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
[세상읽기]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미국 워싱턴 D C에 있는 ‘전국민주주의연구소’는 “민주주의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란 구호를 내걸고 있다. 예를 들면, 무려 30년 동안 수하르토 독재를 겪은 인도네시아가 1998년 이래 민주화의 길을 걷고 있는데, 이 연구소 시각에 따르면 무려 1만7000개 섬에서 40여 다른 언어를 쓰는 2억5000만명이 민주주의를 일구는 일은 결코 불가능은 아닐지라도 대단히 장구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같은 도시에 있는 ‘미국평화연구소’ 역시 “민주주의는 일련의 과정이자 긴 여정”이라 말한다.

2017년의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2016년 10월 말경부터 촛불민중들은 손잡고 광장으로 몰려나와 “나라를 바꾸자!”고 외쳤다. 촛불의 힘은 강했다. 지금 하라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 같은 국회 탄핵 소추, 그리고 헌재의 “피고인 대통령 박근혜 파면” 결정 역시 촛불 덕이었다. 2017년 5월10일, 문재인 대통령 당선이라는 사건은 1차 촛불혁명의 완결판이었다.

2차 촛불혁명은 지금부터다. 더 긴 여정이 우리를 기다린다.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 곳곳에서 지난 수십년 쌓인 온갖 폐단들을 철저히 청소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멋진 ‘국민의 집’을 지어 올려 모든 시민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이후 이 땅에서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이 부단히 존재했으나 거듭 미완으로 끝났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그렇게 민주주의는 나선형을 그리며 지나칠 정도로 서서히 전진과 멈춤, 후퇴를 반복하면서 나아간다. 시스템의 문제와 사람의 문제가 서로 모순적으로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란 바로 이 장구한 여정을 한 걸음씩, 투명하고도 정의롭게 밟아 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한반도 전체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발사대 2기를 이미 대선 직전에 비밀 배치했을 뿐 아니라 대선 뒤에도 무려 4기를 몰래 반입했다. 그러고도 국방부는 모른 체했다. 대통령이 ‘충격’을 받고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고의적 보고 누락’이었다. 아마도 박근혜 정부 당시 미국 측과 복잡한 밀약이 있었고 관련자들은 ‘속앓이’ 중이었을 것이다. 적폐는 끈질기고 청산은 힘겨울 수밖에 없다.

새 정부의 인사 문제 역시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가시밭길인지 암시한다.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고위’ 인사들은 자녀나 배우자의 특혜 의혹, 위장 전입, 탈세나 누세, 거짓말 해명, 부동산 투기, 부적절한 재산 증식 등 수많은 암초에 걸려 휘청거린다. 그나마 깨끗한 사람들이 모인 곳도 이러하니, 전통적 기득권 정당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물론 같은 의혹에도 경중이 있고, 맥락에 따라 죄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는 개별 양심이나 비교 우위에만 호소해선 안된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제도나 정책이 있다면 심사숙고하여 고쳐야 한다.

30일 이상 주거지를 떠나 있으면 새로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한 주민등록법은 수많은 대학생들이나 해외 방문자들을 본의 아니게 ‘위장전입자’로 만든다. 또 한가한 동네나 한밤중의 4거리 신호등은, 설령 아무도 없더라도 혼자 서 있게 하거나 많은 사람과 차들을 ‘신호 위반자’로 만든다.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 개념으로 우리 일상을 보면 더욱 갑갑하다. 층간소음 문제로 이웃과 싸우거나 죽이는 일이 드물지 않으며, 투자라는 이름 아래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 난개발도 만연하다.

인격체로서의 성장보다 명문대 진학이 인생 성공이라 여기는 부모나 교사들도 태반이다. (미국의 트럼프처럼) 기후위기가 닥쳐도 온실가스 감축 노력엔 모르쇠다. 게다가 여전히 농업이나 노동 문제에 대해선 한국 사회 전반이 ‘문맹’ 수준이다.

이는 결코 대통령을 새로 뽑았다고 4대강 봇물 틔우듯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적폐 대통령을 청산하고 (비교적) 민주 대통령을 선출한 것은 큰 사건이지만, 그 바탕엔 긴 과정이 있었다.

앞으로 우리는 더 긴 과정이 필요하다. 국방부의 시치미 대응도, 성공한 자들의 꼼수 인생도, 일상 속의 반민주·반생명적 행위도 모두 청산 대상이다. 2차 촛불혁명으로 우리 삶의 전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뿌리 내려야 한다. (인간 존재를 위협하는) ‘4차 산업혁명’조차 2차 촛불혁명에 우선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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