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스패이트’호를 닮은 대한민국

표창원 | 범죄심리학자·프로파일러

1835년 11월25일, 통나무를 가득 싣고 항해하던 ‘프랜시스 스패이트’호가 풍랑을 맞아 좌초했다. 다행히 화물칸에 가득 찬 통나무의 부력으로 가라앉지 않은 채 표류하던 선체에는 18명의 선원이 생존해 있었다. 식량도 바닥나고, 빗물을 받아 겨우 연명하길 13일째, 그동안 어떤 배도 지나지 않아 구조의 희망은 희미해져 있었다. 모두가 굶어 죽을 것이라는 극한의 공포에 내몰렸을 때, 선장이 제안을 한다. “오지 않는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다 모두가 굶어 죽기보다는, 소수를 희생해 다수가 사는 길을 택하자.” 제비뽑기를 통해 한 명을 고른 뒤 그의 고기를 먹자는 얘기였다. 격론이 벌어졌지만, 선장을 비롯해 나이와 경험이 많은 고참 선원들의 주도로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이자는 만장일치에 도달했다.

[표창원의 단도직입]‘프랜시스 스패이트’호를 닮은 대한민국

그 결과 가장 어린 15세의 수습 선원 ‘오브라이언’이 뽑혔다. 소년은 죽음을 받아들였고, 나머지 선원들은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모두 3명이 희생된 뒤 ‘프랜시스 스패이트’호는 인근을 지나던 배에 발견되어 구조되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살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길고 격렬한 법정공방 끝에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공리주의’적 논리와 피해 당사자들이 ‘동의’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법적으론 합리화, 정당화되었지만 윤리적 철학적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며, 다수의 생명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소수의 생명을 희생하라고 요구할 수 없다는 ‘인본주의’ 사상에 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일부 선원이 지인에게 ‘사실 제비뽑기는 선장과 고참 선원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자신이 희생당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주도한 ‘다수를 위한 소수 희생 합의’는 공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기자 겸 작가였던 잭 런던에 의해 소설로도 쓰인 ‘프랜시스 스패이트’ 이야기는 오늘 한국사회를 많이 닮아 있다.

‘북한과 공산주의 위협’ 앞에서 안보가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정치인과 비판적 지식인과 시민들을 ‘종북’으로 몰아 ‘희생’시키고 있고, 용산지역 개발을 통해 다수에게 경제적 이익을 안겨 주어야 한다는 명분이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의 죽음을 불러온 ‘희생’을 강요했다. 수도권과 영남 대도시 시민들에게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고 국가산업 진흥을 도모해야 한다는 필요가 밀양 주민들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들과 열악한 근로조건 및 실직의 위험 속에 노출된 청소 노동자들 역시 ‘15세 소년 선원 오브라이언’ 같은 입장에 놓여 있다. 그 ‘다수를 위해 희생해야 할 소수’가 선정된 과정, 혹은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결론 도출 과정 자체가 ‘불공정’했다는 것도 확인되거나 의심받고 있다. 더구나 이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나 당사자의 ‘동의’에 이르지도 않았다. 권력이나 다수 여론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프랜시스 스패이트’호 관련 판례나 기사, 혹은 잭 런던의 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결국 부정한 방법에 의해 생존을 보장받고 약자의 고기를 뜯어먹는 불의하고 잔혹한 ‘다수’에 속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반대로 ‘15세 소년 오브라이언’의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까를 상상해 보게 되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니라 해서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정치와 선거개입, 6명의 희생을 부른 뒤 주차장만 덩그러니 남긴 용산 철거, 2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추운 겨울 찬 바닥에 몸을 내맡기며 항거하는 밀양 할매 할배,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눈물짓는 청소 노동자들을 모른 체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우리는, ‘프랜시스 스패이트’호를 닮은 대한민국을 자손에게 물려주어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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