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성착취의 계보 인공지능(AI) 기반 이미지 합성 기술 '딥페이크'로 제작한 성착취물이 직장·지역·학교별로 제작·공유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낯설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텔레그램을 이용한 성착취물 유포도, 딥페이크를 이용한 '지인 능욕' 범죄도 익숙할 지경이니까요. '지인 능욕'이란 단어가 경향신문에 처음 실린 건 약 7년 전인 2017년 7월입니다. 딥페이크 성착취물과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어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이 됐습니다. 그러다 이 일이 어떤 첨단 혹은 신종 범죄가 아니라는 걸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4년 전 'n번방 사건'이 알려졌을 때 김희진 기자가 쓴 기사를 가져왔습니다. 기사 읽고 레터를 이어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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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아준 'n번의 순간'들이 만든 성착취 2020. 6. 17. 김희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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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뜯어보면 한국 사회가 거쳐온 순간들이 읽힌다. 한국 사회는 오랜 시간 성범죄를 '놀이문화'쯤으로 용인했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었다. 법은 피해자를 보호하기엔 굼떴다. 그사이 여성은 거래할 수 있는 '콘텐츠'이자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졌다. 사회가 범죄를 방치하고 문제 해결에 실패해온 숱한 순간들이 n번방에 조각을 보탰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는 성범죄 연대기를 끊어낼 수 있을까. n번방을 만든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훗날 또 다른 범죄의 전신으로 n번방을 곱씹게 될지 모른다. n번방을 '실패의 기록'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 조직적 성착취를 가능케 한 사회를 돌아봤다. 시간을 되감아, n번방을 만들어낸 n개의 순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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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11일 열린 '우리의 연대가 너희의 공모를 이긴다-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연대의 의미를 담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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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낯선' '악마'….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이런 수식어가 붙었다. 텔레그램에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들이 판매자이자 소비자로 조직적 성착취를 이어갔다. 이들이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던 건 범죄를 가능케 한 생태계가 이미 짜여 있던 탓이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1970년대 청계천 세운상가에 다다른다. 당시 세운상가에선 불법거래물이 사고팔렸다. '빨간'으로 불리는 책과 비디오는 n번방의 초석에 가깝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왜곡된 성관념을 본격적으로 실어날랐기 때문이다. 세운상가 암시장에선 불법촬영물도 상품으로 취급했다. 1990년대 여성 연예인 등 피해자의 이름을 딴 불법촬영물이 암시장을 통해 퍼졌다. 범죄라는 인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운상가에서 퍼져나간 조각은 사이버공간에서 자랐다. 불법촬영물 거래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성착취 수익모델이 생겨났다. 제2·제3의 소라넷, 웹하드, 불법촬영물 사이트가 나타날 때마다 가해자들은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하면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학습했다. 한편에선 성착취물 유통과 소비가 '일상'이었다. 세운상가에서 비디오를 구하고, 소라넷에서 영상을 내려받던 순간을 거쳐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손안에서 성착취물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텔레그램에서 범행을 한 이들은 세운상가에서 실어나른 인식을 딛고, 성착취 수익모델·유포 협박·미성년자 유인 등을 전부 합쳤다. 익숙한 문법을 엮어 '디지털성범죄 종합판'을 만들었다. 범죄를 '장르'나 '유행'쯤으로 여기는 사이 피해는 불가역적으로 커졌다. 성적 대상화되던 '빨간책'의 등장인물은 '○○비디오'의 연예인이 되고, '국산야동' 속 일상의 모든 여성으로 확장됐다. 세운상가에서 텔레그램까지 이어진 계보의 모든 순간이 n번방을 완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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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성범죄자들은 왜 처벌받지 않았을까. 돌아보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최초의 형법은 성범죄를 '정조에 관한 죄'로 묶으며 한국 사회에 '피해자다움'을 새겨넣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던 법은 "흠결이 없는 아동만" "순결한 피해자만" 등으로 변주하며 반복됐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서도 가해자는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겠다"며 피해 여성을 낙인찍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현실을 악용했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 17년 만에 폐쇄된 '소라넷'은 운영자 한 명만 징역형을 받았다. 붙잡히지 않은 '소라넷의 후예'들은 'n번방의 전신' AV스눕, 다크웹 등을 거쳐 텔레그램으로 이어졌다. '잡히지 않는다'는 성착취 가담자들의 호언장담을 완성한 건 다름 아닌 법이었다. 피해자가 숨고, 가해자가 일상을 이어가는 동안 법은 늘 굼떴다. 솜방망이 처벌이 공분을 사면 그제서야 제도를 바꿨다. 충분하지 않게 바뀐 법은 비슷한 범죄를 막지 못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근거한 첫번째 신상공개 결정으로 '박사' 조주빈(25), '갓갓' 문형욱(24)의 신상이 드러났다. "절대 안 잡힌다"던 가해자들의 장담은 "신상을 공개하라"는 260만명의 외침 아래 무력화됐다. 과거 불법촬영물은 피해자의 이름을 따 '○○비디오'로 불리거나 '음란물'로 통칭됐다. '성착취'란 표현이 처음 법에 등장한 건 지난 5월이었다. 수사·사법기관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다. 성범죄와 지난한 싸움을 벌여온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회가 n번방에 조각을 보탠 순간마다 누군가는 싸워왔다. 성범죄에 무관심한 사회에서 피해자와 연대했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는 당연한 상식을 어렵사리 법에 새겨넣는 싸움부터 시작이었다. 디지털성범죄와의 전쟁도 이미 수년 전부터 이어져왔다. 2015년 '#소라넷하니'로 시작된 싸움은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를 거쳐 '#n번방_아웃'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로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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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구성원들이 8월 2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학교 불법합성물(딥페이크) 성범죄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권도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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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목격한 여성들은 매 순간 '야동'이 아닌 '성착취물'이며, '놀이'가 아닌 '범죄'라고 외쳐왔다. 불법촬영물 유통 창구를 폐쇄해도 계속되는 반동을 겪으며, 크고 작은 전장을 거쳐 텔레그램에 이르렀다. 사회에 만연한 성범죄와 여성혐오를 고발하며 싸워온 이들도 있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의 목소리가 모이고, n개의 미투 운동과 시위 등을 거쳤다. '피해자다움'의 허상을 지적하고, 성인지 감수성의 중요성을 알렸다. "결국 세상은 우리에 의해 바뀔 것이다." 2018년 혜화역 시위에 등장한 문구다. 피해자에 연대해 맞서던 이들은 세상을 바꿔왔다.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시작으로, 텔레그램 성착취 가해자들을 추적해 '성착취' 범죄로 명명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끝난 걸까. 피해자와 함께 싸워온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라진 건 n번방뿐이다. n번방을 가능케 했던 순간은 사회에서 반복된다. 피해자를 손가락질하고, 불법촬영물을 관람하겠다며 검색어 순위에 올리는 순간들은 과거형이 아니다. 법은 또다시 가해자를 일상으로 돌려보낸다. 여전히 과제가 남은 사회에서 피해자와 연대하는 이들은 가해자의 재판을 지켜보고, 피해자 지원 체계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한다. 과거와 다름없이 "우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가 적힌 손팻말을 든다. 이뤄내야 할 '승리'가 남았고, n번방을 만들어냈던 사회가 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경향신문 홈페이지에서 기사를 읽으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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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4년 뒤, 우리는 보란 듯이 이어진 또 다른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n번방 사건이 그렇듯 딥페이크 사건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착취물 제작·유포 범죄는 유구한 계보를 자랑합니다. 한국은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성범죄 방면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 압도적인 역량을 보입니다. 해외 보안서비스 업체인 '시큐리티 히어로'는 '2023 딥페이크 현황' 보고서에서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등장하는 인물 53%가 한국인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놨습니다. 미국(20%), 일본(10%)이 뒤를 이었는데, 한국 인구를 고려하면 더 가공할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인능욕 피해 사례는 지난 6년간 11배 가량 증가한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이 사건이 n번방보다 더 끔찍한 점은, 직장·학교·SNS와 같은 일상적 공간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이가 가해자라는 겁니다. 심지어 제작한 성착취물을 혼자서만 보지 않고 피해자를 아는 사람끼리 모인 '겹지인방'을 만들어 공유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동생, 엄마 등 가족을 희생양 삼기도 했습니다. 대체 어디까지 '조심'해야 성범죄를 피할 수 있는 걸까요? 밤늦게 다니지 마라, 짧은 옷 입지 마라, 옷 갈아 입을 땐 창 커튼 꼼꼼히 쳐라, 남자친구와 헤어질 땐 심기를 거스르지 마라…여성들은 이런 말을 들으며 자라고 살아갑니다. 조심해야 할 것의 목록은 충격적인 성범죄가 알려질 때마다 길어집니다. 남녀공용화장실 가지 마라(강남역 살인사건), 낮에도 혼자 다니지 마라(관악구 등산로 살인사건)…이번엔 어떤 게 추가될까요? '아마도 SNS에 얼굴 사진을 올리지 마라'가 아닐까 합니다. 벌써 광주남부경찰서는 '딥페이크 음란물 예방 및 대처방법'을 배포하며 가장 첫머리에 "SNS에 개인 사진 및 정보공개를 최소화해요"라고 썼습니다. 몇몇 교육청도 비슷한 내용을 각 학교에 배포한 모양입니다. 김정연 작가의 만화 < 혼자를 기르는 법>에서 주인공 이시다는 골목에서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도망칩니다. 그 일을 회고하며 시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골목에서의 사건 이후로 참 많은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말해 보았지만, 제가 넘어서야 했던 것은 '그 봐'와 '원래'로 시작되는 말들이었습니다. 물론 전 그 말들이 저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 걱정들이 어느 정도의 위험을 막아주게 될지도 모르죠." 말들 속에서 시다는 위험을 피하고자 벽을 칩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시다는 안전이라는 이름의 작은 감옥 안에 갇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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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범죄가 '피해자가 조심해서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됐을 때 여성의 삶이 얼마나 제한당하는지 보여줍니다. 사회에서 '조심하라'고 하는 것들을 하나둘 포기하다 보면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요. 온몸을 굴곡 없는 옷으로 가리고, 남성 파트너 없이는 집 밖으로 나서지 않는 여성들이 지금도 지구 건너편에 있습니다. 그렇게 극도로 주의하고 조심하는 여성들이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우리는 압니다. 그들은 결코 범죄로부터 더 안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가장 경계하고 싶습니다. 청소년 성교육에 힘써온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피해 예방을 위해 SNS 이용을 금지하거나 사진을 삭제하는 건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하는 사람이 문제이기 때문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며 "성착취물을 발견했을 때 신고하고, 아동 성착취에 엄격하게 대응하는 추세라는 점을 기억해 대응하면 된다"고요. 성범죄는 스스로 조심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공포에 떨며 일상을 제약하는 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몫이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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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딥페이크 기술로 제작한 성착취물이 직장·지역·학교별로 제작·공유된 사실이 알려졌다.
✦ 2. n번방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성범죄를 ‘놀이문화’쯤으로 용인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물어온 역사의 결과다.
✦ 3. 이번 사건을 두고도 'SNS에 개인 사진을 올리지 마라'는 대처 방법이 배포됐다. 여성의 일상을 어디까지 제한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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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청소년들이 '기후 위기 헌법소원'을 냈죠. 헌법재판소가 드디어 답을 내놨습니다.기후위기 대응 계획과 기본권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아시아 최초 결정을 살펴보세요. |
아리셀 화재가 발생한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희생자 23명 중 17명이 중국 동포였어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해 온 박동찬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소장을 만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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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 KBS 사장이 광복절 당일 KBS에서 기미가요를 방송한 데 대해 재차 사과했습니다. "방송을 통해 일제를 찬양하거나 미화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
김민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집회의 자유를 행사하려면 돈을 지불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을 빚고 있어요. '수익자 부담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겠다는 걸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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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달 대출막차에 탑승하러 휴가를 낸 동료직원을 떠올리며 기사를 읽었습니다. 요즘은 '나만 아니면 돼' 혹은 '나는 이 막차를 타지 못한 건가'하며 단편적으로 당장 내 앞길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주택시장이 흘러갈지도 불안한 1인 무주택자입니다. (ㅠ.ㅠ)/ (타르트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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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점선면Lite <💦 요즘 좀 불안하지 않아?>를 읽고 한 독자님이 경험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뉴스레터 점선면은 독자님의 이야기로 더 풍성해집니다. 레터를 읽고 떠오른 생각이나 통찰이 있다면 언제든 아래 버튼을 눌러 남겨주세요. 딥페이크 범죄는 앞으로 여러 차례 다루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이 n번방 사건을 두고 말했듯, 이 사건도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왔던 실패의 총합"이니까요. 사건과 관련해 제보할 사안이나 의견이 있으시다면 아래 버튼을 눌러 남겨주세요. 독자님의 메시지를 기다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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