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했던 언니를, 애끓던 엄마를, 지켜본 동생을…그날의 악몽은 집어삼켰다

임아영 젠더데스크

⑤ 남은 이들의 상처, 우리의 숙제

‘집단 강간’ 당한 언니, 수차례 자살 시도

엄마는 평생을 속앓이, 이유 모른채 사망

7년 전 처음 듣게 된 진실, 언니 대신 나서

“살아있어 다행이라고요? 때론 더 고통”

바람은 언니도, 자신도 홀가분하게 살아가는 것

수화기 너머의 언니는 제초제를 한 컵 따라놓았다고 했다. “죽겠다”고 했다. 알코올 중독에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던 언니였지만, 7년 전 그날 처음 꺼내놓은 얘기는 이민순씨(63·가명)의 몸과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이 떨리게 만들었다. 언니 진순씨(66·가명)는 그날 처음으로 5·18 당시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동생에게 털어놓았다.

진순씨는 22세였던 1980년 5월 이후 정신을 놓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3남4녀의 둘째딸로 평범하게 자라 온 진순씨였다. 가족들은 진순씨가 시가(시댁) 식구들의 반대로 목포에 두 아이들을 두고 쫓겨 나와서 그렇다고 짐작했다. ‘공수부대원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횡행했던 날들이 지나고 나주 친정으로 온 진순씨는 넋이 나가 있었다. 밤낮으로 우는 언니를 보고 민순씨는 언니가 실성했나 생각했다.

이듬해부터 언니는 광주에서 혼자 살았고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고통에 빠졌다. 엄마는 둘째딸을 돌려놓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엄마는 평생 딸 걱정만 하다가 1998년 세상을 떠났다. 딸이 왜 그렇게 됐는지도 끝내 알지 못한 채였다. 민순씨는 미웠지만 언니마저 놓을 수 없었다. “언니 이진순은 지금까지 죽음의 기로에서 방황하였고 저 이민순은 죽음을 붙잡았습니다.” 지난 25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만난 민순씨는 두 사람의 인생을 짤막하게 요약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부터 집단강간을 당한 언니의 피해를 규명하기 위해 애써온 이민순씨(가명)가 24일 서울 신길동의 한 건물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이씨는 뒷모습 촬영을 요청했다. 김창길 기자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부터 집단강간을 당한 언니의 피해를 규명하기 위해 애써온 이민순씨(가명)가 24일 서울 신길동의 한 건물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이씨는 뒷모습 촬영을 요청했다. 김창길 기자

언니의 피해,
‘집단강간’이라는 사실을 44년 만에 알았다

7년 전 비로소 언니가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왜 회복 불가능한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된 민순씨는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광주시청, 정부의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이하 조사위) 등을 뛰어다니며 피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자 언니는 오히려 동생에게 ‘이년아 우세스럽게 누가 그거를 하라고 했냐’며 한동안 대화를 거부했다. 그래도 민순씨는 “자국 군인이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5·18 이후 온가족이 파괴되었고 마음 편한 날이 없었어요. 자국민에 대한 계엄군의 만행을 전국민이 알아야합니다.”

지난해 말 드디어 언니는 조사위의 ‘진상규명’ 결정을 받았다. 민순씨는 한편 위안이 됐지만, 언니는 그 소식을 듣고도 “뭐 인정했다고 별 수 있겠나, 달라지겠나”라고 말했다. 너무 오래 걸린 ‘인정’이었다. 민순씨는 지난달 조사위로부터 조사보고서를 받고 언니의 강간이 ‘집단 강간’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당했다고만 해서 그런지 알았지, 집단으로 당한지 몰랐어요. 언니 아픔이 컸다는 걸 이해하게 됐어요.” 언니의 아픔이 옮겨온 것처럼 한 달을 앓았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게 이해됐어요. 저라도 전 언론에 보도되게끔 하겠다고 다짐했고 각오하게 됐습니다.”

진상규명 결정이 됐어도 자매의 삶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진순씨는 여전히 알코올중독이며 돌아가신 엄마 산소를 돌보며 전남 나주에서 혼자 산다. 민순씨는 언니를 보며 마음 아파했다가 원망했다가 편치 않은 인생을 한탄하고 있다. 민순씨는 다른 형제들이 언니의 피해에 대해 알지 않길 바란다. 자신처럼 가슴이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부터 집단강간을 당한 언니의 피해를 규명하기 위해 애써온 이민순씨(가명)가 24일 서울 신길동의 한 건물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이씨는 뒷모습 촬영을 요청했다. 김창길 기자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부터 집단강간을 당한 언니의 피해를 규명하기 위해 애써온 이민순씨(가명)가 24일 서울 신길동의 한 건물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이씨는 뒷모습 촬영을 요청했다. 김창길 기자

5·18 인생이 바뀐 그날…
거부했던 언니, 조사로 밝혀진 언니의 사정

1980년 진순씨는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와 목포 시가에서 연년생의 두 아들을 낳고 살고 있었다. 시가 식구들은 진순씨가 학력이 낮다는 이유로 구박했고 진순씨는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다.

결국 그해 5월 시가에 두 아들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나주 친정으로 가려 했지만 버스가 운행하지 않아 무작정 걸었다. 검문소 쪽으로 가면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는 말에 산 속으로 걸었다. 잠시 멈춰 울고 있었는데 세 사람 정도가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진순씨를 땅바닥에 눕혔고 2명이 차례로 강간했다. 이때 총이 부딪혀 ‘탁’ 하는 소리를 들었고 군인에게 저항하면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중에 돈 벌어서 아이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사정했다. 그들이 떠나고 산 속으로 올라가기에는 무서워 반대 방향으로 걸었는데 또 한 사람이 나타나 세 번째 강간을 했다.

조사위는 “총 2회 3명에게 강간당했고, 총 같은 걸 바닥에 내려놓는 ‘탁’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감각기억에 대한 핵심 진술의 일관성이 유지된다고 판단한다”며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조사위는 이 사건을 ‘외곽봉쇄작전 상황에서 발생한 성폭력’으로 구분하고 당시 목포 양을산 일대에서 5·18 당시 작전을 수행한 부대는 제31사단 93연대본부와 1대대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진순씨는 여러 차례 자살 시도를 했다. 1980년 저수지에 뛰어내렸지만 살았고,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었을 때는 골반에서 뼈를 떼서 팔에 이식수술을 했다. 자살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 국립나주정신병원에 찾아갔지만 입원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조사위에서도 2015년 9월 음독자살 시도 후 나주병원을 거쳐 전남대병원에서 위세척한 기록, 나주병원에서 ‘중증 우울증’으로 진단받은 기록을 찾아냈다.

집단강간 피해는 큰 후유증을 남겼다. 조사위는 조사 대상 사건 52건 중 3명 이상으로부터 집단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1980년 이후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0대 중후반, 20대 초반 여성의 다수가 며칠 만에 귀가해 수개월 시름시름 앓다 사망하거나 정신분열증이 발병하여 만성화되거나 사건 후 수년이 지나 자살하거나 현재까지 폐쇄병동에 입원해 있는 피해자도 있다. 이진순씨는 ‘생존자’ 즉, ‘(간신히) 살아남은 자’일 수 있다.”

-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 보고서.

진순씨도 처음에는 “여자로 태어난 자신의 잘못이며 사건을 되새기고 싶지 않다”며 조사를 거부했다. “진상규명 되면 좋겠지만 그런 결론이 난다고 해서 뭔가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관들이 거듭 설득하자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 당한 사람은 평생 아프기 때문이다. 죽으면 잊을까, 절대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며 조사에 참여했다.

조사관들은 평생 사람을 멀리 해 왔던 진순씨의 마음의 문을 계속 두드렸고 진순씨도 피해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민순씨는 “언니가 조사관님들이 또 오시냐고 물어보고 그분들을 보고싶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조사보다도 사람이 그리웠던 거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다.

조사 과정에서 진순씨가 왜 그렇게 술을 찾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들 수 없는 이유로 ‘아들 둘을 돈 벌어 찾아야 한다. 그러니 살려달라’라고 군인에게 사정했는데, 이 부분이 가장 후회되는 기억이라고 했다. 진순씨를 조사했던 이다감 상담전문가는 “피해 이후 ‘더럽혀진 엄마’라는 자책 때문에 적극적으로 자식들을 찾으러 나서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진순씨는 평생 아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진순씨는 조사 후 두 차례 만취 상태에서 조사관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그는 “선상님, 다 내 팔자가 박복해서 그런 일이 (중략) 살려달라고 빈 것이 제일 죽고 싶더라우, 뭐 하러 목숨을 구걸 했을까라”라며 흐느껴 울었다.

“언니는 피해자들이 모이는 자리도 못 갔어요”
“오히려 그때 죽었으면 고통이 길지 않았을까”

지난달 28일 광주에서 5·18 성폭력 피해자들이 44년만에 처음 만났지만 진순씨는 가지 못했다. 민순씨가 대신 참석했다. 전날 민순씨는 나주에 들러 언니를 만났다. 피해자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언니가 민순씨를 안아줬다. 5·18 이후 언니가 안아준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한을 제가 대신 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에요.”

지난달 28일 이민순씨(가명)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들이 처음 만난 간담회에 인형을 가져가 자신과 언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지난달 28일 이민순씨(가명)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들이 처음 만난 간담회에 인형을 가져가 자신과 언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효진 기자

민순씨는 5·18과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물품으로 ‘인형’을 준비했다. 양갈래 머리가 큰 인형이 민순씨에게는 자신과 엄마와 언니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언니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제 머리에는 두 사람이 늘 이렇게 잠재돼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민순씨는 언니가 이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피해자이면서도 그 자리에 나오지 못하고 어울리지 못했잖아요.”

민순씨는 “그럼에도 살아있는 게 다행”이라는 말은 공감되지 않는다고 했다. 평생 은둔 생활을 한 언니를 지켜보면서 그는 “오히려 그때 죽었으면 언니도 고통이 길지 않았을 것이고 가족들도 이만큼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힘들 땐 ‘언니를 죽이고 나도 죽을까’라는 생각도 했죠. 남은 사람들은 편하지 않을까 하고요.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라 생각할 때가 있어요. 언니를 잊어버려야지 했다가도 이 끈을 끊을 수 없는 게 병이구나 생각하며 세월이 흘러갔어요.”

민순씨는 자신과 가정을 소홀히 하고 살았다 생각한다. 보험사에서 20여년간 영업을 하며 딸을 키웠다. 영업이 잘 맞진 않았고 “웃지 않는다”는 지적도 받아야했다. “언니가 아프니 웃을 일이 없었어요. 내성적이고 낯가림도 심한데 웃지도 않으니 저한테 맞지 않은 일을 한 거죠. 그럼에도 이기려고 노력했어요. 자포자기하고 언니처럼 살기 싫었거든요.”

조사위는 그의 피해에 대해 ‘간접 피해’라고 정의했다. 이다감 상담전문가는 민순씨는 언니의 피해를 인지한 후 현재까지 ‘대리외상’을 입은 상태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 상담가는 “피해자가 사건 후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지 못하고 치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여겨질수록, 피해 사실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가족이 갖는 무력감과 죄책감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며 “‘피해자 가족이 느끼는 분노와 고통’의 이면에는 ‘언니가 정상적인 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뿐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의 고통이 멈추기를 바라는 소망’도 크다”고 말했다.

민순씨는 언니의 피해 사실을 알고나서 ‘턱관절 장애’가 생겼다. 대학병원에서는 이를 악무는 습관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씨는 “언니는 현실을 잊으려고 술을 먹고 나는 이 일을 꼭 밝혀야겠다며 이를 악물게 됐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언니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홀가분하게 살길”
“저 또한 이 일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민순씨는 “언니 피해가 온 가족의 피해가 됐다고 강조하고 싶다”고 했다. 언니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엄마가 살던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지금도 민순씨가 언니 전화요금과 관리비 등 한달에 20만원 정도를 쓴다.

언니의 피해를 신고한 이후 민순씨는 ‘소명서 달인’이 됐다. 그는 매일이라도 소명할 수 있다며 기자에게 소명서 여러 장을 건넸다. “정신적 피해 보상과 책임은 국가에게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국가는 보듬어줘야 합니다. 오늘 만난 이 기사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야 할 것입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들 간담회가 열린 지난달 28일 전남대 김남주홀에서 한 참가자가 이민순씨(가명)의 소명서를 대신 읽고 있다. 정효진 기자

5·18민주화운동 당시 성폭력 피해자들 간담회가 열린 지난달 28일 전남대 김남주홀에서 한 참가자가 이민순씨(가명)의 소명서를 대신 읽고 있다. 정효진 기자

민순씨는 정부가 5·18 성폭력 피해에 대해 ‘신체적 장해’ 기준으로 보상 기준을 정한다는 얘기를 듣고선 “울분을 금할 길이 없다”고 했다. “국가폭력으로 인해 한 가정이 무너졌어요. 신체적 장해 기준으로 피해가 가볍다고 본다면 병원도 제대로 다니지 않은 언니의 피해는 어떻게 평가하나요. 저는 목숨을 내놓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한 정신적 피해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참여할 계획이다.

엄마를 생각하면 한이 맺힌다. 언니 때문에 엄마가 하루도 편히 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편 언니가 엄마 산소를 찾아 우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마음이 안 좋다. 이씨는 “언니는 엄마 살았을 때도 울고 다니더니 엄마 죽어서도 울면서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어떨때는 화장을 할 걸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언니가 찾아가지 못하잖아요.”

민순씨가 바라는 것은 ‘언니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홀가분하게 사는 것’이다. 그는 “국가가 언니의 여생을 보살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언니는 알코올 중독자로 취급하지 말고 5·18 피해로 정신장애가 생겼으니 국가에서 언니 아픔을 인정해주고 명예를 회복해주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자신은 이 일들을 빨리 잊고도 싶다. 그는 고향이 싫다. “나이 들면 회귀 본능이 있어서 고향을 가고 싶어한다는데 저는 그립지 않아요. 그리운 추억이 없으니까요.”

“우리 나이 되면 자매들이 여행 다니면서 자식들보다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는 자매들끼리 만나도 웃을 일이 없으니 만나기가 어렵죠. 엊그제 광주에서 만난 동생이 ‘다른 집은 자매들끼리 여행도 가는데 우리만 이러고 산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우리도 여행 가보자’고 답했지만 어디를 가도 언니를 빼놓고 가면 마음에 걸려요. 안 가는 게 마음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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