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후보의 선거 키워드 ‘대통합’은 매우 적절한 전략인 것 같다. 문재인 후보의 ‘일자리’나 안철수 후보의 ‘혁신 경제’는 이미 국민통합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 박 후보에게만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와 요구가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동안 흔들림 없는 대세론의 주인공이었으며 지지자 숫자가 가장 많은 후보가 ‘많은 사람을 보듬는다(?)’는 통합을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는 옛날 옛적, 한반도 남동쪽 일부 고을을 장악한 영주의 딸, 공주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 영주의 공덕에 대해서는 지면상 생략하고, 아버지가 측근에 의해 살해된 후 평소 그의 유지(지역 차별)를 지나치게 계승한 아버지 후배들이 다른 고을 사람들을 마구 죽인 후 새 영주가 되었다.
전직 공주의 지위는 애매해졌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자신이 공주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는 듯하다. 33년 만에 권토중래의 기회가 왔다. 아버지는 특정 지역의 영주였고 반대 세력은 온 나라에 퍼져 있으니, 통합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녀로서는 아버지 비판 세력의 주장을 이해할 수도 없는 데다 타 후보들에 비해 비용, 조직 모든 면에서 부족할 것이 없는데, 통합을 호소해야 하니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지난 대선 이명박 후보와 당내 경선 때 잠시 ‘여성 대통령’ 여론이 있었다. 당시는 상대가 이명박 후보여서 상대적으로 그녀가 돋보였다. 최소한 ‘생물학적’ 여성인 그녀는 여야를 막론하고 (성)폭력, 술주정, 욕설을 일삼는 남성 정치인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런데, 그녀는 진짜 여성인가?
가부장제, 성(차)별, 남성 중심. 이 용어들은 각각 의미가 다르지만, 편의상 ‘가부장제’로 통일하면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은 권력, 부, 명예를 겸비한 최상층 남성이 아니다. 실제 이들의 삶은 피로하고 외로우며, 정상적인 사회일 경우 엄청난 노동과 책임감을 감당해야 한다. 특히 돈과 달리 명예와 능력은 쉽게 상속되는 것이 아니어서 본인의 노력으로 획득해야 하는 자원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은 남성의 수호자, 피해자, 수혜자, 부역자, 저항자 등 다양하다. 5000년 가부장제는 이 다양성으로 인해 지속될 수 있었다. 이 중 대다수 여성들의 로망은 ‘수혜자’이고 그 최고 형식은 아버지의 딸이다. 물론 모든 아버지의 딸이 아니라 권능한 아버지의 딸. 공주! 하지만 이런 아버지는 극소수여서 공주로 태어날 확률은 로또 당첨보다 낮다. 공주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공주병’에 걸리는 것이다. 능력 있는 배우자를 만나는 것도 좋겠지만 이 역시 가능성이 낮은 데다 무엇보다 리스크가 크다. 백마 탄 왕자처럼 보였던 남편은 구타, 외도, 극도의 게으름 등 나중에 ‘이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많지만, 아버지는 부성이라는 가족제도의 외피 덕분에 안전하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즉, 부자 간에는 남성 연대와 동시에 살부(殺父) 욕망까지 있지만, 부녀 간에는 정치적 긴장 대신 친밀감이 있다. 특히 본인의 능력이 뛰어난 아버지일수록 웬만한 아들은 성에 차지 않는다. 못난 아들보다는 똑똑하면서도 순종적인 딸이 훨씬 낫다. 굳이 사례가 필요한가?
공주의 진로는 두 가지다. 아버지가 강대국의 왕이라면 정략결혼을 하거나 힐튼가의 상속녀처럼 현대판 공주로 산다. 약소국일 경우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영화 <뮬란>처럼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거나 구국의 명분으로 복위하거나. 박 후보는 어디에 해당할까.
박근혜 후보는 여성이 아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숫자가 ‘2’라는 사실 외에는, 여성과 가장 거리가 먼 여성이다. 그녀는 여성도 국민도 대변하지 않는다. 그녀의 몸은 ‘아버지 박정희’를 매개한다. 이런 현상이 바로 “~화신(化身)”이다. 이는 시비, 호오 차원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반드시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일 따름이다.
세습에 대한 세간의 혐오는 북한에만 해당되는 듯하다. 재벌 세습이나 부녀 간 세습에는 관대하거나 심지어 부러워한다. ‘아버지의 딸’은 남녀 모두가 욕망하는 가부장제의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부자 간 세습은 아들의 자질과 무관하게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지만, 딸은 가문을 재건하고 부패, 추문, 잔학성, 과대망상 같은 아버지의 남근성을 희석시킨다. 플레이보이지(誌) 창업자 휴 헤프너가 딸 크리스티에게 경영권을 맡긴 경우가 대표적이다.
만에 하나 그녀가 당선되더라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 운운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의 정체성은 공주이지, 여성도 시민도 아니다. 아무리 과거사 ‘해결책’을 제시해도 진정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녀의 대권 도전 자체가 ‘충과 효의 갈등’이라는 시대착오적 틀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인간 박근혜’의 불가능성. 이것이 그녀의 실존이자 한국현대사다. ‘대통령 박근혜’는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근대 민주주의의 성과가 아니라 신분사회의 부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