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대회 첫 개최
‘진상규명’ 결정 피해자 13명 참석, 4명 직접 증언
“국가 성폭력, 지금이라도 사과로 상처 치유해야”
1980년 5월, 어쩌면 스칠 듯 가까이 있었지만 서로의 존재는 꿈에도 모르고 살았던 이들이 손을 잡고 한 자리에 섰다.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 ‘용기와 응답’은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 조사 보고서의 번호 뒤에 익명으로 남아 있던 피해자들이 역사의 증언자로 다시 서는 자리였다.
이날 5·18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피해 증언자 모임 ‘열매’ 회원 최경숙(1번), 최미자(7번), 김복희(35번), 김선옥(2번)씨가 이름과 얼굴을 대중에 공개하고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이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국가에서 응답하라고 촉구했다.
📌‘5·18 성폭력 피해’ 44년 만에 모인 10명…“잊을 수도, 말할 수도 없던” 상처를 기록하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국회의원 29명이 공동주최하고 한국여성단체연합,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광주여성가족재단이 연대 기관으로 함께 한 이번 증언대회는 국가가 권고사항을 조속히 시행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와 치유 회복 보상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며 열렸다. 1989년 국회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전옥주씨가 성고문 피해를 증언한 뒤 5·18 성폭력 피해자들이 국회에 서는 건 35년 만이다.
당시 전씨 외에 또 다른 피해자가 강간 피해를 증언하려 했지만, 야당 국회의원들의 만류로 무산됐다. ‘쟁점 사안이 아니다’, ‘너무 끔찍해서 국민들이 믿어줄 것 같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인생을 뒤흔들 정도로 큰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 외면당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국회의원들을 마주하는데 3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최경숙씨(71)는 “피해 얘기를 아무한테도 못하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서지현 검사님이 ‘미투’를 하는 걸 보고 내 나이 칠십인데 나도 말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며 “그게 나한테는 희망이고 꿈이었다”고 말했다.
김선옥씨(66)는 “오랜 세월 피해를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계속 살고 싶었고, 피해에 대해 알리고 싶었고, 어렵게 키운 딸과 시간도 잘 보내고 싶었다”며 “영원히 묻히지 않고 내가 나설 수 있게 용기를 준 모든 분께 감사하고,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앞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지난해 말 조사 대상 19건 중 16건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지난 6월 활동 종료를 앞두고는 이 내용과 함께 피해자 치유와 명예 회복을 위한 권고사항을 명시한 종합보고서를 대통령실에 보고했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 3개월간 피해자에게 진상규명 결정 통지서를 보낸 것 외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열매 대표 김복희씨(63)는 “아직도 세상에 드러나는 게 두렵지만, 다시는 국가가 국민에게 무력으로 불행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하기에 용기를 냈다”고 밝혔다. 그는 “어딘가에서 피해를 드러내지 못하고 사는 열매 회원들이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런 분들도 국가가 보듬어줘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끝까지 관심 놓지 말아주시길 간곡히 부탁한다”고 했다.
증언 발표에 앞서 의원들과 만난 열매 모임 회원 13명은 자신들이 메고 있는 것과 같은 스카프를 의원들에게 하나씩 걸어주고, 반대로 의원들은 열매 모임에게 장미 꽃다발을 건넸다. 이들은 함께 “나는 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국가는 응답하라”는 구호도 외쳤다. 네 명의 증언자들이 때로는 담담히, 때로는 울먹이며 피해 사실을 밝히자 300석 규모의 객석에선 훌쩍이는 소리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증언대회에는 2018년 ‘미투’를 통해 5·18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준 서지현 전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등 대응 TF 팀장도 자리했다. 서 전 팀장은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국가는 우리를 외면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살려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국가의 역할은 분명하다. 피해자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책임 조치를 취하고, 밝혀지지 않은 사건들의 진상을 밝혀내고, 재발 방지 조치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44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낸 여성들의 용기에 국가가 응답해야 한다. 그래야 과거 피해자들에게 큰 용기가 되고, 이 땅에 살아갈 여성들에게 더 나은 희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 피해자들이 처음 만나 ‘열매’라는 모임을 만들고,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9월 초 국회 행사를 준비할 때만 해도 어떤 후원기관이나 연대 단체도 없었다. 그런데 국가배상 소송을 위해 하주희 변호사가 합류하고, 서지현 전 팀장이 국회와의 다리 역할을 하면서 의원들도 하나둘 참여해 이렇게 규모가 커졌다.
윤경회 전 조사위 조사4과 팀장은 “1980년대 ‘정조’ 관념을 갖고 있는 여성이 대중 공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정말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라며 “1989년에도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후 35년 만에 이렇게 피해자들이 단체로 섰다는 건 아주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피해자 치유는 단순히 신경정신과 진료로 이뤄지지 않는다. 내 피해를 나만의 언어로 얘기하고, 다른 시민들도 그 사건을 제대로 알게 하는 것까지가 조사위원회의 역할”이라며 “나아가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가 이뤄질 때까지 계속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 플랫팀 김정화 기자 clean@kha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