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조작 ‘유럽 간첩단’ 피해자 54년만에 재심 무죄 확정

유선희 기자

검찰, 또 ‘법정진술’ 문제 삼았지만

항소심 재판부 “가혹행위 심리적 압박 계속,

임의성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 있어”

유럽 간첩단 사건의 피고인으로 나온 고 박노수씨(앞줄 오른쪽) 등이 법정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진 크게보기

유럽 간첩단 사건의 피고인으로 나온 고 박노수씨(앞줄 오른쪽) 등이 법정에 앉아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대표적 공안조작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유럽 간첩단 사건’ 피해자가 재심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유죄 판결을 받은 지 54년 만이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10일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82)에 대한 재심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지난달 13일 확정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1966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중 북한 공작원과 접선해 지령 서신을 전달하고 사회주의 관련 책을 읽은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에 넘겨진 김씨는 1969년 징역 7년과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항소심과 대법원에서도 같은 형이 선고됐다.

1960년대 박 정권의 대표적인 공안조작 사건인 ‘유럽 간첩단 사건’은 1967년 ‘동베를린(동백림)’을 방문한 유학생들이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간첩활동을 했다는 내용이다. 1969년 중앙정보부는 박노수 당시 케임브리지대 교수와 김규남 민주공화당 의원 등이 동베를린을 방문해 입북한 혐의로 기소했다. 같은 해 이들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1972년 사형이 각각 집행됐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김씨가 박 교수에게 포섭됐다고 주장했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유럽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피해자들이 수사당국으로부터 불법체포·구금돼 가혹행위를 당하며 수사를 받았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폭력과 고문 등 가혹행위로 자백을 받아낸 뒤 간첩활동 등 혐의로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였다.

이후 피해자들의 유족은 재심을 신청했다. 박 전 교수와 김 전 의원은 재심을 거쳐 2015년 대법원에서 모두 무죄를 확정받았다.

김씨 측도 2022년 재심을 청구했다. 검찰은 “김씨가 과거 법정에서 변호사 조력을 받고 자백을 일부 부인하기도 할 정도의 의사 표현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여전히 유죄인 부분이 있다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구형했다. 그러나 재심을 심리한 서울고법은 지난 2월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김씨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불법으로 연행돼 폭행과 물고문, 전기고문을 비롯한 강제 수사를 받다가 못 이겨 자백했다”며 “이러한 불법 구금 등 상태가 연장돼 재판 절차에까지 이르게 된 경우라면, 김씨가 법정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아 공소사실을 일부 부인하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는 정도의 사정만으로 김씨의 심리적 압박 상태가 해소됐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법정에서도 그 심리상태가 계속돼 임의성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고, 검사가 이를 해소했다고 볼 수 없다”며 “일부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김씨의 법정진술 역시 임의성 없는 자백에 해당해 증거능력이 없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검찰이 불복했지만 대법원은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에 잘못이 없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항소심 판결 이후 약 6개월이 걸렸다.

대법원은 “원심 판단에 논리와 경험의 법칙을 위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진술의 임의성, 증거능력, 국가보안법위반죄와 반공법위반죄 성립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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