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중동 건설 붐

장정현 콘텐츠에디터

1970~1980년대 널리 불렸던 이 노래, 생각날지 모르겠다. “아빠가 떠나신 지 사계절이 갔는데 낯선 곳 타국에서 얼마나 땀 흘리세요 오늘도 보고파서 가족사진 옆에 놓고 철이 공부 시키면서 당신만을 그립니다….” 1979년 가수 현숙이 불러 중동근로자 가족들을 울린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다. 이 노래는 중동 붐을 상징하는 ‘18번 곡’으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당시 중동국가 건설 붐은 대단했다. 넘쳐나는 오일달러를 도로, 항만, 공항 등 사회간접자본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베트남 특수’가 끝나고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한국에 오일달러로 흥청대는 중동은 ‘하늘이 준 메시지’였다. 1973년 삼환기업이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면서 중동 진출 서막을 알렸다. 박정희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은 기업들이 앞다퉈 중동으로 향했다. 1975년 7억5000만달러에 불과하던 건설수주액이 1980년 82억달러로 10배 이상 늘었다. 이 기간 한국 외화수입액의 85.3%가 오일달러였다. 근로자 수도 급증했다. 1975년 6000명이던 것이 1978년 10만명에 육박했고 한때 20만명에 달했다.

[경향으로 보는 ‘그때’]1970~80년대 중동 건설 붐

경향신문은 1982년 3월15일자에 전면을 할애해 ‘중동근로자들의 피땀 24시 현지르포’를 실었다.

인터뷰 내용이 눈물겹다. 쿠웨이트에서 만난 한동국씨는 “1년간 근무하면서 시내엔 딱 세 번 나가봤다. 쉬는 날 밖에 나가 돈을 쓰느니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고 말했다.

근로환경은 가혹했다. 7, 8월이면 기온이 섭씨 40~60도까지 올라가 온몸을 가리고 작업해야 한다. 수돗물엔 석회분이 많아 마시면 배탈이 나고 담석증을 유발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식사시간 빼고 하루 10시간, 월 2회 휴무 280시간 씩 일했다. 하지만 근로자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시간 외 근무를 밥 먹듯 했다. 금녀·금주에다 오락거리 하나 없는 건설현장은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모래밥을 씹으며 ‘싸대기’(과일 등을 발효시켜 만든 밀주) 한 잔으로 타국살이의 외로움을 달랬다.

부당노동행위도 다반사였다. “대부분의 건설사들이 근로자에게 불리한 계약을 체결하고, 임금을 상습적으로 체불하고, 부실한 식단을 제공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았다”(1988년8월25일자 경향신문). 오일달러는 이렇듯 근로자들의 피땀이 밴 ‘눈물 달러’였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중동 개그’가 SNS를 뜨겁게 달궜다.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라.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 16년래 최악의 청년실업률 해결책이 고작 ‘중동에 가라’라니, 중동 순방 후 제2의 중동 붐에 혹한 박 대통령의 발언이 청년들을 분노케 했다. 자국 청년들도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치는 곳이 중동이다. 약속의 땅은 없다. ‘니가 가라, 중동’에 공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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