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 명서초등학교 여자축구부
‘엘리트 체육’ 아닌 ‘성장의 체육’
2패로 대회 마무리했지만…“내일도 훈련해요!”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정신을 한 곳에 기울이면 어떤 일이라도 이룰 수 있다)!”
지난달 22일 오후 7시 경남 합천의 한 축구장, 질끈 묶은 머리를 맞댄 아이들이 외치는 구호가 굵은 빗방울을 뚫고 운동장에 울렸다. 경기를 앞둔 창원 명서초등학교(교장 박정화) 여자 축구팀 주전 여덟명의 기세가 제법 등등했다. 제32회 여왕기 전국여자축구대회 초등부 3조 예선전 마지막 경기, 이틀 전 대구 상인초와의 1차전에서 0대4로 패배한 명서초는 전국소년체전에서 준우승한 강원 강릉FC U12를 이겨야 조 2위까지 진출하는 8강을 기대할 수 있었다.
“우리 애들이 비오는 날 경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잘 적응 할 수 있을지 걱정이네요.”
명서초 이진희 감독(40)이 비를 맞으며 뛰는 선수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축구 경력이 길다면 다양한 환경에서 경기를 했을테지만, 12명의 부원 중 9명이 올해 축구를 시작한 명서초 아이들은 수중전 경험이 없다. 평균 축구경력 9개월. 처음 겪는 수중전. 긴장했던 첫 경기와는 다르게 아이들은 강릉FC를 상대로 다부진 경기를 펼쳤다. 골키퍼 최원경양(12)의 선방으로 잘 버티던 명서초는 전반 막판 2실점 하며 전반을 0대2로 마쳤다.
명서초에 처음부터 ‘선수될 결심’으로 축구를 시작한 선수는 없다. 축구를 좋아한다면 별다른 각오나 재능 없이도 축구부에 들 수 있다. 학업 대신 운동에 전념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이른바 ‘엘리트 체육’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한국여자축구연맹에 등록된 어엿한 선수로, 전국의 쟁쟁한 축구팀과 동등한 자격으로 각종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이 감독은 “입상 때문이라기 보다는 축구를 통해 아이들이 성장하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방점은 축구보단 ‘성장’에 찍힌다. 축구장 밖에서도 아이들은 자란다. 명서초는 아이들이 대회 때문에 혹여 학업에 뒤처지지 않도록 보충수업 등을 충실히 지원한다. 아이들은 대회를 위해 전국을 돌면서도 책 한 권씩은 꼭 챙겨다닌다. 수학 자습서부터 스티븐 스필버그 위인전까지 취향도 가지각색이다.
축구부 문턱이 낮다고 해서 축구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까지 낮잡아 봐서는 곤란하다. 주장 이수현양(12)은 대회를 앞두고 좋아하던 젤리를 끊었다. “탄산, 과자도 안 먹어요. 운동을 잘해야 하니까요.” 원경양은 대회 일정 때문에 수학여행을 포기했다. ‘초등학교 마지막 수학여행’이란 이유로 말리는 엄마에게 원경양은 ‘눈물의 투쟁’으로 맞섰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란 절박한 호소가 엄마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지안양(11)은 힘든 일을 자처하는 근성이 생겼다. “낙하산 훈련(낙하산을 등에 매달고 저항을 높여 달리는 체력훈련)이 재밌어 보였는데 막상 제일 힘들다”던 지안양은 경기를 앞두고 숙소 공터에서 낙하산을 메고 몸을 풀었다.
“골 넣으면 할 세레머니 준비했어요.” 강릉FC와의 경기 전 준비한 것이 있냐는 물음에 조시은양(10)이 답하자 옆에 있던 이수현양이 말했다. “감독님한테 먼저 달려가야지.” 아이들은 첫 골의 기쁨은 자신들을 살뜰히 챙겨준 이 감독과 함께 나눌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이들이 이 감독에게 달려가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명서초는 후반에만 4실점하며 0대6으로 강릉FC에 패하며 여왕기 여정을 마무리 했다.
“경기 중 대화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수현).” “수중전에서 힘들었는데 체력을 더 키워야 될 것 같아요(황희정, 12).” “골문 양 옆으로 오는 슛 막는 연습을 할거에요(원경).” 첫 경기 패배 후 눈물을 보였던 아이들은 덤덤했지만 저마다 부족한 부분을 되새겼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후회는 없어요.” 대회 기간동안 아이들의 끼니를 책임진 식당 사장님이 준비한 수박을 먹으며 말하는 박가인양(10)의 모습이 야무졌다.
“아이들이 단기간 동안 정말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 ‘정신일도하사불성’ 말대로 스스로를 믿고 뛰어준 아이들이 대견해요.” 대회를 마친 소감을 말하는 이진희 감독의 목소리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숙소로 가는 버스에 오르는 아이들이 이 감독을 향해 외쳤다. “감독님, 저희 내일도 훈련하면 안돼요? 훈련해야 더 잘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