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피아] 🎓“미래에 일은 AI로 대체될까?”라는 질문 대신

“미래에 일은 AI로 대체될까?”라는 질문 대신 : “Cui Malo?”

“Cui bono” and “Cui malo”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29), 2024.7.3, 1-9 (9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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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대체, AI, 노동, 소비자, 행복

1.머리말

2.Cui malo, 누가 손해보는가? : #노동자

3.Cui malo, 누가 손해보는가? : #소비자

4.‘대체될 일은 무엇인가?’ 아닌 ‘일의 무엇이 대체될까?’라는 질문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연구자님도 “미래에 노동은 정말로 AI와 로봇으로 대체될까?”라는 생각을 한번쯤 해보셨나요?

일론 머스크는 지난 5월 한 컨퍼런스에서 “(미래에) 아마 우리 중 누구도 직업을 갖지 못할 것”이라며 AI와 로봇이 모든 사람을 ‘대체’할 수있을 것이라고 말했죠.(링크) 이 밖에도 ‘노동의 종말’을 예측하는 이야기들은 많고요. 사람들은 마치 벼랑 끝에 매달린 것처럼 초조해졌습니다.

그간 이런 전망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AI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라고 반박해왔습니다. 주로, 결국 1%의 차이를 만드는 ‘탁월성’은 인간에게만 있다는 차원에선데요. (비록 1%밖에 못 건져내긴 하지만요)

하지만 저는 이런 이야기를 볼 때마다 조금은 의아해지기도 했습니다.

왜 “대체될 것이다”라는 말에 “대체되지 않을 것이다”로만 반박하는지에 대해서요.

최근 인간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AI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노동의 종말' 관련 서적은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마치 비가 오면 머리가 젖는 것처럼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왼쪽) 고대 로마 정치가 키케로는 변론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Cui bono(누가 이익을 보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회적 문제,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기 활용되고 있는 질문입니다. 이에 더해 저는 '누가, 어떤 손해를 보는가?(Cui malo)'라는 질문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한스미디어, conexaolibert

그 대신 저는, 예전부터 이 이야깃거리와 관련해서는 한번쯤 다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미래에 일은 대체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주체]가 누구이며,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요.

이어 반대로 [손해]를 입는 것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손해는 구체적으로 무엇일지에 대해서도요.

위의 이야기는 조금 알쏭달쏭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 주변의 친숙한 키오스크를 예로 들어볼 수 있습니다.

우선, [고용주] 입장에선 이익입니다. 주문을 받는 사람을 줄여 인건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손해도 발생합니다.

[노동자]에게 자동화는 때로 업무 강도를 높이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최근 드라이브스루 매장에 AI 키오스크를 도입한 맥도날드에선 아이스크림에 베이컨(?)이 추가되고, 막대한 양의 너겟이 주문되는 등 깜짝 놀랄만한 소동이 일어났다고 합니다(링크). 이런 경우 뒷처리를 하는 것은 인간 직원이죠.1)

사회적으로 일자리가 계속 줄면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실직자]에게도 키오스크는 썩 유쾌한 기계는 아닐 것입니다. 실직자의 증가는 결국 사회적 손실로도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키오스크를 능숙하게 쓰지 못하는 [소비자]를 주눅들게하고, 여러 버튼을 눌러야 하고 메뉴 추천을 받지 못하는 등 번거로움을 줄 수 있습니다.2)

만약 ‘AI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에 깜짝 놀라고 불안해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고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될 것이고요.

어떤 직업이 '실제로' 대체될지, 혹은 대체되지 않을지를 떠나 -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잃을 수 있는지에 대해 해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관련해서 제가 오늘 레터에서 어떤 해답을 내놓진 못할 것입니다. 저는 AI의 전문가도 아니고, 예측 전문가도 아닌 - 대체가능성 중간 정도 순위의 직업을 지니고 있는 일개 김스피입니다.

다만 저는 그간 ‘대체될 것이냐 아니냐’의 차원에서 이야기되어 왔던 일들을 두고, 그 대신 ‘우리는 무엇을 잃어 왔으며, 또 잃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며 해찰을 해보고자 합니다.

<어떤 동사의 멸종>(한승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조지 오웰), <9번의 일>(김혜진) 등을 지팡이 삼아보았습니다.

1) 이 밖에도 ‘AI가 대체할 수 있다’라는 말이 어디까지 '실효성이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오고 있습니다. 아마존에선 피킹로봇이 도입되면서 한 시간에 처리해야 하는 물량이 세 배 이상 늘어나 오히려 업무강도가 강해졌다는 지적이 있고(<아마존 디스토피아>), 급식노동자들은 현장에 급식로봇이 도입되면서 오히려 로봇관리 업무가 늘었다고 강조해왔습니다(링크). 다만 오늘 레터에서는 "대체 가능한가?"라는 질문보다는 "대체할 수 있다는 담론으로 인해 우리가 잃을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하고자 하기 때문에, 본문에선 줄이겠습니다.

2) <그림자 노동의 역습>을 쓴 크레이그 램버트에 따르면 자동화는 대체로 '신기술이 모든 것을 마법처럼 수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 기존에 기업/직원이 제공하던 서비스를 소비자에게 전가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관련해선 (💌지난레터) 를 참고해주셔요. / 혹은 '자동화된' 무인점포의 경우 인건비 절감으로 인한 [이득]이 발생하지만, 치안을 공공서비스인 경찰에 외주화하며 [사회적 손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지적들이 이전부터 있어왔습니다.(기사1 기사2)

【2.Cui malo, 누가 손해보는가? : #노동자】

오늘날 우리에게 일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을 통해 밥을 벌고, 자존감을 얻고 자아를 실현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일자리를 잃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얘기가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간 실직으로 인한 [손해]는 개인의 책임으로만 여겨지고 또 과소평가되어 왔습니다.

르포작가 한승태가 쓴 <어떤 동사의 멸종>의 부제는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인데요. 미래 AI, 기계 대체 가능성이 높은 4가지 직종을 저자가 직접 일을 하며 체험해본 내용을 적었습니다.

콜센터(전화하다), 물류센터 까대기*(운반하다), 주방 업무(요리하다), 빌딩의 미화노동(청소하다) 등 네 가지 직업인데요. 조사에 따르면 이 직업들이 가까운 미래에 대체될 것이라고 전망된다고 합니다.

*까대기 = 물류센터, 항구 등에서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 (링크)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어떤 동사의 멸종> 책 표지 (왼쪽) 많은 지방자치단체, 기관, 기업 등에서 콜센터 업무는 챗봇 등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한 대기업 마트 콜센터 업무를 할 때 큰 정신적 고통을 느끼며 ‘이런 열악한 직업이라면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도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 시대의창, 경향신문

저자는 이 ‘멸종 직전의 공룡같이 위태로운 동사들(직업)’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는지를 세밀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저는 “누가 어떤 손해를 보는가”라는 질문을 품고서 책장을 넘겼습니다.

책을 읽으며, 일에 담긴 두 가지 중요한 가치를 새삼 곰곰 떠올려보게 되었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1.경제적 생존 (임금)

2.정신적 만족 (성취감, 뿌듯함)

1.우선 경제적 생존과 관련해 생각해봅니다.

네 가지 노동 가운데서도 저자가 가장 힘들어했던 일자리는 ‘콜센터 상담사’였는데요. 콜센터 직원들은 수많은 ‘진상 손님’들의 모욕을 듣고도 삭여야만 합니다.

폭언, 모멸적인 말을 매일같이 듣는 것도 힘든데, 관리자는 분초 단위로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하기 때문에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못 다녀올 정도죠.

저자는 이 책에서 콜센터에서 겪은 비통한 경험을 길게 서술한 뒤, “이런 지긋지긋한 직업이라면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화를 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한 뉴스를 보고 멍해집니다. 챗봇 서비스로 ‘대체된’ 대형 은행 콜센터 직원 200명의 해고 소식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묻는다 “어떤 직업들이 사라질 것인가?” “어떤 직업들이 나타날 것인가?” “직업이 사라진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콜센터를 떠날 때는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더하고 싶어졌다. “어떤 직업들은 사라지는 게 나은가?” 급여도 적고 처우도 열악하고 이렇다 할 만족감도 주지 않는 일이라면, 운영 상태가 엉망인 기업을 도산처리하는 게 나은 경우가 있듯이 직업도 그렇게 정리하는 게 나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콜센터를 떠올리며 그렇다고, 이런 일자리는 그냥 사라지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상이 현실이 된 광경을 보니 그것이 얼마나 철없는 생각인지 깨달았다. 없어져도 상관없는 것에, 없어지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는 무언가 때문에, 사람들이 영하의 길거리에서 그것을 돌려달라고 소리치고 있을리 없었다.

-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이하 동일)

언론에서 ‘수백명이 대체되어 해고됐다는 소식’을 마치 옷에 붙은 보풀을 떼듯 전하곤 하지만, 기실 누군가들의 삶이 유지 불가능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AI 발전에 따라 사라지는 일자리만큼 새로운 일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모두가 전혀 다른 분야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물론 일이 노동자에게 중요하다고 해서 완성품 라디오를 부수었다 다시 조립하듯 ‘필요없는 일을 일부러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만, 만약 일자리가 사라질 때 남은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가 높아진다면 혹은 소비자 편익이 줄어든다면 - 사라진 일자리들이 ‘필요 없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이어 정신적 만족과 관련해섭니다.

이 책에서 흥미로운 점은, 일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일을 ‘임금’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성취감’ ‘보람’을 위해서도 일에 매진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저자가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제각기 굉장한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죠.

특히 저자가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며 만난 한 50대 남성은 객관적으로 굉장히 불행한 환경에 처해있지만 - 물류센터에서 땀을 흠뻑 흘리고 나서 새벽에 나설 때 해뜨는 모습을 보며 감격하기도 합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석구 형님의 아침 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물류센터에서 한 장면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석구 형님의 아침 해를 선택하겠다 […] 하차2반이 석구형님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석구 형님이 이 일을 필요로 하는 게 더 커보였다. 석구 형님이 처한 상황은 우울증이 생기고도 남았다. 몸은 불편하고 50이 넘었는데 사업은 망했고 […] “새벽 내내 땀 뻘뻘 흘리면서 일하다가 다 끝나고 밖에 나왔는데…어떤 건지 알죠? [...] 나가니까 햇빛이 막 쏟아지는데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게, 와아아…”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최근 한 청년실업 관련 영상에 달려 화제가 된 댓글이 떠올랐습니다.(아래 사진) 댓글의 주인공은 취업 실패로 수 년 간 방황하던 20대 청년이었는데, 물류센터 일을 하면서 희망을 얻게되었다는 것이었죠.

이처럼 어떤 종류의 일자리는, 존재하는 것 그 자체로도 개인에게 재기의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19세기 빈민층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 조지 오웰은, 당시 극심했던 런던의 부랑자 문제를 가리켜 - 문제 해결의 핵심은 빈민 구휼이 아니라 한 사람이 먹고 살기에 충분하며, 정신적 자립감, 자존감을 주는 일자리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필요한 건 그(부랑자)를 극빈하지 않게 하는 일인데 이것은 오직 그에게 일자리를 구해주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그것도 일을 위한 일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일을 주는 것이다”

-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지난달 7일 방영된 KBS <추적60분: ‘쉬었음’ 청년 70만, 저는 낙오자인가요>(영상) 회차에 달려 약 1만건의 좋아요를 받고 SNS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댓글. 물론 어떤 사람이 일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고 해서 부당한 노동조건이 정당화될 순 없습니다만, '어떤 일이 열악하니까 없애자'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이윱니다. (왼쪽) 돈을 벌기 위해서도 일을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일 자체에서 성취감, 만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KBS 유튜브 갈무리, Unsplash

책 속 사람들은 일을 하면서 성취감과 보람, 만족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자 역시 마찬가진데요.

아래와 같은 대목에선 그런 것을 잘 느낄 수 있습니다.

* 빌딩 유리창 청소 = 이 작업이 시종일관 형벌이기만 한 건 아니다. 그렇게 힘들었기 때문에 청소의 쾌감이 유리칼을 쥔 두 손에 펄떡였다. 두세시간 땀을 뻘뻘 흘리며 유리를 닦고 나면 깨끗한 상태로 더 오래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진다 […] 힘들여서 유리를 닦고 나면 그런 결점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다 […] 아저씨들이 그냥 내버려두라고 해도 내가 먼저 다시 닦겠다고 나서게 된다.

* 뷔페 주방 업무 = 나는 좋은 일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을 덜 외롭게 만든다고 믿는다. 요리가 그렇다. 홀로 주방을 지키는 날에도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다 보면 누군가와 만족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는 기분이 든다. 서울 변두리 지하 주방에 처박혀있어도 세상의 한 복판에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과 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고 있는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총사령관님(주방 관리자)에게 인정 ‘비스무리한’ 것을 덤으로 받았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탁월함’과는 별개로, 스스로 바닥부터 쌓아오고 또 갈고 닦아온 작은 기술에 뿌듯해하고 자신이 일구어낸 작은 성과를 자랑스러워 합니다. 거기서 살아갈 힘과 의지를 얻기도 합니다.

저자는 아무리 괜찮은 직업이라고 해도 이러한 뿌듯함을 전혀 느낄 수 없고 자신의 일이 형편없고, 특히 언제 대체될지 모른다는 식으로 전혀 존중을 받지 못한다면 사람은 “폐인이 되고, 망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런 뿌듯함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은, 어느정도 자율성을 보장하고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 존중해주는 것이죠.3)

이런 노동의 뿌듯함은 비단 ‘노동자’에게만 이득이 될리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챕터에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 철학자 라르스 스벤젠은 <노동이란 무엇인가>에서 과거 8년 동안 청소일을 한 경험을 꽤 만족스럽게 회상합니다. 꽤 힘들었지만, 안전한 환경에서 자율성을 보장해주었고 임금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지난레터) 어떤 일이 ‘열악한 일’이라고 할 때(그러므로 기계로 대체돼야 한다고 할 때) 과연 그것이 일 본연의 속성인지 혹은 임금, 대우 등 환경이 그것을 열악하게 만든 것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3.Cui malo, 누가 손해보는가? : #소비자】

이어 소비자의 차원에서도 생각해봅니다.

책을 읽으며 제가 인상적으로 본 부분은, 저자가 매 챕터에서 꽤 상당한 분량을 들여 ‘숙련을 통해 몸에 새긴 지식, 요령’을 자세하게 묘사한 대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처음엔 어리버리하겠지만, 오랫동안 현장에서 머무르는 것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요.

* “봐봐, 어디서 유리를 닦느냐에 따라 비눗물 묻히는 양도 칼질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돼. 지금 여기 VIP룸은 난방을 엄청 세게 틀어놓았단 말이야. 여기는 뜨거운 바람이 천장에서 나와서 비눗물이 금방 말라 [...] 비누칠해서 닦는다고 다 똑같이 벅벅 미는 게 아니야. 실내냐 실외냐, 복도냐 방이냐, 기온이 높냐 낮냐에 따라 다 다르게 해줘야 한다고.”

* “여기도 막 하는 게 아니라 우리 방식이 있다고. 먼저 박스를 올릴 때는 송장이 위로 올라오게 놔야 돼 [...] 짐을 내릴 때는 위에서부터 쭉 내리다가 여기 레일 높이까지만 내려[...] 짐을 쓰러뜨릴 때도 방식이 있어 [...] 떨어지는 거 막다가 머리에 맞으면 크게 다쳐. 그러니까 어떤 경우든 짐이 내쪽으로 떨어지면 그냥 바닥에 떨어지게 내버려 둬...”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새삼스럽게 노동자의 ‘숙련’이 생산성, 효율성 뿐 아니라 안전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런 숙련된 직원과 직원이 신입에게 친절하게 노하우 전수를 해줄 수 있을 여유와 직업적 안정성이 있다면, 한층 더 안전하게 일을 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링크)

또한 소비자 등 제3자 입장에서도 확실히 이처럼 숙련되고 능숙한 직원이 있는 건물에서는 쾌적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머무를 수 있겠죠.

이런 숙련 노동은 비단 ‘주어진 최소한의 일’을 잘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나아가 사려깊게 이용자들의 경험을 살피죠.

문득 저는 이 대목에서 과거 리처드 세넷이 <장인>에서 소개한 ‘익명의 노동자’의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책에 소개된 한 현장 노동자(경비원으로 추정되는)는 주차장 범퍼가 닿는 부분에 아주 조그만 받침대를 놓아두는 것을 통해 다칠 위험을 막습니다. 밤에 주차선이 잘 보이지 않자 운전자를 위해 흰선을 따로 그려두기도 했죠. 그런 사람의 공적을 누군가 따로 칭송하는 일도 없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돈 때문에 일을 하더라도 주어진 일 이상의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 우리를 단순히 ‘소비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존중해주는 이들에게 우리는 사랑과 존경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대체된 AI를 통해 우리가 사려깊은 헌신과 배려를 느낄 수 있을까요?

콜센터 업무 매뉴얼은 대체로 고객의 '정당하거나 부당한 불만'을 효율적으로 무마하는 방향으로 조성되어있습니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2021·예고편)에서 정신이상자 '진상 고객'의 목소리마저도 귀기울여 듣고 '인간적으로' 대하려 하다가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된 콜센터 신입 수진의 모습 (왼쪽)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1933)에서 조지 오웰은 고급 호텔 주방에서 ‘접시 닦이’ 일을 하며 관찰한 주방 노동의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그곳에선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만큼이나, 소비자들 역시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합니다. 불결한 음식을 겉모양만 멀쩡하게 꾸며 비싼 값을 강요하죠. /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TextPublishing

어쩌면, 기계의 도입은 그나마 아주 조금 남은 - 소비자를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지대를 모조리 지워버리는 처사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저자가 대형마트 콜센터 업무를 할 때 벌어진 에피소드들이 꽤 인상적이었는데요.

과거 마트에서 ‘13종류 카드로 결제시 장난감을 할인해주는 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카드가 속해있는지가 결제 홈페이지에 제대로 공지되지 않아, 할인받지 못한 고객들의 불만 전화가 빗발쳤다고 하죠.

“그냥 이 상품 화면에다 (무슨 카드로 결제할 경우 할인이 되는지) 조그맣게 적어두면 안돼요?” 나도 얘기했고 고객도 얘기했고 관리자들도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어째선지 절대로 그렇게 안 한다. 이런 측면에서 고객센터의 존재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상담사는 땜장이다. 융통성없는 업무 프로세스와 엉성한 홈페이지 시스템의 틈새를 상담사의 사과로 덕지덕지 발라 메꾼다. 그래서 대대적인 수리 없이 그냥저냥 굴러가게 만든다 […] 시스템 상의 수많은 허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는 최종적으로 콜센터에서 치른다.

또한 ‘땜장이’라는 사명을 받든 콜센터 직원들의 절대 규칙이 있습니다. 설령 회사 측의 잘못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보상이라는 말을 절대 입에 내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 문제 해결 능력에 있어서 콜센터 상담사는 인간과 허수아비의 중간 정도에 놓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입 상담사가 뇌에 문신으로 새겨 넣어야 할 고객센터의 제1원칙이 도출된다. <보상은 금기어> [...] "신입 분들은 고객이 막 소리지르면 당황해서 '저희가 보상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얘기할 때 많은데 절대로 그런 말 하시면 안돼요."

저는 이 대목에 밑줄을 치곤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경우 역시 상담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회사의 근본적인 대처가 있어야 겠습니다만. 이런 상황을 AI로 바꾼다고 해서 소비자에게 더 좋은 방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기업과 소비자 간의 창구를 ‘더 단단한 벽’으로 만들어 시무룩하게 만들고 제풀에 지쳐 쓰러지게 하는 것이죠.

대부분의 기업은 이윤 창출 및 효율화를 위해 AI를 도입하지, 본질적으로 고객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서비스나 쓸데없는 재미를 위해서 막대한 돈을 들여 AI를 도입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저는 그간 무엇이 우리에게서 사라져왔고, 또한 무엇이 앞으로 더 사라질 예정인지에 대해서 곰곰 생각했습니다.

✏️

“나는 기계가 아닌 사람하고만 얘기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있는, 어? 그런 사람이 아니면 내 문제 해결 못 해. 뭔지 들어도 아무 소용 없어. 당신은 로봇이지 사람이 아냐. 나는 로봇이 아니라 사람이랑 얘기하고 싶은 거야.”

-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 한 ‘진상손님’과의 통화 내용 中

【4.‘대체될 일은 무엇인가?’ 아닌 ‘일의 무엇이 대체될까?’】

마지막으로 저는, ‘어떤 일’이 대체될 것이냐 보다는 ‘일의 어떤 부분이 대체될 것인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라져도 될지에 대해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김혜진의 소설 <9번의 일>은 한 26년차 전기수리기술자(주인공)가 저성과자라는 이유로 좌천에 좌천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비인간적인 ’일‘로 밀려나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인데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어떤 종류의 일은 오늘날 유독 권장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9번의 일>의 주인공은 저성과자라는 이유로 계속 열악한 지역으로 발령이 나며, 힘든 일을 맡게 되지만 한사코 그는 일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왼쪽) 우리는 왜 일할까요? / 한겨레출판

소설 속 주인공은 좌천되어, 어느날 한 인적 드문 공장지대에 발령을 받아 신규 영업 업무를 맡게 되죠. 태어나서 전혀 해보지 않은 일이고, 낯선 동네라 당연히 주눅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좌절하지 않고, 어떻게든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는 검단의 공장지대를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가 할 수 있는 건 잘 보이는 곳에다 광고지와 카탈로그 따위를 부착하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개숙여 인사하는 것 뿐이었다. 건성으로 고개를 까닥하며 지나치던 사람들은 더디게 마음을 열었다 [...] 그는 식료품 공장에서 상하차 작업을 거들었고, 택배상자를 날랐으며 […] 그런 호의가 곧장 판매나 계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김혜진, <9번의 일>(이하 동일)

그러던 차 어느날, 드디어 ’건수‘를 하나 발견합니다. 인근 공단의 외국인 노동자 숙소 와이파이가 고장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건데요.

그런데 그는 비싼 인터넷 상품을 강매하는 대신, 20여간 갈고닦아온 수리기사로서의 노하우를 발휘해 간단한 작업만으로 통신을 고쳐줍니다. 외국인노동자들은 아주 고마워했죠.

공유기가 낡은 데다 여러사람이 한 회선을 나눠 쓰는 이런 곳에선 속도가 느려지고 신호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는 그의 설명을 청년은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 인터넷 상품 가입을 권했어야 했다는 후회는 나중에 들었다.

비슷한 일은 반복됐다 […] 그는 실리콘으로 구멍난 부분을 메우고, 창틈과 문틈 사이에 단열재를 끼워넣었다 […] 엉뚱한 곳에 시간과 힘을 허비했다는 후회도 잠깐이었다 […] 좋은 사람. 고마운 사람. 청년은 동료들에게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 이 일이 그에게 얼마간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 그는 자신이 지켜왔고, 지키려고 하는 어떤 것들이 훼손되는 것을 더는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일‘이 회사 입장에서는 아무런 수익도 되지 않고, 완전히 괜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상관으로부터 큰 호통을 들어야 했습니다.

“뭐하러 그런 일까지 해주시냐고요 […]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업무가 다르잖습니까. 그렇게 자꾸 개인적으로 편의를 봐주면 관할 수리기사들은 어떡합니까. 걔네도 다 수당받고 일하잖아요. 정식으로 고장 신고를 하라고 알려줘야지요 […] 업무 이외의 일은 하지 마시라고요“ […] 그런 눈에 띄지도 않는 사소한 호의나 친절을 대단히 잘못된 것처럼 말했으므로 그는 점점 더 당혹스러워졌다 […] “다들 자기 일만 하잖아요. 자기 일만 한다고요. 그게 서로 간의 예의라고요. 아시겠죠? 본인 일만 하세요…”

주인공이 일을 ’잘‘ 하려면, 간단한 작업이 아닌 엄청난 고장인 척하고 최대한 비싼 상품에 가입을 시켰어야 겠죠. (주기적으로 고장이 나면 금상첨화겠고요)

여기서 미래에 AI가 일단 출장 서비스를 ’대체할 수 있느냐‘는 둘째치고, AI가 저런 일을 하도록 학습/디자인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로 근래 키오스크를 넘어 AI 주문을 도입하려는 일부 업체들은 ’비싼 메뉴를 추가로 시키게 하는 등‘ 수익성을 높인다는 취지에서 주로 시도되고 있기도 합니다.

✏️

대체로 이때의 “일”은 좋은 서비스의 흉내만을 의미한다 […] 암으로 죽는 사람이 의사에게 단순히 “하나의 사례”이듯이 그 종업원에게 음식은 “하나의 주문”일 뿐이다. - 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5.맺음말】

저는 오늘 레터를 쓰면서 생각했습니다.

결국은 핵심은 어떤 기술이 일을 대체할 것이냐, 라기보다는, 그걸 가지고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요.

오늘 레터에서 살펴보았듯, 많은 사람들은 마음을 담아 일하고 싶어하고, 마음을 담은 서비스를 받고 싶어합니다.

현실의 노동은 대체로 진절머리나는 일이지만, 우리 사회가 누군가의 노동과 나의 노동으로 촘촘하게 채워져있는 한(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택배를 받는 것도,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읽는 것도, 길에서 맛있는 빵을 사먹는 것도 누군가의 노동에 맞닥뜨리는 일입니다) - 이 노동의 조각들이 불만족스러우면, 결국 우리 사회가 다들 화나는 일들로 잔뜩 채워지게 됩니다 - 이것이 대체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앞으로 살아가며 마주칠 수많은 사람(혹은 기계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 저를 주눅들게 하고 무시하는 대신,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진심을 담아 대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 그런 사람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낄만한 임금과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일 역시,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몇가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오늘날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요? 이게 기술로 해결이 가능한 종류의 문제일까요? 오히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어오지 않았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아주 엉뚱한 질문일까요?...

이젠 편지를 마무리해야 할 시점임에도 이런저런 질문들을 남겨두게 되었습니다만, 연구자님께서도 이런 질문들로 혹은 떠오르는 각자의 질문들로 나름의 해찰을 해보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하튼 이런 이야기는 ‘AI에 의해 일이 몽땅 대체될 것인가’라는 위협적인 질문만으로는 완두콩만큼도 담지 못할 이야깃거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

“생성형 AI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이 기술이 어떻게 발전되고 적용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인공지능 기술의 경로도 불가피한 것은 없다”

- 대런 애쓰모글루(경제학자·MIT 교수, 2023.9 CEPR 정책메모 중)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한승태, 『어떤 동사의 멸종』, 시대의창, 2024.

-<인간의 조건>(개정판 제목 : 퀴닝Queening) <고기로 태어나서> 등을 쓴 르포작가 한승태의 신작입니다. 레터 본문에서도 소개했듯 ‘곧 사라질/대체될 직업 4개’를 저자가 직접 겪어보고 그 과정에서의 느낀 점이나 관찰한 점을 생생하게 풀어놓은 책입니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는, 지난해 이래(챗GPT 유행 이후) 통상 가장 먼저 ‘대체’될 것이라고 강조되고 있는 직종들(주로 화이트칼라 사무직, 콘텐츠업계 등)이 포함되어있지 않아 다소 의아하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기획 시기가 그 이전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튼 어떤 직종이든 오늘날에는 모두 ‘너 대체될거야!’라는 으름장 아래 놓여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특히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룬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은 AI에 의해 대체되지 않더라도, 항상 문제적인 환경에서 일해왔습니다. 또한 '유토피아'론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임금과 혜택을 더 많이 주고 소비자와 노동자들을 편하게 하기 위해 비싼 도구(AI)를 도입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쓰다'라는 동사와 함께 작가라는 자신의 업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김혜진, 『9번의 일』, 한겨레출판, 2019.

-본문에 소개했듯 26년간 수리기사로 일했던 주인공이 성과를 이유로 미끄러지며 겪는 일을 사실적으로 적은 소설입니다.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었습니다. 저자의 인터뷰 등에 따르면 2016년 통신회사 노동조합을 취재한 것 등을 바탕으로 창작하게 된 소설이라고 하는데요. 참고로 제목의 '9번'은 '아홉번(횟수)'이 아니라 그가 좌천을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맡게 된 '일(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그가 불리는 방식(78구역1조 9번)입니다.

오늘 레터에서 저는 이 소설 전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주목했던 대목에 집중을 해보았습니다. 주인공이 베푼 친절이 '일'로 지칭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갈릴 수 있겠지만, 저는 이런 친절을 일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그 '남는 것이 없음'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요.(링크)

조지 오웰, 신창용 옮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삼우반, 2009.

-조지 오웰의 워낙 유명한 작품이지만 직접 읽어보신 분들은 많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번 기회에 읽어보시면 후회 없을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19세기 파리와 런던을 돌아다니며 극빈층의 삶을 직접 살았던 조지 오웰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그 당시의 밑바닥 생활을 조지 오웰 특유의 생생하고도 예리한 필치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들이 그렇듯, 이 책 역시 19세기의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오늘날 생각해볼만한 거리를 많이 제공합니다. <어떤 동사의 멸종>에서 주방일을 다루는 파트를 읽으며 <파리와 런던...>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단지 가난의 표면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일의 본질이라든지 계층,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려 깊은 시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소비자의 ‘기대치’를 낮춰 적응시키기

독서시간: 약 11분 / 글자수: 약 5200자

🖍글 속 한 문장

“고객들이 AI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사용자들이 AI만 연결해줘 고객을 길들이고 있다고 생각해요. 고객 입장에선 선택권이 없는 거죠. 어르신들이 화를 많이 내세요. 왜 상담원 연결을 눌렀는데 챗봇이 받느냐는 거죠. 저희와 연결되면 ‘사람이 맞냐’는 말씀을 제일 많이 하세요. 콜 수가 준 건 고객들이 전화를 적게 해서라기보다는 상담원 연결 자체가 불편해지면서 중간에 포기하는 분이 많아진 이유도 있을 겁니다. 사용자들은 이런 건 드러내지 않고, 표면적으로 콜 수가 줄었으니 콜센터 인원을 줄이는 게 당연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AI/챗봇 대체가 가장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체감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콜센터일 것 같은데요. 직접 콜센터 노동자들로부터 들은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입니다.

제 경우엔 인터넷 서비스 유료 구독 등을 하고 있는 것이 많은 편인데 제가 유료 이용을 하고 있는 서비스 가운데 콜센터 전화번호가 있고 사람이 응답하는 서비스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과거 한가지 문제를 고치기 위해 FAQ와 포럼을 샅샅이 뒤져도 해결이 안되자, 미국에 있는 본사와 번거롭게 이메일을 일주일동안 주고받은 끝에 해결할 수 있게 됐죠. 반면 최근 집의 청소기가 고장나서 인터넷을 찾던 중 콜센터에 전화해 단 1분만에 문제를 해결하게되자(제가 '청소기 헤드...'까지만 말했는데도 이미 해결책을 말해주셨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새직업: ‘AI를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일’ BBC(영문)

🖍글 속 한 문장

코워트는 AI 인간화가 종종 처음부터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리지만, 급여는 더 나쁘다고 말한다. "플랫폼에서 글쓰기는 보통 단어당 10센트 정도를 받아요 [...] 하지만 AI 보조는 편집 작업으로 간주되므로, 일반적으로 단어당 1~5센트만 받죠. 지루하고 끔찍한 일인데, 그에 대한 대가로 거의 돈을 주지 않아요." 다른 산업에서도 낮은 임금을 받는 인간이 조용히 기계를 움직이는 비슷한 사례가 있어왔다. 자동 주문 시스템을 돕는 것부터 AI 비전 시스템을 훈련하는 데 사용되는 이미지에 라벨을 지정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우리 사회에 AI, 기계의 대체와 관련된 이야기는, 챗GPT를 기점으로 크게 바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엔 주로 '단순 육체 노동'이 가장 먼저 대체될 것이라고 이야기되어왔다면 현재는 미디어, 글쓰기, 음악, 미술 등 창작 관련 활동의 대체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사를 읽다보면, 글쓰기와 관련해서 아주 단순한 종류의 글쓰기라 할지라도 - 결국 인간의 '터치'가 필요하고, 사실상 노동자가 직접 글을 쓸 때 필요한 정도의 교양 및 배경지식, 판단력을 요구하지만 그 일은 'AI의 보조' 취급 당하여 임금이 내려가는 명확한 효과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보조' 업무는 사실상 저임금 국가, 노동자로 '이관'되는 일관된 특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AI가 일자리 대신 월급 깎을 것”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100자

🖍글 속 한 문장

저숙련 일자리도 비교적 안정적이다. AI가 '평균 교육 수준'의 저숙련 및 중숙련 노동자 그룹의 일자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연구팀 역시 이런 분석 결과가 기존 자동화의 역사에서 나온 결론과 모순된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밝혔다. 수작업이 기술로 대체되고 자동화가 확산되면, 항상 기초적인 역량의 일자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AI는 임금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연구팀은 “명확한 징후”를 식별할 수 없지만, 수집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AI가 임금에 "중립 또는 약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지난해 12월 유럽중앙은행(ECB)이 발표한 보고서의 내용입니다. 그간 AI 노동 대체와 관련해 수많은 보고서들이 쏟아져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독특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기억에 남았습니다. 유럽 16개국에서 9년간 수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한 결과, 고숙련 일자리에서도 AI는 새로운 직업을 창출했고 의외로 저숙련 일자리도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하는데요. 다만 보고서는 정확히 AI가 노동자들의 '임금'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과거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미래의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고 볼 순 없겠지만 - 적어도 AI 기존 노동의 '완벽한 대체'가 되지 않을 때, '완벽한 대체가 될 수 있다'는 환상 자체가 '임금' 하락에 막강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그 효과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자동화 아닌, ‘쪼개진 노동’ 먹고 자란다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3100자

🖍글 속 한 문장

인공지능(AI)과 자동화를 앞세운 디지털 기술은 기계가 알아서 자동차를 주행시키고, 무인 매장에서 물건을 팔고, 카메라로 특정인의 얼굴을 포착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토피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세상에 ‘과연 노동은, 노동자는 존재할 수 있는가’ 물음이 나오곤 하는데, 이 묵직한 물음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검색 엔진, 앱, 스마트 기기 배후의 “은밀한 자동화 장소”에는 항상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섬네일 사진은 18세기 '체스를 두는 로봇 Turk' 기계를 그린 그림입니다. 아마존의 미세노동 서비스는 여기서 이름을 떼서 '아마존 메커니컬 터크'라고 붙였는데요. 이 글은 <노동자 없는 노동>이라는 책의 서평입니다.

2023년 시작된 챗GPT 열풍 이후 많은 화이트칼라 직종이 '대체'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높아지며, 한때 '블루칼라가 답이다!'라는 기사들이 유수 언론사에서 앞다투어 나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읽어가다보면, 필수노동 등 블루칼라 노동이 설령 본질적으로 대체되긴 어렵더라도 미세하게 쪼개져, '플랫폼'에 의해 수수료를 내는 방식으로, 또한 그 뒷단의 저평가되는 노동들로 환상을 메우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회차의 반응

지난 회차(‘눈길을 끌지 않았던 사건들 [6월의김스피]’)에 대한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모아 소개합니다. 편지로 다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 버튼을 누르면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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