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캘리포니아에 다녀왔습니다. 많은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이었어요. 지역 공무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오차 없이 표현하기 위한 인칭 대명사를 명함에 표기했습니다. 이름 옆에 'She/They'가 적힌 명함을 받아드니, 정치적 올바름이 일상에 체화된 모습을 처음 목격한다는 생각에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She/They 표기는 스스로의 성별 정체성은 여성(She)이되, 자신을 특정 성별에 고정하기보다 좀더 유연하게, 포괄적으로 지칭(They)해도 좋다는 뜻입니다. 다양한 성 정체성을 긍정하려는 문화의 일환이에요. 주민센터 안내문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정체성과 지향이 언어로 세심하게 규정돼 있었고, 그 각각의 집단이 이용할 수 있는 세분화된 공공 서비스들도 있었어요. 어떤 정체성을 가졌든 이곳에서라면 참 편안하게 살아가겠다 싶으면서도, 누군가에게는 이 모든 올바름을 학습하는 것이 벅찰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 대선이 끝난 후 정치적 올바름, 정체성 정치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서 이때가 떠올랐습니다. 기사에서 본 것처럼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은 고소득 엘리트가, 공화당은 저소득 계층이 지지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요. 민주당이 어느 순간 정치적 올바름, 정체성 정치에 몰두했고 이 때문에 저소득·노동자 계층으로부터 멀어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거든요.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을 가려내며 살 여유가 있는 중산층·고소득 엘리트의 정당이 되는 동안, 도널드 트럼프와 공화당이 저소득 계층의 마음에 파고들었다는 겁니다. <역사의 종말>로 잘 알려진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노동자 계급을 향한 진보적 관심이 소수 인종, 이민자, 성적 소수자 같은 더 좁은 소수 집단을 보호하는 것으로 대체됐다"며 "국가 권력은 공정한 정의 실현이 아니라, 이 같은 집단의 사회적 권리 보장을 추구하는 데 더 많이 쓰였다"고 적었습니다. 뉴욕타임스에는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마침내 깨어나서 '깨어있음'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칼럼이 실렸어요. 여기서 '깨어있음'이란 정치적 올바름에 각성한 상태인 ' 워키즘'(Wokeism)을 뜻합니다. 이 칼럼은 "민주당은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 오만함과 '캔슬 컬처'의 세계관을 받아들였다"고 지적했어요. 거칠게 말해서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갖춘 민주당 엘리트들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대표되는 도덕적 자산까지 독점하려 했고, 깔보며 가르치려 들었다는 겁니다. 이전부터 솔솔 나오던 우려들입니다. 출판사가 어린이 문학 작품에 쓰인 '뚱뚱하다'는 표현을 '거대한'으로 바꾸고 '못생긴' '이중턱' 같은 표현을 지웠을 때, 뉴욕타임스 기자가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니그로'라는 단어를 썼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을 때,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의 '올바른' 대명사들이 등장할 때…. 왜 이렇게 됐을까요? 책 < 엘리트 포획>은 엘리트 계층이 정체성 정치를 '포획'한 것이 문제라고 봤어요. 엘리트는 소수자가 아니죠. 차별·억압의 당사자가 아닌 엘리트가, 소수자를 위한다는 도덕적 우월성을 자산으로 삼은 채 정체성 정치에 나섭니다. 이 과정에서 엘리트는 소수자를 존중하고 이들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명분마저 챙기지만 오히려 당사자의 목소리는 배제된다는 겁니다. '빼앗긴 소수자성'이라고 할까요? 정치적 올바름, 정체성 정치가 민주당 대선 패배의 전적인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민주당이 전통적 지지 계층과 멀어지는 과정에 이런 배경이 있었다는 겁니다. 공화당은 그 틈을 공략해서 상대적으로 저소득·노동자 계층의 마음을 더 얻을 수 있었고요. 일단 여기까지는 흥미로운 먼 나라 이야기, 바다 건너 불구경이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돼요. 솔직히 주류 정치권에서 정체성 정치나 정치적 올바름이 염증을 부를 만큼 무르익은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성소수자 문제에서는 '보수당'과 '더 보수당'이 있을 뿐이라는 한 활동가의 말이 생각나네요. 미국 민주당과 과정은 좀 다르지만, 우리의 민주당도 서민·노동자의 정당이라기보다 가진 자들의 정당이 되어 가고 있고요. 이중의 어려움에 처했다는 막막함이 느껴집니다. 이번 미국 대선 결과 리뷰를 열심히 살펴봐야겠다는 결심이 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