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자살 유족들이 만든 문화유산 탐방 모임 ‘시연우’
일상 회복 서로 도우려 결성
각자의 사정 공감하며 응원
소송 등 정보공유엔 큰 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친절이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배려다.”
지난 5일 서울 성북구 길상사에서는 이 절을 창건한 법정 스님의 책 <아름다운 마무리>의 한 구절이 울려 퍼졌다. 문화유산 해설을 맡은 박배민 성찰과성장 활동가는 “우리 모임도 이렇게 따뜻함과 친절함이 모인 곳인 것 같아요”라며 법정 스님의 말씀으로 약 2시간에 걸친 길상사 해설을 마무리했다. 문화유산 탐방 모임 ‘시연우’ 회원들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우’는 과로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족을 가슴에 묻은, 자살 유가족들의 모임이다. 이날 길상사에 모인 사람들도 각각 친오빠와 남편, 형부를 잃은 유가족이었다. 모임을 처음 제안한 강민정 과로사·과로 자살 유가족 모임 대표는 “시연우는 ‘때맞춰 인연이 맞닿는 만남’이라는 의미”라며 “유가족으로 서로를 만났지만 인연을 이어가며 함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모였다”고 모임 취지를 설명했다.
유적지로 향하는 길을 따라 함께 걷고, 숨 쉬고, 대화하면서 이들은 그동안 잃었던 일상의 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경험을 한다. 박 활동가는 “모임 제안을 받았을 때 각 유가족의 사정을 세세히 알진 못해 걱정도 됐지만 산업재해 인정을 위해 싸워온 유가족들이 일상을 환기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유적지라는 공간의 가치를 되새기는 것도 치유의 일환”이라고 했다.
이들은 누가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회복의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를 응원했다. 형부를 잃은 후 언니와 조카를 함께 돌봐온 배고은씨(37)는 “언니가 7년 만에 처음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기 시작하는 걸 보며 울컥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다른 회원들이 “배 선생님도 많이 회복된 것 같아요”라며 함께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김설씨(32)는 “시연우에서는 각자의 사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산재 인정 절차를 밟으면서 답답해도 이를 풀 곳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모임 회원들이 먼저 ‘질병판정위원회는 어땠냐’고 묻거나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해준다”면서 “편하게 이야기하며 회포를 풀고 정보도 공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5년 전 오빠를 잃은 후 산재 인정을 위한 행정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강 대표는 “과로 자살 유가족은 배우자를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경우가 많아 아이들과 일상을 회복하고 싶어도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를 때가 많다”며 “시연우에서는 회원들이 함께 모여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일상 회복을 돕는다”고 했다.
그는 이어 “유가족들이 사측을 상대로 싸우는 데 집중하다 보니 산재 인정 절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며 “관련 절차가 끝난 후에도 마음을 나눌 수 있도록 계속해서 모임을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