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 소위원회가 소위 위원들간 의견이 전원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정을 기각한 것은 위법하다는 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인권위가 항소하지 않은 것으로 8일 확인됐다.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패소를 받아들인 것이다. 의결정족수 방식을 바꿔야한다고 주장해온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은 “항소포기는 인권위원장의 범죄행위” “형편없는 판결”이라고 비난하며 전원위원회 보이콧 등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지난달 26일 서울행정법원이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제기한 ‘인권위 진정사건 기각 결정 취소 소송’에서 인권위 측 패소를 선고한 데 대해 지난 7일 항소포기서를 제출했다고 이날 밝혔다. 인권위 측은 “인권위법 제정 취지와 23년간의 위원회 운영 관행, 1심 법원의 판단 내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법무부 장관의 항소 포기 지휘를 받아 전날 항소포기서를 제출했다”며 “인권위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인권위는 정의연이 낸 진정을 기각한 결정을 취소하라’는 취지의 1심 판결은 확정됐다.
‘인권위 패소’ 정의기억연대 진정사건 결정 취소 청구 소송은
인권위는 출범 후 지난 23년간 소위원회에서 위원 3인의 의견이 만장일치가 되지 않으면 안건을 재논의하거나 전원위원회에 올려 논의를 이어왔다. 인권위법은 ‘구성위원 3명 이상의 출석과 3명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같은 관행에 김용원 상임위원 등 일부 위원이 제동을 걸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이들은 위원간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진정 사건을 기각·각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상임위원이 소위 위원장인 침해구제제1위원회는 2022년 1월 ‘수요시위를 혐오단체로부터 보호해달라’는 취지로 정의연이 낸 진정에 대해 ‘기각 의견’ 2명, ‘인용 의견’ 1명으로 의견이 갈리자 지난해 9월12일 해당 진정을 기각했다.
이에 정의연은 이같은 인권위 소위 판단이 부당하다고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달 26일 서울행정법원은 정의연 측 손을 들었다. 법원은 “기각 처분은 의결정족수 3명의 찬성이 없어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면서 “인권위는 20년 넘게 진정인의 권리 보호를 위해 위원들의 의견이 일치된 경우에만 진정을 기각해왔다”며 “별도의 공론화와 의견 수렴 없이 종전의 해석을 뒤집는 건 평등 원칙과 신뢰 보호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이콧 이어가는 이충상 “형편 없는 판결문”, 김용원 “항소 포기는 범죄행위”
1심 판결이 확정됐지만 인권위 내홍은 계속될 전망이다. 소위 의결 방식 변경을 요구하며 인권위 회의를 보이콧해온 일부 위원들은 기존 방침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충상 상임위원은 이날 경향신문에 보낸 입장문에서 “행정법원 판결문을 읽어봤는데 아주 형편 없는 판결문이었다”며 법원 판결을 비난했다. 이어 “대법원은 결코 (그렇게) 판결하지 않을 것이다. 대법원이 인용의견 1명, 기각 의견 2명인 경우 기각할 수 없다고 판결하면 공적·사적 모든 직위에서 사퇴하겠다”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가 천동설의 맹신자들로부터 박해받은 것처럼 박해받고 있다”고 했다. 이 상임위원은 인권위 회의 불참을 계속하겠다고도 했다. 그는 “인용의견 1명, 기각의견 2명인 사건에서 기각 선언을 한 바 있는데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상임위원도 “7명의 인권위원이 항소 의사를 밝혔음에도 인권위원장이 항소 포기로 나아간 것은 단순 위법을 넘어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열린 인권위 상임위원회 회의에 나오지 않았다.
이들 두 상임위원과 한석훈·이한별·김종민·강정혜 비상임위원은 지난 6월26일부터 소위 운영방식을 바꾸는 안건을 표결에 부치겠다는 약속이 없다면 회의에 출석하지 않겠다며 인권위 회의를 보이콧 해왔다. 이로 인해 인권위 업무는 마비 상태에 빠졌다. 이후 열린 두 차례 전원위원회 회의와 다섯 차례 상임위원회에서는 단 한 건의 안건도 의결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