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규 대중문화부 차장

고귀한, 또는 권력을 쥔 이들의 유머는 장삼이사의 것보다 강하게 먹히는 것 같다. 범접키 어려워 보이는 그들의 인간적 풍모는 웃음이 가미될 때 더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도 에둘러 웃음과 함께 전달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지난해 2월 영국에서는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가 대대적으로 이어졌다. 찰스 왕세자가 축하 콘서트 연설을 했다. 그는 “폐하, 폐하(your majesty, your majesty)”라고 말하고는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엄마(mummy)”라고 했다. 87세 여왕에게 65세의 대영제국 왕세자가 한 말이다.

[마감 후]유머

폭소가 터졌고, 축제 분위기는 더 달아올랐다. 찰스 왕세자는 “(엄마는) 이 자리가 가능토록 한 분들을 위해 감사 인사를 제가 하길 바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연설을 이어갔다. 또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오늘 날씨가 좋다. 아마 제가 기상예보를 하지 않아서임이 분명하다”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지난 4월27일 백악관 출입기자단 연례만찬에서 “요즘 거울을 보면 ‘아, 내가 더는 예전의 그 건장한 무슬림 사회주의자가 아니구나’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끊이지 않는 ‘오바마 무슬림설(說)’ ‘오바마 빨갱이설’을 비꼰 것이다.

올초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출된 직후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추기경 형제들이 로마 주교(교황)를 찾기 위해 지구 끝까지 갔던 것 같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는 남미 대륙 끝의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추기경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자신을 지지해 준 데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신께서 여러분이 한 일을 용서하기를 바란다”는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이들 유머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쳇말로 ‘셀프 디스(Self Dis·자기 비하)’와 반전이다. 스스로를 ‘어리광쟁이’ ‘과격분자’ ‘시골뜨기 얼치기’로 각각 비유했다. 남이라면 감히 면전에서 꺼내지 못할 말을 스스로 하며 상황 반전을 꾀한다.

한국의 높으신 분들의 유머는 어떨까. 최근 두 분이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은 최근 같은 당 김무성 의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김무성 의원의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사전 입수’ 발언을 유출한 사람으로 지목되자 해명하려 한 것이다.

“저는 요즘 어떻게든 형님 잘 모셔서 마음에 들어볼까 노심초사 중이었는데 이런 소문을 들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형님께서 무엇이든 시키시는 대로 할 생각이오니 혹시 오해가 있으시면 꼭 풀어주시고 저를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사시와 행시를 합격한 49세의 전직 검사 출신 재선 의원이 보낸 문자메시지 치고는 좀 ‘조폭’스러워 헛웃음이 난다.

또 다른 한 분은 학교법인 영훈학원 김하주 이사장이다. 영훈국제중에서 돈을 받고 성적을 조작해 학생을 입학시키고, 횡령·사기 등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 2일 그는 서울북부지법에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갈 때 의료용 간이침대에 누워 링거까지 팔에 꽂았다. 영장이 발부된 뒤 구치소로 가기 위해 법원 청사를 나갈 때는 걸어서 빠져나왔다.

이를 지켜본 이들은 “북부지법에서 기적이 나타났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과 같다”거나 “한국 법원은 대단하다. 병자도 고친다”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개인은 아니지만, 국정원 활약도 대단하다.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다. 스파이들이 모인 곳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남재준 국정원장) 그랬단다. 그것도 내용을 이리저리 꿰맞춰 단장취의(斷章取義)를 해놓았다. 동네 흥신소도 안 할 것 같은 ‘어설픈 플레이’다. 오죽하면 ‘국정원이 발췌하면 코란도 성경이 된다’는 유머까지 나왔겠나.

이들을 보면 희극 속에 비극이 들어 있고 비극 속에 희극이 있는, ‘희비극’ 작가나 배우들 같다. ‘웃픈(웃기면서 슬픈)’ 일이다.


Today`s HOT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