가짜 유공자’를 만들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반박했다. 이창훈 민족민주열사 추모연대 집행위원장은 “민주유공자법의 대상자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고 행적은 민주화운동 백서에도 수록해놨다”며 “기준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