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 | 여성학 강사

노동 개념에 관한 글을 쓸 일이 있어 영화 <회사원>을 봤다. 영화평론가 듀나의 지적대로, 주인공의 직업은 현실에서는 드물지만 영화에서는 빈번히 등장하는 킬러다. ‘살인청부회사 영업2과장’(이런 직종은 회사보다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 같은데…). ‘살인주식회사’까지는 몰라도 청부 폭력은 일반인에게도 아주 생소한 분야가 아니다.

내게 흥미로웠던 점은 영화에서 반복되는 대사, “이건 일일 뿐이야”였다. 미국 범죄 드라마의 등장인물들도 합법, 불법, 비합법적인 업무에 상관없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똑같이 말한다. “내가 할 일(job)을 했을 뿐” 혹은 “가족 때문에”. 언제부터 노동이 이렇게 신성해졌을까. 비꼬는 말이 아니다. 다 먹고살기 위함이니, 일의 귀천도 잘잘못도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긴, 요즘 세상에 자기 직업에 보람과 흥미를 느끼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정희진의 낯선사이]‘회사원’의 일

인류 최초의 직업인 ‘포주’의 일은 어떨까. 성매매의 형태는 결혼제도부터 인신매매까지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워낙 복잡한 구조여서 찬반 차원에서 논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나는 “성 판매와 그 알선도 노동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너무 지당한 말이어서 이상한 것이다. 심지어 일부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일이냐 아니냐’로 논쟁을 벌인다. 그들은 이미, 당연히, 노동자다. <회사원>과 미드의 인물들에게도 똑같은 심정이다. 그들의 일은 노동이다. 그것도 중노동이다. 일이란 무엇인가. 지금 시대에 일(labor)을 “공적 영역에서의 임금 노동”이나 “의식적으로 대상을 변화시키는 행위”로 한정하는 사람은 없다. 3차산업이 비대해지고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적인 노동 개념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

문제는 일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필요한 질문은 “일인데, 이 일이 일이어야 하는가” “일인데, 어떤 일인가” “일로 인정받으면 좋아할 사람은 누구인가”이다. 다시 말해, ‘일이다’와 ‘일이어야 한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생계로서 일’ 개념에 동의한다고 해서, “누군가(여성)는 그런 일을 해야 한다”거나 “(성 판매는) 일이어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성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어서일까, 남성 중심적인 성문화 때문일까?

살인 청부가, 조직폭력 집단의 업무가, 더 나아가 전쟁이 “일일 뿐”이라면 힘없는 사람들은 이들의 ‘신성한 노동’으로 죽어갈 것이다. 이는 노동이 아니라 인간을 대상으로 한 권력층의 소비 활동이다.

직업군이 간소하고 게으름이 죄악시되던 시대, 직업이 종교적 소명(calling)에 가까웠던 시대, 즉 ‘산업의 혁명’을 위해 노동력이 필요한 시절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 “노동은 신성하다”는 언설이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지금은 생계 수단이 수천 가지인 데다 인류 대다수가 이용당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고용의 종말 시대다. 노동관, 직업관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졌고 이는 개개인의 세계관 붕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직업의 귀천, 아니 인간의 귀천은 돈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유기농 농사’는 괜찮은가. 인간의 노동은 자연 파괴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신성할 수 없다(일단, 인구 과잉이 문제다). 농부든 <회사원>의 일이든, 모든 직업은 그 자체로는 신성하지 않다. 의미 추구와 관련 있을 뿐이다. 절도가 직업이어서는 곤란하지만 의적은 다를 것이다. 인권변호사도 있지만 미국에는 이런 농담도 있다. “모기와 변호사의 공통점은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피의 양이다.” 물론 살인청부, 비리 변호사, 성 산업 등 이 글의 사례 업무가 사회에 ‘이롭지 않다’고 해서, 똑같은 수준에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요지가 늦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어떤 일이든 해야 할 각오를 요구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 유연하다는 말이 공포의 언어가 되었다. 일은 비참해지고 돈은 우아해졌다. 자본은 고용 대신 금융 게임에 골몰한다. 경제 성장이 고용을 창출하기는커녕 반대로 고용을 감축시키고, 이후 성장 역시 바로 그 고용 감축에서 시작된다. 파이가 커질수록 일자리는 줄어든다. 이제 일자리는 기업 이미지 광고에서 보듯 자본의 자선에 달려 있다.

소통은 차치하자. 우리는 얼마나 현실을 공유하고 있는가. 여론은 대선 후보들에게 일자리 창출을 요구하지만 사실 이는 그들에 대한 이중 메시지거나 현실 파악이 안된 자세다. 약속하는 쪽도 마찬가지다. 공약(空約)이어도 문제, 무지의 소산이어도 문제다.

현재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우리가 투덜대는 ‘치사한’ 일자리조차 이미 바닥났거나 그나마 ‘스티브 잡스 비슷한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우리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 ‘사회적기업’과 같은 덜 괴로운 일자리도 생산해야 하고, 일이되 일이 되어서는 안되는 일의 확산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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