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언급 없는 ‘대통령 광복절 경축사’···“대통령이 역사세탁 공범이냐”

김송이 기자
제79주년 광복절인 15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2024 서대문독립축제를 찾은 시민들이 대형 태극기 앞에서 추억을 남기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다. 조태형 기자 사진 크게보기

제79주년 광복절인 15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2024 서대문독립축제를 찾은 시민들이 대형 태극기 앞에서 추억을 남기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다. 조태형 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15일 광복절 경축사에 일제에 관한 과거사를 언급하지도, 일본을 향한 메시지도 담지 않았다. 시민사회와 학계는 “광복절에 일본의 반성과 책임조차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일본의 역사도발에 용기를 준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이날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윤 대통령이 일제 침략에 따른 피해는 고사하고 일본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 광복절 축사 취지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다른 날도 아닌 광복절 경축사에 일본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고 전례가 없다”며 “일본에 대한 굴욕외교 기조 속에서 일본에 부담이 되거나 갈등이 생길 수 있는 것을 스스로 회피하는 방식으로 경축사가 작성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일본의 책임과 반성을 요구해도 부족할 판에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일본이 역사도발이나 적반하장식 주장을 할 수 있도록 사실상 용기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거행된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 연설에서 ‘일본’을 두 차례 언급했다. 모두 한국과 일본의 경제 상황을 비교하는 맥락에서 등장했다. 일본의 책임 인정과 반성을 촉구하는 말은 없었다. 대통령실은 “한일관계를 지적하지 않았지만 한일관계에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광복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국경일 취지에 부합하지도,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가 여전히 산적한 때에 적절하지도 않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일본군 위안부 연구를 해온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축사에서 과거사 언급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과거사 청산이 끝났고 더는 한국의 과제가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라며 “일본 정부는 국가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을 지우려고 하고 있고 강제동원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광복절에 ‘과거사 청산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은 심각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어 “광복절은 일본으로부터 빛을 되찾은 날”이라며 “그 의미를 모르지 않을 대통령이 오히려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그 의미를 지우려고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나영 정의기억연대 이사장도 윤 대통령의 경축사는 결과적으로 해방의 의미를 축소했다고 비판했다. 이 이사장은 “한반도 불법강점과 일본군 성노예제, 강제동원 등 일제의 식민지·전쟁범죄 책임에 대한 어떠한 언급이 없는 건 물론이고 ‘투쟁’의 대상과 식민화의 주체를 삭제함으로써 독립투쟁과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축소했다”고 말했다.

정의기억연대는 별도 논평에서 “윤 대통령이 일제 전쟁범죄의 역사를 모두 지워준 바로 그 시각 일본 총리는 또다시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하고 각료들과 정치인들은 대규모 신사 참배를 강행했다”며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의 노골적 역사 왜곡과 부정에 공범을 자처했으니 일본 총리의 반성이나 유감 표명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됐다”고 했다.

시민사회는 윤 대통령이 지난해 광복절 축사에 이어 올해도 정권에 비판적인 국민들에게 선전포고했다고 비판했다. 이태호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은 “윤 대통령은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은 ‘검은 선동세력’ ‘사이비 지식인’이라면서 이견을 가진 사람들을 모조리 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며 “역사 부정 세력들이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일을 지우려고 시도할 때 정부가 사실상 방조하거나 앞장서는 입장을 취해왔는데 앞으로도 그런 입장을 변함없이 지속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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