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장은 틀림없이 뇌보다 먼저 존재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아를 ‘뇌’라고 여기는데, 과학자들이 이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어요.
장을 ‘제2의 뇌’로 부르는 것을 혹시 들어보셨나요? 우리의 소화기관은 뇌의 명령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뇌 못지않게 복잡하고 큰 신경망을 갖추고 있답니다.
단지 먹은 것을 부수고 흡수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책 <매력적인 장 여행>의 저자 기울리아 엔더스는 장을 ‘우리 몸에서 가장 큰 정보 수집 기관’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장은 평소에는 시시콜콜한 일들을 뇌와 상의하지 않고 직접 처리하다가, 썩 중요해 보이는 일이 벌어지면 신호를 보냅니다. 과음을 예로 들어 볼까요. 너무 많은 알코올이 들어온 게 파악되면, 장이 뇌에 이를 알립니다. 뇌가 이 정보를 의미 있다고 여기면 구토가 시작돼요.
배가 자주 아프거나 과민성 장 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의 뇌를 관찰해 보면, 뇌와 장의 소통이 과하게 활발한 점이 포착된대요. 건강한 사람의 장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소소한 일들이, 과민성 장 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의 몸에선 어떤 이유에선지 자꾸만 뇌에 전달되어 ‘불편하다’ 느낀다는 거예요.
기분도 장이 결정한다
화가 치밀어 오르거나 시간에 쫓길 때 배가 아프거나 속이 더부룩해지는 걸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뇌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장이 쓸 에너지까지 바짝 당겨씁니다. 장은 소화할 에너지를 아끼고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도 잠시 멈추면서 뇌에게 양보해요.
잠깐 이렇게 하는 것은 괜찮지만, 지속하면 곤란합니다. 장은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뇌에 불쾌감을 전달합니다. 음식도 거부하고요.
그런데 약간의 반전이 있어요. 우리는 뇌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장에 영향을 줄 거라고만 생각하는데, 실제론 반대의 일도 일어납니다. 장 상태에 따라 뇌가 영향을 받아요. 바꿔 말하면 우울해서 배가 아프거나 식욕이 떨어진 게 아니라, 장 상태가 좋지 않아서 우울한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뇌에 세로토닌이 많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적으면 울적해지게 됩니다. 이 세로토닌의 95퍼센트를 장 세포가 만들어요.
오랜 시간 동안 의사들은 우울증의 원인을 뇌에서만 찾았는데, 요즘 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는 논의가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어요. 각종 뇌화학물질은 장에서 생산되고, 심지어 그 양도 장이 조절합니다. 학자들이 ‘기분이 장에 의해 조절된다’고까지 말하는 이유예요.
장내 미생물이 바뀌면
재미난 실험 결과 하나 소개할게요. 이전에 장내 미생물의 조합이 사람마다 지문처럼 다르다고 말씀드린 것 혹시 기억하시나요? 장내 미생물이 우리 몸에서 하는 역할이 너무나 중요해서, 어떤 학자들은 이 미생물군을 아예 하나의 신체 기관으로 쳐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랍니다.
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쥐들과, 모험심이 많고 용감한 쥐들로요. 이들이 가진 주요 장내 미생물군을 서로 바꿔봤습니다. 놀랍게도 두 그룹 쥐들의 성격이 서로 바뀌었다고 해요. 물론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상당히 흥미롭지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장내 미생물군에 변화가 생깁니다. 나쁜 쪽으로요. 좋은 박테리아가 줄고 몸을 불편하게 하는 무리가 쑥쑥 세를 키워요.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처음에는 외부 요인 때문에 기분이 나빴지만, 이제부터는 망가진 장내 환경 때문에 나쁜 기분이 지속됩니다.
이 상황에서 탈출하려면 역시, 잘 먹어야 합니다. 좋은 미생물들이 다시 세를 불리고 다양한 미생물이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먹이를 줘서 도와야 해요.
고기 앞으로? 땡!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한때 유행했던 이 말에 동의하는 끼니어님도 계실 거예요. 아주 단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습니다. 먹으면 반짝 기분이 좋아지는 초콜릿, 감자칩, 각종 정제 탄수화물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이 음식들은 장내 미생물의 다양성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몸의 염증 반응을 키워 종국엔 우울감을 유발할 소지가 커요. 장내 세균의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일, 채소, 통곡물, 견과처럼 섬유소와 영양이 풍부한 것을 고루 먹어줘야 합니다.
아직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데 장내 세균이 틀림없이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들이 우리의 감정을 좌우하는 셈입니다.
슬프고 힘든 때일수록 좋은 음식을 잘 챙겨 먹어야 단단하게 어려운 국면을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펼치게 되었습니다.
휴대폰은 치워두고 먹자
소화기관의 신경망과 장내미생물에 관해서는 아직 밝힐 것이 무궁무진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먹는 방식 또한 우리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에요.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해 봅시다. 오늘은 두 가지를 제안해 볼게요.
-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따뜻하게 드세요. 장의 부담을 덜어주면 기분이 훨씬 나아집니다.
- 식사 때 만큼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오롯이 먹는 일에 집중해 보세요. 모든 스트레스는 소화를 방해합니다.
<참고자료>
- 기울리아 엔더스 <매력적인 장 여행>, 와이즈베리
- 데이비드 펄머터 <장내 세균 혁명>, 지식너머
- 에다 다카시 <장내 세균의 역습>, 비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