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사석에서 만난 한 서울시 고위 간부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이렇게 저출생이 심각한데 한국은 여전히 해외 입양을 엄청나게 보낸다면서, 한 명 한 명이 아쉬우니 이 아이들을 내보내선 안 된다고 걱정했어요. 혼인 가정 밖에서의 출생은 아직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기 임산부가 안정적으로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사회예요. 그런데도 그저 '출생률'을 위해 이 아이들을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 입을 떡 벌렸습니다. "그럼 국장님이 키워 주실 건가요?"라고 물어보지 못한 게 지금까지 마음에 걸리네요. 여성 조기 입학, 케겔 운동 장려, 정관·난관 복원 시술비 지원에 해외 입양 '금지' 아이디어까지. 이것들이 '뭔가 잘못됐다'는 직관을 주는 이유는 결국 사람을, 삶을 정책 목표 달성 '수단'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정책을 만들기 전에, 보고서를 쓰기 전에 제발 '현장'을 봐 달라고 많은 사람들이 목놓아 외치는 건 개인의 삶을 숫자로만 표현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한국은 2002년 초저출산 국가에 진입했어요. 2003년 '저출산, 보육대책 화급하다'라는 제목의 경향신문 사설을 보면 "아이를 더 낳고 싶은 의욕을 꺾는 각종 사회·제도적 걸림돌을 없애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제언하고 있습니다. 2006년 기사를 보니 저출생 극복을 위해 성평등이 중요하다고 적혀 있네요. 답안의 큰 방향은 이미 나와 있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잊을 만하면 충격적인 오답을 내 왔습니다. 2014년 한 보건복지부 관료는 결혼·출산을 하지 않는 데 대한 징벌적 성격의 ' 싱글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어요. 2016년에는 정부 주도로 ' 출산지도'라는 해괴한 것이 등장합니다. 전국 모든 지자체의 '가임기 여성 인구 수'를 지도에 1명 단위까지 표시한 것이었어요. 2017년엔 여성의 '스펙'을 낮춰 초혼 연령을 앞당기자는 국책연구기관의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고학력·고소득 여성이 자기발전을 멈추면 배우자 선택 시 눈높이도 낮아진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언급했어요. 2018년, 통계청은 '출산지도' 사태를 겪고도 '가임여성 인구비율' 자료를 전국 17개 시·도별로 정리해 공개합니다. 그리고 다시 2024년. 국책연구기관은 여성 조기 입학을 주장하고, 서울시의원은 케겔 운동으로 '더 잘 임신하자'며 도심 한복판에서 "쪼이고!"를 외치고, 골반을 앞뒤로 신명나게 흔듭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오답과 정답을 오가는 사이, 정부가 2006년 첫 저출생 종합 대책을 마련하며 세운 '2020년 합계출산율 1.6명' 목표는 실제로는 반토막에 가까운 0.84명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2006년부터 15년 동안 280조원을 썼는데도요. 우리는 삶이 행복하고, 안전하고, 미래를 믿을 수 있을 때 재생산도 하고 싶어지는 주체들이지 생산인구 유지의 수단이 아닙니다. 특히 여성은, 자궁 운반체가 아니고요. 김민아 칼럼의 한 대목을 소개하며 오늘자 레터를 맺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없다. 인간이 수단·도구화된 세상에서 아이를 낳으면 무슨 의미가 있나. 대를 이어 수단·도구로 전락할 텐데. 인간의 존엄을 전제하지 않은 저출생 대책은 실패한다. (…) 여성의 몸 대신, 여성의 꿈과 일과 삶에 관심을 가져달라. 여성이 마음껏 꿈을 꾸고, 일에서 보람을 얻고, 삶에서 안전과 행복을 누릴 때 아이도 낳고 싶어진다는 걸 왜 모르나. 이해가 안 가면, 그냥 외우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