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밥’이란 명제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
[세상읽기]‘민주주의는 밥’이란 명제

“이제 우리의 새로운 도전은 경제에서의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가 밥이고, 밥이 민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소득과 부의 극심한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017년 6월10일, 6월항쟁 30주년에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명언이다. 30여년 전의 나 역시 군부 독재 타도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물론 공안 기관의 고문에 목숨을 잃은 박종철이나 폭력 경찰의 최루탄에 쓰러진 이한열을 생각할 때, 브레히트 시인이 고백한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평생 안고 살지만, 당시엔 군부 독재를 종식하고 정치민주주의만 이루면 죽음이 아닌 삶(밥)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도 갈 길은 멀다.

물론 ‘민주주의가 밥 먹여준다’는 말은 결코 거짓말은 아니다. 1960년 3월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저항한 민중들도 “배고파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외쳤다. 1987년 6월 시민항쟁과 7~9월의 노동자 대투쟁 역시 ‘민주주의 쟁취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몸부림이었다.

실제로 1980년대 전반기의 평균 경제성장률이 8.1%였음에 비해 1980년대 후반기에는 두 자리 수치인 10.1%를 기록했고, 노동자의 명목임금 또한 전반기 월평균 22만원에서 후반기 평균 42만원으로 두 배 가까이 올랐다. ‘3저 호황’으로 외채를 신속히 갚아 나가자 국제통화기금(IMF)마저 “속도를 좀 늦추라”고 걱정할 정도였다.

이 모두는 한국 자본주의 고도 축적의 자연스러운 결과이지만, 시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상징되는 민주화 과정이 민중의 밥그릇을 키운 결정타였음도 확실하다. 민주주의는 한편으로 경제성장에 동기부여 역할을, 다른 편으로 소득분배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것은 다시금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를 더욱 고양하는 힘이 된다. 그리하여 1987년 이후 한국 경제는 1997년 무렵까지 약 10년간 사상 최고조기를 달렸다.

그 뒤의 ‘IMF 외환위기’는 본질적으로 세계자본이 한국 경제에 ‘글로벌 스탠더드’라 불리던 신자유주의를 강제한 충격요법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김대중 정부가 그 시기를 잘 ‘관리’해 연평균 경제성장률 5.3%를 기록했고, 연이은 노무현 정부 아래서도 4.3%를 달성했다. 그 뒤 ‘역민주화’의 상징인 이명박 정부 아래서는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3.1%, ‘국정농단’으로 얼룩진 박근혜 정부 땐 2.8%까지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그리 나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득분배 상하 10분위 배율을 보면 2006년 이후 가파르게 악화해 왔다. 이른바 ‘금수저-흙수저론’은 자산 및 소득 불평등의 고착화를 상징한다.

이제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주의는 곧 밥”이란 명제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대통령이 강조한 일자리 해법, 소득 및 부의 불평등 해소가 정답일까? 또 노사정 대타협을 통한 경제민주주의 구현은 어떤가? 모두 중요하지만 여전히 공백이 많다.

나는 우선, “민주주의는 곧 밥”이란 명제에 적극 공감하면서도, 정작 ‘밥’을 만드는 농민이나 농촌에 대한 사회적 위기감이 높지 않음을 우려한다.

현재 우리의 곡물자급률은 23% 수준인데, 그나마 석유로 짓는 농사이며(쌀을 포함해 그렇다) 쌀 제외 실질 자급률은 5%도 안되는 (핵전쟁만큼이나) 고도 위험 수준이다. 쿠바의 1990년대처럼 대통령에서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이 (유기농 중심의) 식량 자급률 높이기에 동참해 90%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

또 대·중소기업 차별, 정규·비정규직 차별, 남녀 차별 등 각종 차별과 불평등이 “민주주의는 밥”이란 명제에 걸림돌이긴 하나 (허무감이나 굴욕감을 촉진하는) 실제 일의 내용이나 생산과 소비 전반을 성찰하지 않은 채 ‘보상·절차 공정성’만 높인다면, “더 넓고 깊은 민주주의”는커녕 자본 합리화만 이룰 위험이 크다. 촛불혁명 이후 주가가 최고치를 달리는 것이 그 증거다.

나아가 모든 인사 청문회에서 거듭 드러난 바, 보수나 진보를 불문하고 성공한 사람 치고 ‘부동산’ 투자를 통한 재산 증식을 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자본주의인데 별수 있느냐?” 하겠지만 나는 땅을 부동산으로 보는 시각을 지양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밥”이란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땅은 모두의 것이니까. 아니, 1854년 북미 시애틀 추장의 외침처럼, 모든 사람들이 땅의 일부이니까. 과연 우리는 고개 숙여, 어머니 대지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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